27화
방 안에는 엘리나3과 똑같이 생긴 여인이 앉아있었다.
“예전에 한번 만난 적이 있죠? 엘리나4라고 해요.”
라라는 따라 들어서는 크리온을 힐끗대던 것을 멈추고 엘리나4를 응시했다. 그녀가 앉은 소파와 테이블 위에는 책들이 쌓여있었는데 크리온에게 글을 가르쳐 주던 중인 것 같았다.
라라는 엘리나4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나는 머리 말리고 올게. 얘기 나누고 있어.”
엘리나3이 다른 방으로 들어간 사이, 크리온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라라와 마주 앉았다. 자연스레 침묵이 흐르며 테이블 위로 엘리나4가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려올 때였다. 크리온이 조끼 주머니에서 단어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 단어 카드에 적힌 걸 읽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직 제 독해력이 많이 부족해서 이 단어 뜻이 이해가 잘되지 않아요.”
“아.”
그제야 라라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크리온이 물려고 하지 않고 제게 정상적으로 말을 걸어 당혹스러웠으나 그것도 잠시, 그의 배시시한 미소에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졌다.
라라는 싱긋 웃으며 그에게서 단어 카드를 건네받았다. 단어 카드 앞면에는 귀여운 병아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디 보자…….”
카드를 뒤집은 순간 라라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글자를 세 개 겹쳐서 쓴 것처럼 조잡한 문자가 카드 뒷면을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아니, 이거 나도 못 읽는 고대어 문장이잖아…….’
벽돌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이럴까. 하나도 읽을 수가 없었다. 요즘 애들 교육 과정이 이럴 리 없을 텐데, 이 고난이도의 독해 능력을 요구하는 단어 카드는 대체 뭐란 말인가.
라라가 한동안 말을 아끼자 이를 달리 알아들은 건지 크리온이 눈치를 살피며 먼저 말을 꺼냈다.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아무래도 경제 전문 용어는 설명하기가 다른 단어보다 길어서 귀찮으니까요……. 사실 제가 2주 뒤에 국가 고대어 전문 자격증 시험을 보거든요. 아, 제가 지금 딱 GOEIC 900점인데 1급 딸 수 있을까요? 너무 긴장돼요. 이렇게 공부해서는 명함도 못 내민다던데…….”
남자의 머리 위에 귀가 달렸다면 시무룩하게 처졌을 테다. 라라는 대체 어떤 식으로 조언해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누가 자신에게 좀 조언을 던져줬으면 했다.
‘너무 비약적으로 발전했잖아!’
도대체 어떻게 하면 단기간 내에 저런 발전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라라가 굳어있는 사이, 크리온은 그녀에게서 다시 단어 카드를 받아들고 책을 읽고 있는 엘리나4에게 들이밀었다.
“저번에 비슷한 내용을 배웠는데도 모르겠어요… 엘리나4.”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다시 한번 설명해 줄게. 이 베르뉴파론 원칙을 이해하면 쉬워. 이 식에서 사용되는 56가지의 고대어들의… 설립된 킬라니아논 협회에선 상호 운용 가능한…….”
라라는 급쭈글해질 수밖에 없었다. 겸손하게 모은 두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채 두 사람의 지적인 대화를 들었다. 전문 용어가 섞여 당최 뭐라고 얘기를 나누는지 알 수 없었다. 정녕 같은 자국어를 사용하는 자국민이란 말인가. 통역사를 옆에 둬야 될 것 같았다.
30분 동안 단어 카드 설명이 이어지고 마침내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까 잔뜩 긴장해 있던 라라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크리온이 엘리나3에게 가본다며 잠시 자리를 뜨자 라라는 엘리나4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탁, 소리가 나게 두꺼운 책을 덮은 엘리나4가 입을 열었다.
“책을 다 읽어서 새로운 책을 가져와야 할 것 같아요. 잠시만 기다려 주겠어요?”
“아, 물론이죠. 다녀오세요.”
마침 어색한 참에 잘됐다 싶어 라라가 냉큼 대답했다. 엘리나4는 자리에서 일어나 높게 쌓인 책들을 단번에 들어 올렸다.
문 쪽으로 걷는 모습을 라라가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얼마 못 가 아슬아슬하게 쌓여있던 책의 탑이 흔들리더니 책 몇 권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라라는 엘리나4에게 다가가 떨어진 책들을 주워 들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같이 옮겨드릴게요.”
“그래 주신다면 감사하죠.”
왠지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 같은 클리셰가 여주와 엑스트라 사이에 일어난 것 같았지만, 라라는 모른 체했다.
그렇게 책을 나눠 든 채 엘리나4를 따라 도착한 곳은 그녀의 방이었다. 영애들 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장대나 전신 거울, 옷장은 어디 가고 방의 3면이 책장으로 되어있었다.
바닥에 쌓여있는 책들을 피해 걸어간 라라는 사람이 누워도 될 만큼 거대한 책상 위에 책을 내려놓았다.
“도와줘서 감사해요.”
“호호, 별말씀을요. 그보다 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신 것 같네요.”
“책은 저의 끝없는 탐구열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니까요. 아마 제국에서 제가 안 읽어본 책은 거의 없을 거예요.”
“엇, 그러면 혹시 『마법소녀 릴리카』도 읽어보셨나요?”
“『마법소녀 릴리카』요……?”
엘리나4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왔다. 세상에 자신이 모르는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은빛 눈동자 위로 옅은 파동이 일었다.
<이 오타쿠가!>
그사이 라라의 머릿속에선 신의 외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은근슬쩍 영업하지 말지어라. 여주를 오타쿠로 만들 일 있느냐.>
‘만화책이 뭐 어때서요!’
<책이랑 만화책이 같느냐! 지혜로운 모범생에게 만화책이 뭔 말이냔 말이다. 여주가 찾아보기 전에 얼른 말 취소하거라.>
신이 노하자 라라는 하는 수 없이 영업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호호, 아니에요. 모르셔도 돼요. 어차피 만화책이라 읽어봤자 쓸모없을…….”
“아뇨, 쓸모없는 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그 말에 라라는 반색했다.
“맞죠? 그렇죠? 세상에 어떤 몰상식한 신이 말이죠, 책에 등급을 매기지 뭐예요? 오호홋! 한번 읽어보세요! 덕질은 삶을 윤택하게 만든답니다!”
“잠깐만요.”
“네?”
“아까 말한 그 책, 어디선가 본 것 같아요. 정확히 뭐라고 했죠?”
“『마법소녀 릴리카』요……?”
갑자기 왜 저렇게 진지하나 싶어 라라가 잠시 찻잔을 내려둘 때였다. 엘리나4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두꺼운 서적 위에 놓인 안경을 쓴 그녀는 곧바로 서적을 뒤지기 시작했다.
“찾았다…….”
서적 속에서 누런 양피지 조각을 꺼내든 엘리나4는 마치 중대한 발견을 한 학자 같은 환희가 서린 얼굴이었다.
“그건 대체……?”
“황궁도서관의 금서 목록이에요. 우연히 책을 읽다가 발견한 건데 혹시나 몰라서 따로 숨겨둔 거예요.”
<황궁도서관 클리셰대로라면… 그곳은 엄청난 금서가 잠들어 있는 곳이니라. 그 금서를 통해 세상의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거나, 제국을 지배할 만큼 거대한 마력을 소유하게 될지니.>
그런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닌 금서를 왜 하필 제국에서 가장 출입이 많은 황궁도서관에다 보관하고 있는 건지 라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 같았으면 혹시 모를 국가의 위협이 될까 바로 태워버렸을 텐데 말이다.
그동안 양피지에 적힌 금서 목록을 훑던 엘리나4가 찾은 건지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여기 있네요. 『마법소녀 릴리카… 한정판 수록본』.”
“한정판 수록본이라면…….”
라라는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거대한 위력을 가진 진정한 보물이었다. 그것은 제 장르의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 것은 물론, 소지한 자는 모든 덕후들의 경외의 대상이 될 것이다.
“혹시… 언제 황궁도서관에 가시나요?”
라라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바뀌자 엘리나4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가실 때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신분이 낮은 영애는 아무래도 출입은 가능하더라도 금서가 숨겨져 있을 만한 깊숙한 곳까지는 들어가지 못할 테다. 대신 공녀와 동반 출입이라면 가능할 것이라는 실낱 가는 가능성에 라라는 모든 희망을 그녀에게 걸었다.
그런 라라의 절박한 모습에 엘리나4는 살짝 손끝이 떨렸다. 그 크기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지식의 해일이 몰려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책이기에 이렇게까지 애원한단 말인가. 지적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엄청난 마력을 가질 수 있는 마법 금서를 놔두고 뭐 하는 짓거리냐! 당장 클리셰의 순리를 따르지 못할까!>
“저도 그 책이 궁금하네요. 그러면 지금 같이 갈까요?”
“오, 감사해요! 일단 엘리나3의 손님으로 온 거라 말하고 올게요.”
“그동안 저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준비하고 있을게요. 황궁도서관의 좌표를 알고 있거든요.”
<만화책 빌린다고 만화방까지 비행기 타고 갈 소리를 하고 있네, X발! …환장하겠느니라.>
그렇게 『마법소녀 릴리카 한정판 수록본』을 찾기 위한 두 영애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들어가죠.”
라라는 긴장감에 소리 없이 침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황궁도서관에 온 것은 생애 처음이었다. 도서관인지 무도회장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건물의 내부는 웅장하고 화려했다.
백사장처럼 하얗고 윤이 나는 카펫이 복도 위를 길게 덮고 있었다. 엘리나4를 따라 황궁도서관 3층으로 올라온 라라는 감탄사를 흘렸다.
빼곡히 들어선 책장들은 웬만한 건물 벽과 맞먹을 만큼 커 보였다. 자료 분류가 되어있었지만 워낙 책의 양이 방대하다 보니 책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복잡한 책장의 미로를 지나자 좀 더 깊은 내부가 드러났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사람이 없었는데 이윽고 아무도 없는 도서관의 마지막 구간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아마 있다면 이 안에 있을 거예요. 사람들이 잘 찾지 않거나 분류를 하지 못한 책들은 전부 여기 있거든요. 금서를 숨기기 위한 장소로 적합하죠.”
마침내 원하는 것에 한 발짝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지만. 두 사람은 각자 나뉘어 행동하기 시작했다. 라라는 맨 뒤쪽부터, 엘리나4는 맨 앞쪽부터 책을 훑기 시작했다.
엘리나4는 아래 칸부터 차근차근 책을 꺼내 살폈다. 보통 책과 책 사이에 꽂아놓지 않고 책 아래나 뒤에 숨겨두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말이다.
“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