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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26)화 (26/115)

26화

낮게 감탄하는 라히를 마주 본 채 라라가 만화에 관한 얘기를 막 시작하려던 찰나였다. 그들의 테이블 옆을 지나치며 대화를 나누는 두 영애의 목소리가 정확히 두 사람의 귀에 들려왔다.

“알아알아. 나도 그 만화 봤었어. 흑마법사 너무 매력적이지 않니? 하아아…….”

“맞아. 흑마법사의 릴리카를 향한 짙은 소유욕이 대박이지.”

달콤한 한숨 소리를 흘려대며 영애들은 찻집을 나갔다. 흑마법사X릴리카를 좋아하는 마이너 취향에 거리감을 느꼈다. 괜히 기분이 묘해서 라라가 슬며시 입술을 다물자 맞은편에서 흥분한 듯 한껏 고조된 중저음이 튀어나왔다.

“흑마법사가 나쁜 남자라고 나름 인기가 있나 본데 흑마법사는 나쁜 남자가 아니라능! 왜 다들 모르냐능! 릴리카를 세뇌시키고 감금하고 마지막엔 강간까지 하려 한 천하의 개@#$미친#@쓰레기$%[email protected]사형시켜야 할 범죄자 새끼라능!!”

티 테이블 위에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의 분노에 라라는 얼떨떨한 시선으로 그를 봐주었다. 뒤늦게 진정한 라히는 그제야 라라의 눈길을 의식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보냐능? 너 설마 흑마법사 좋아하냐능?”

뜨끔, 라히의 긴 입술이 조금 딱딱하게 굳었다. 최애를 건드린 거라면 이 관계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험한 욕이란 욕은 다 했기에 어떤 말로 사과한다 해도 그건 용서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긴장감에 목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목 중앙에 굵직하게 튀어나온 울대뼈가 꿀꺽 움직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라라는 입술을 뗐다.

“아니… 욕할 줄 아는 게 의외라…….”

“…후우, 뭐냐능. 놀랐다능.”

라히는 가슴을 쓸어내린 후 가만히 라라를 보았다. 때마침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한 차를 둘 사이에 내려놓고 갔다.

“날 엄청 순수한 사람으로 아는 것 같은데, 그렇게 순수한 남자 아니라능.”

“순수하다고 생각하진 않고 걍 찌질하다고 생각했는데요.”

“…….”

“차 맛이 좋네요.”

“그렇다능.”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더 들이켠 라라는 빙그레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도 뭘 좀 아시네요. 저도 흑마법사 극혐이거든요.”

“뭔가 통하는군? 난 또 흑마법사X릴리카도 먹는 줄 알고 놀랐다능.”

“물론 취존 안 하는 건 나쁘죠. 하지만 흑마법사는 솔직히 지뢰인 사람들이 많아서…….”

“맞다능. 나도 지뢰라능.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흑마법사X릴리카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능!”

그렇게 말한 순간 열린 창문 새로 봄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바람은 창틀에 놓인 화분 위를 한번 쓰다듬고는 라히의 안경 위에 내려앉았다. 황급히 뒤를 돌아 안경을 벗은 그가 눈을 비비적거렸다.

“…흙먼지 들어갔다능.”

“용납하는 걸로 봐도 되죠.”

“이번 건 무효라능! 흙 한 줌, 아니 흙 백 줌이 눈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은 용납 못 한다능!”

그때였다. 옆 테이블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퍼렇게 안색이 질린 남자 손님 하나가 기어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덩달아 커지자 라라는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서 모래 폭풍이 찻집을 향해 몰려오는 게 보였다.

“손님! 창문 닫으세요, 어서요!!”

아마 위대한 취존의 신이 그를 지켜보고 계시다가 벌을 내리신 게 아닐까. 앞으로는 취존해야겠다고 마음속 깊이 생각한 라라였다.

* * *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 엘리나3은 어김없이 기상했다. 가볍게 세수를 하고 긴 머리를 틀어 올리는 게 치장의 끝이었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아둔 검을 쥐고서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아무도 없는 복도는 조용했다.

가문 연무장에 들어선 엘리나3은 일단 가볍게 몸을 풀었다. 넓은 연무장을 한 바퀴 도는 동안에도 숨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좀 더 빠르게 속도를 낸 순간이었다. 뒤에서 빠른 발소리가 들려오자 엘리나3은 달리기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너는…….”

화려한 황금색 머리를 흩날리며 거구의 남자가 자신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남자가 그대로 팔을 뻗어 안으려 하자 엘리나3은 재빠르게 허리를 숙이고 옆으로 피했다. 크리온은 발을 헛디뎌 바닥을 뒹굴었지만 해맑게 혀를 내민 채 그녀를 향해 다시금 달려들었다.

엘리나3으로서는 이렇게 끈질긴 상대는 처음이었다. 선배 기사들을 상대로도 난색을 표한 적이 없던 그녀가 처음으로 난감해하고 있었다.

엘리나2가 데려온 남자로 아는데 뭐 이렇게 집요하단 말인가. 힘은 또 얼마나 무식한지 몰랐다. 결국 엘리나3은 항복을 표했다. 그 틈을 노려 접근에 성공한 크리온은 엘리나3의 뺨을 핥았다. 그 순간 작은 주먹이 그의 뺨에 날아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끼잉…….”

그나마 살살 때린 거였다. 엘리나3은 자신의 앞에 주저앉은 채 뺨을 부여잡고 있는 남자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런 수법이 엘리나2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나에겐 어림없다. 연무장에서 나가.”

“…끼잉.”

“아직 말을 못 하는 건가…….”

이종족이라고 들었던지라 엘리나3은 골치 아프기만 했다.

“일단 일어나.”

다행히도 ‘일어나’라는 특정 단어는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엘리나3은 자기보다 훨씬 덩치가 큰 남자를 올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제까지 몰랐다고 해서 네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모르면 배워야지.”

“컹.”

“그건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야. 대체 엘리나2는 뭘 가르친 건지……. 하아.”

어떻게 교육이 하나도 되어있지 않단 말인가. 자유분방한 엘리나2의 성격에 책임감 있게 뭘 할 리도 없겠지만, 엘리나3은 진정 골치가 아팠다. 이런 무지한 자를 눈앞에 두면 그녀 성격상 내버려 두지 못하는 것이다.

“응, 앞으로는 응이라고 대답해.”

“멍?”

“응, 이라고 했어.”

엘리나3은 정확한 응 발음을 보여주었다. 크리온은 따라 하기 위해 입을 좌우로 길게 늘였다.

“으…으, 웅.”

“혀는 내밀지 말고.”

“으으…응. 응.”

“그거야. 잘했다.”

“응!”

칭찬을 받아 기쁜지 크리온은 엘리나3의 주위를 정신 사납게 맴돌았다.

“그만하지 못해.”

팔을 뻗어 간신히 크리온의 목덜미를 붙잡았으나 그는 얌전히 있기는커녕 고개를 숙여 그녀의 왼쪽 뺨을 핥았다. 축축한 침을 얻게 된 엘리나3은 서느렇게 눈매를 좁혔다. 벌써부터 가르칠 게 태산이었다.

“요즘 고민이 있어.”

“응?”

지옥 같은 훈련 시간이 지나가고 찾아온 휴식 시간이었다. 라라는 갑자기 자신에게 상담을 청하는 엘리나3을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설마 연애 상담이라거나? 꿀꺽하고 침이 넘어가기 직전 엘리나3의 입이 열렸다.

“크리온, 그러니까 저번에 엘리나2가 데려온 남자 말인데, 요즘 부쩍 나를 따라서 문제야. 오늘 아침만 해도 떼어놓고 오느라 얼마나 진을 뺐는지.”

“너를……?”

그렇게나 엘리나3을 좋아한단 말인가. 당연히 처음 도와준 엘리나2를 따를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면 기껏 클리셰를 만든 보람이 없는 것이다. 저번에 기절시켰던 일이 마음에 걸려 라라는 잠시 말을 아꼈다.

“그래도 교육하는 대로 순순히 따라와 줘서 이제는 제법 말을 할 줄도 알아.”

“세상에나, 정말? …몇 주 전만 해도 우리나라 말도 모르지 않았어?”

“엘리나4가 매일 글을 가르쳐 주고 있거든. 단어 카드를 이용해서 놀이처럼 단어 공부를 시키더니 며칠 뒤에 크리온이 스스로 말을 하기 시작했어.”

“정말 대단하다…….”

엘리나4. 또 다른 여주인공이었다. 분명 지적인 포지션의 여주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 라라의 흐릿한 기억 속 설명을 채워주듯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나4는 마법학계의 천재이자 현명한 독서광 여주이니라. 선택받은 자여, 주말에 공작가로 놀러 가도 되냐고 물어보아라!>

‘안 돼요. 이번 주는 아인너스 영애가 여는 티 파티에 참여할 거란 말예요.’

<네 여가 생활 따윈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느니라. 여주와 남주의 관계를 관찰할 좋은 기회이니라. 어서!>

신의 하나뿐인 종이 되면 개인 사생활과 여가 생활은 거의 포기해야 한다고 보면 되었다. 결국 마지못해 한숨으로 수긍한 라라였다.

라라는 리니엇 공작 저택의 문 앞에 섰다. 두 번 노크하자 곧바로 집사가 나와 맞이했다.

“공녀님께선 3층 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정중한 대접에 한껏 우쭐해진 라라는 온몸에서 기품이란 기품은 다 짜내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사뿐사뿐 복도를 건너 방문 앞에 도달한 라라는 문을 열 수 있게 반보 옆으로 물러섰다.

똑똑, 집사가 노크를 하고 3초도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라는 집사의 제스처에 라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하고 안에 들어섰다.

방 풍경을 대신해 웬 금발 남자가 떡하니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라라는 움찔하고 물러섰다. 금방이라도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물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 순간, 커다란 손이 뻗어져 나왔다.

“혹시 오늘 오시기로 한 엘리나3의 친구분이신가요? 반갑습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호감 가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이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곱슬기 있는 금빛 머리칼 때문에 덩치와는 다르게 약간 귀여운 상으로 보였다.

“크리온이라고 합니다.”

“…예?”

“어라? 저번에 한번 뵌 적이 있지 않나요?”

“아뇨, 아뇨아뇨. 전혀 없어요.”

머리가 세 개로 보일 정도로 빠르게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라라를 크리온은 재미있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그때 크리온의 등 뒤에서 안쪽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안에서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엘리나3이었는데 잠깐 샤워를 한 것인지 머리에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아, 엘리나3! 친구분 오셨어요.”

엉덩이에 꼬리가 달렸다면 마구 흔들렸을 정도로 크리온은 곧장 엘리나3의 옆에 철썩 붙었다. 엘리나3은 귀찮다는 듯이 자신보다 큰 남자의 뺨을 한 손으로 누르고 밀어냈다.

“서있게 해서 미안해. 어서 들어와.”

라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크리온을 힐끗 보았다. 조금, 아니 많이 믿을 수 없었다. 일반 대형견이나 다름없던 그의 모습은 어디 가고 정말 대형견 남주의 표본이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서 와요, 슈모르드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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