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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25)화 (25/115)

25화

“정말 나았어요. 치료 방법이 이상하긴 하지만 감사해요.”

“이제 나가봐.”

기껏 고마운 마음이 생겨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갑작스런 축객령이 내려졌다. 라라가 왜 또 저러나 싶은 마음에 툴툴대려 할 때였다. 돌연 미하일이 소파 옆에 허물어져 버렸다. 소파 턱걸이에 이마를 묻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라라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흣……. 어서 나가.”

“이봐요, 갑자기 왜 그러시는…….”

“나가라고!”

그를 부축하려고 뻗은 손이 신경질적인 외침에 의해 허공에서 멈췄다.

‘뭐지, 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사춘기 아들의 반항 같은 히스테릭한 외침은?’

파리해진 안색과는 달리 이마 위로 식은땀이 몽글몽글 스며있었다. 간헐적인 발작을 참아내며 미하일은 떨리는 손으로 팔걸이를 세게 붙잡았다.

“젠장…….”

“뭐가 문제인지 말해보세요. 그래야 알죠.”

“신성력을 너무 많이 썼더니…….”

바지 앞섶이 젖어 드는 게 라라의 눈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하얀 옷이라 얼룩이 더 눈에 띄었다.

“아, 닦을 거 가져올게요.”

바닥 위에 방울방울 떨어지는 투명한 물에 라라는 서둘러 욕실로 추정되는 곳으로 들어갔다. 넓은 욕실 안 선반에 놓여있는 타월을 세 장 꺼내서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미하일은 얌전히 라라에게 수건을 받아 젖은 바지를 가렸다. 바닥에도 한 장 깔아주자 그는 순순히 옆으로 비켜서 자신만 빤히 내려다보았다.

“제가 고맙죠?”

“…별로.”

퉁명하게 나왔지만 그 속에 담긴 따스한 감정을 라라는 읽을 수 있었다.

“들어가서 씻으세요. 전 사람 불러올게요.”

그는 욕실로 반쯤 몸을 돌렸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무슨 할 얘기가 남은 건가 싶어 라라가 가만히 기다려 주자 미하일이 고개를 숙인 채 얘기했다.

“얼빵한 게 착각하지 마. 지금 나를 동정하는 거야?”

“…그게 무슨…….”

“말해두지만, 동정 따윈 필요 없어. 어째서 내 앞에서 가식 같은 걸 떠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말했잖아요, 저희 할아버지도 요실금이셨다고. 어릴 적에 할아버지랑 같이 보낸 시간이 많았어요. 가끔 요실금 때문에 바지가 젖으셨는데 그때마다 제가 수건 가져다주고 그랬어요.”

추억을 회상하며 라라는 자그맣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도망치지 않으니까요.”

‘…마법소녀는.’

뿌듯. 미하일이 모르게 명대사를 써먹은 라라는 도도하게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날 밤 라라는 미하일이 나오는 꿈을 꿨다.

‘윽…….’

미하일이 가슴을 부여잡고 소파 옆에 허물어졌다.

옅은 금발 머리가 가볍게 흐트러진다. 그 사이로 드러난 양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로 인해 수려한 미모가 마모돼 보였는데 험상궂다기보다는 깨지기 직전 유리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미하일!’

누군가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섰다. 여주인공 엘리나였다. 엘리나가 한달음에 달려가 소파 턱걸이에 이마를 묻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파리해진 안색과는 달리 이마 위로 식은땀이 몽글몽글 스며있었다. 간헐적인 발작을 참아내며 미하일은 떨리는 손으로 엘리나의 손을 붙잡았다.

‘축복을 받은 건지, 저주를 받은 건지 하나만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크흣.’

심장에서 이는 묵직한 고통에 미하일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랬다. 많은 신성력을 안고 태어나서 심장에 무리가 간 것이다.

그렇기에 어릴 적부터 방 안에 남들과 격리된 채 살아야만 했다. 숨찰 만큼 뛰는 것조차 제게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늘 가문에 틀어박혀 있던 제게 어느 날 그녀는 훌쩍 날아들어 왔었다. 창문 위에 내려앉은 나비처럼, 창문을 타고 넘어 들어온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날씨가 참 좋죠?” 하며 인사했었다.

미하일은 그날을 잊지 못했다. 어떻게 잊을까. 비록 정원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어쩌다 자신을 찾아오게 되었다 할지라도, 제겐 삶을 바꾼 거대한 운명이었다.

‘엘리나, 너는 모를 거야. 네가 있음으로써 괴롭고 지겹기만 하던 이 삶이 얼마나 화사한 행복감으로 물들었는지.’

미하일은 가슴 쓰라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심장에서 이는 묵직한 고통보다도 그녀를 떠나보내야 된다는 사실이 더욱 쓰라렸다. 얼굴은 성에가 낀 듯 새하얗게 질려있었으나 엘리나의 손을 쥔 커다란 손아귀는 강했다.

‘이제 가봐…….’

‘미하일.’

‘폐하를… 기다리게 할 참이야? 하긴, 그 성질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진 않을 테지…….’

붙잡고 있던 손을 미하일은 미련 없이 놓았다. 걱정스레 미하일의 얼굴을 훑어 내리던 엘리나가 숨을 들이켰다. 귓가에 감겨드는 목소리가 엘리나의 심장을 뻑적지근하게 옭아매는 것만 같았다.

‘가봐, 이런 한심한 놈이랑 있을 시간에 네가 좋아하는 그놈이랑 있는 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날 다른 곳에 보내려 하지 마.’

‘가.’

‘미하일…….’

‘대신전이 쑥대밭이 되는 건 원치 않는다고.’

비뚜름하게 올라간 입술 새로 옅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소가 사그라지기 시작한 미하일의 얼굴에는 병색이 덕지덕지 묻어나 있었다.

그의 얼굴에 어린 자포자기의 감정을 읽어낸 순간 라라는 꿈에서 깨어났다.

“하아…, 하아…….”

여명이 밝아오는지 방 천장이 밝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꿈의 영향 탓일까, 라라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싸했다.

‘미하일은 대체… 대체 왜 나한테만 지랄인 거지.’

여주 앞에선 성깔을 누르면서 말이다. 자신은 막말해도 될 만큼 만만해 보이나 보다. 라라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목 아래까지 끌어 올리고 마저 잠이 들었다.

* * *

오랜만에 찾아온 휴일날. 라라는 전설의 덕후와 약속한 장소에 나와있었다. 광장 분수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벤치에 다소곳이 앉아 얼마나 기다렸을까. 뒤에서 풀을 밟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자 검자줏빛 머리에 달라붙은 이파리를 떼어내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동글뱅이 무늬가 새겨진 안경을 끼고, 체크 남방을 입은 그의 모습은 예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왜 그런 으슥한 곳에서 튀어나오신 거예요?”

“이 몸을 추격해 오는 자들을 따돌리기 위해서라능.”

“아……. 그렇군요.”

무슨 컨셉이지. 라라는 담담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봐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로브 속에 꽁꽁 감춰두었던 동인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자요, 받아요.”

“줘야지 받을 거 아니냐능.”

동인지 반대쪽을 붙잡고 있는 큰 손 위로 힘줄이 돋아나는 게 보였지만 손힘을 빼려고 해도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자신의 보물을 남의 손에 넘겨주는 게 이렇게 불안할 수가 없었다.

“그 잠깐만요.”

“뭐냐능.”

“한 번만,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요?”

잠시 품에 넘겨달라는 제 의사를 알아들은 건지 그가 손에서 힘을 빼는 게 느껴졌다.

라라가 동인지를 다시 완전히 손에 넣은 순간, 사내의 팔이 어깨를 스쳐 지나가며 온기를 남겼다. 라라는 잠시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만 느리게 깜빡였다. 등을 단단하게 받치듯 끌어안은 팔뚝이 생소했다.

“누가 당신을 안고 싶대요!”

퍼뜩 정신을 차린 라라는 온 힘을 다해 체격 좋은 남자를 제게서 밀어내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사람이네요! 애초에 진짜 포옹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생긴 건 그렇게 안 생겼는데 여자 경험이 많은가 보죠?!”

“…착각해서 미안하다능. 근데 나 현실 여자랑 포옹한 거 처음이었다능.”

“그래서요?”

“…좋은 냄새 났다능.”

“전 기분 나쁘거든욧?”

“…미안하다능. 어떻게 하면 용서해 주겠냐능.”

정말 미안한지 남자는 시무룩해 보였다. 쭈뼛쭈뼛 서서 동글뱅이 안경 너머로 제 눈치를 살피는 꼴에 라라는 새침하게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봤다.

“흐음, 당신 전설의 덕후죠?”

“세간에선 그렇게 불리긴 하는데 왜 그러냐능?”

“그럼 이제까지 모아놓은 피규어랑 굿즈들 대단하겠네요.”

“그렇다능. 내 보물로 말할 것 같으면 총 12,032개로…….”

“주세요.”

“그, 그것만은 안 된다능! 차라리 네 앞에 엎드려서 싹싹 빌겠다능!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일어나지 않겠다능!”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시늉을 하는 그의 모습에 라라는 소녀 같은 웃음을 작게 터뜨렸다.

“마음 같아선 그렇게 하고 싶지만…….”

“……?”

“전 어디까지나 동인지만 수집하거든요. 구경하러 가도 돼요?”

“구경?”

보이지 않는 남자의 눈이 조금 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뒤늦게 그의 입이 열렸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내가 바빠서 안 될 것 같다능. 다음에 초대해도 괜찮냐능?”

“집주인이 편할 대로 하세요.”

“앞으로 한 시간 안에는 돌아가야 된다능.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운데 저기 찻집에 가서 얘기라도 나누겠냐능?”

“음, 좋아요. 저도 오늘은 한가하니까요.”

라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 팔에 든 동인지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조금 더 같이 있을 시간을 벌고 싶었다. 아직 떠나보내기엔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

“현실 여자를 집에 초대하는 건 처음이라능. 물론 내 하트는 릴리카짱을 향해서만 뛰지만.”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서로 2D 애인을 둔 입장이라 그런지 말이 좀 통하네요.”

찻집에 들어서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부지런히 떠들었다. 찻집 안은 사람이 반 정도 차있었다. 적당히 활기차면서도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전 상큼하게 레몬티로. 전설의 덕후님은 뭐 마시겠어요?”

“계속 전설의 덕후라고 부를 생각은 아니겠지? 라히라고 불러주겠냐능?”

순간 목소리 톤이 살짝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곧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라라는 상념을 떨쳐내었다.

“내가 주문하고 올 테니 앉아있으라능.”

“고마워요.”

“뭘 이 정도로.”

라라가 1인용 소파에 앉자 그는 쿠션을 무릎 위에 얹어주고는 바로 카운터로 향했다.

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라라는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채광이 좋아 주변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주변에 있는 커플들만 아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라라가 부러운 눈길을 거두며 테이블을 내려다볼 때 라히가 맞은편에 착석했다.

“날씨가 좋은 것 같다능.”

“그렇죠? 마치 로브신사와 릴리카가 두 번째 만남을 가졌을 때처럼요.”

“오,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라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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