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24)화 (24/115)

24화

원하는 바를 쟁취한 라라는 그제야 도도하게 뒤돌아 걸어갔다. 짧은 갈색 고수머리 가발을 귀 뒤로 찰랑하고 쓸어 넘기는 것도 잊지 않고.

뭐 저런 게 다 있냐는 듯이 중대장은 그녀의 뒷모습을 흘겼지만 한시름 놨다는 표정이었다. 그 새된 비명과도 같은 하이 톤의 목소리와 살기를 5분간 더 견뎠다가는.

‘…아마 나는 지금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장한 표정을 지은 채 중대장은 떨리는 주먹을 애써 다른 손으로 억눌러 진정시켰다. 13년 만인가, 이런 살기를 느낀 것은.

<평소 주위로부터 얕보이던 약골일수록 분노하는 순간 숨겨져 있던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클리셰이니라.>

‘네?’

<아무것도 아니니라.>

위풍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라라가 막 기사단 정문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웬 젊은 남자가 한가한 관광객처럼 기사단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게 보였다.

직각으로 세운 칼라와 와인색의 크라바트, 정장 소매 끝에는 검정 레이스가 부채꼴 모양으로 풍성히 달려있었다. 허리 위까지 길게 펼쳐진 흑발은 따로 관리라도 받는지 매끄러운 윤기를 머금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칙칙한 패션을 자랑하는 남자가 돌연 뒤를 돌아보았다.

‘어딘가 낯이 익은데……?’

시선을 확 사로잡는 새빨간 두 눈이 인상 깊다고 생각한 순간, 라라는 예전에 공작가 무도회에서 만났던 남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저번에 마주쳤던 망상증 환자…….’

<마왕이구나.>

음?

라라의 눈이 경악스럽게 벌어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귀를 몇 번이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마왕이라고? 망상증 환자가 아니었어?!!

<퇴폐계 마왕 남주 페레우스이니라. 마왕 신부로 납치된 공녀 엘리나를 제멋대로 희롱하는데, 여기서 여주는 스톡홀름 증후군 환자처럼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느니라.>

확실히 생긴 건 마왕처럼 강렬하고 퇴폐적이긴 했지만 지하계의 온갖 흉포한 마물과 마족들을 다스리는 마왕이라고 하기엔 뭔가…….

“저기, 안녕하세요? 혹시 저번에 한번 뵙지 않았었나요?”

목덜미를 문지르며 페레우스가 밝게 인사해 왔다. 순간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젊은 청년인 줄 알았다.

‘마왕 신부를 납치하러… 온 거 같진 않은데요?’

<…참으로 예의 바르기 그지없구나.>

논클리셰에 먹힌 모습이 낯선지 신은 급격히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아, 죄송합니다. 남장 중이신 것 같은데… 제가 괜히 알아봐서 곤란하시지는…….”

“아뇨, 괜찮아요.”

“아, 네. 저 혹시… 여주가 이곳에 있나요?”

“여주는 왜 찾으시는 거죠?”

“아, 그게… 개인적인 사정이라고 해야 할까. 하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고 계시다면 부디…….”

꾸벅꾸벅 연신 허리를 굽히는 페레우스의 앞에서 라라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등 뒤에서 차갑고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여주인데요. 무슨 볼일이시죠?”

자신이 걱정되어 따라온 건지 엘리나3이 가벼운 걸음으로 제 옆에 섰다. 페레우스는 그녀의 외모에 놀란 듯 입을 잠시 벌리고 있다가 뒤늦게 실례임을 깨닫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반갑습니다. 저는 마계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마족인데요. 마왕성에서 마왕으로 근무하고 있는 페레우스라고 합니다.”

두 손으로 까만 명함을 내미는 모습이 새로 들어온 영업 사원처럼 예의 발랐다. 심지어 가르마도 5 대 5라서 더 그래 보였다.

“사실 제가 다름이 아니라, 지상에는 여행 겸 마왕 신부를 찾으러 왔는데요.”

‘마왕이 뭐 이래요? 조촐하고 뭔가 없어 보이잖아요!’

국제결혼을 초월하는 마왕 신부 찾기였다. 라라는 차라리 그가 짝퉁이기를 바라는 마음에 따지고 들었다.

“저번에 저한테는 얼마 전까지 마왕을 했던 마족이라고 하셨잖아요?”

“아, 사실 아직 마왕직에 머물러 있긴 한데, 초면에 마왕이라고 하면 부담스러우실까 봐 했었다고 돌려 말한 거예요, 하하.”

민망한 듯 나직이 웃음을 터뜨린 페레우스가 슬쩍 엘리나3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주 아니랄까 봐 주된 목적은 여주인가 보다.

“저 혹시 마왕 신부 관심 없으신가요?”

“마왕 신부가 뭐죠?”

“쉽게 말하자면 서비스직이고요. 저희 마계에서 새로 모집하고 있습니다. 출근 후 한두 달은 마왕 신부로서 마왕성에 머무르시면서 적응하실 거구요. 정규직으로 전환되시면 마황비로 바로 승급 가능하십니다.”

“일당은 어떻게 되나요?”

‘너 공녀잖아……. 돈이 궁해?’

라라의 떨떠름한 속마음을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은 계속해서 진지하게 얘기를 나눴다.

“일당은 당일에 바로바로 나가고요. 주말에는 지상에 올라오셔도 상관없습니다. 원하신다면 유연 근무제도 가능하시고요……. 저, 지원하시겠어요? 바로 채용해 드리겠습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 네. 그럼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혹시 관심 있으시면 여기로 연락 부탁드려요.”

90도로 공손하게 인사한 페레우스가 등을 돌려 걸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 번 더 뒤돌아보고는 꾸벅 인사했다.

‘마왕 신부가 잘도 구해지겠다.’

라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신전으로 향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대신전에 도착한 라라는 접수처로 향했다. 신성력이라는 게 워낙 국가에서 철저히 관리하는 힘이다 보니 사제에게 치료받는 것 하나도 매우 까다롭게 진행되었다.

신분을 증명한 뒤 어깨 부상으로 찾아왔다고 말하자 바로 대기실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넓은 대기실 안이 미어터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는 것일 테다.

‘뭐야, 왜 이렇게 많아……?’

전부 아프거나 어디 다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대기 줄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제 차례가 오려면 다섯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될 것 같았다.

<성녀 탄생으로 인해 사람들이 몰린 것이니라. 국교는 정치, 경제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 말이니라. 성녀와 직접 만날 순 없으니 이렇게 사제와 친분을 쌓아두려는 거겠지.>

‘뭐예요, 그런 거였어요?’

라라는 새삼 엘리나5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따라오시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예? 벌써요?”

대기한 지 3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라라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성기사의 뒤를 우아하게 쫓아갔다. 주변에서 자신을 부럽게 힐끗거리는 눈들에 라라는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호호홋! 재력과 권력을 등에 업은 대공가의 여식인 줄 알겠지?’

우쭐한 기분에 턱을 한껏 도도하게 쳐들어 올렸지만 누가 봐도 훈련하다 목을 삔 고수머리 기사였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얼마나 복도가 긴지 꼬박 10분을 걸어 어느 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본 문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했는데, 대리석 문설주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누군가 서있는 게 보였다.

원통 형태의 모자의 뒷부분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흰 천이 어깨를 덮고 있어 뒷모습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이나 장신구 등이 상당히 값진 순은으로 된 걸로 보아 일반 사제는 아닌 것 같았다.

자락 끝에서부터 섬세히 올라가는 금빛 줄기 무늬가 수놓아진 순결한 흰 정복을 입고 창틀 앞에 서있던 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비쳐든 햇살에 성스러움이 물밀듯 끼쳐왔다.

“빌려준 내 옷 내놔.”

보자마자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거였다. 라라는 당황해서 주춤하다가 그가 미하일이라는 걸 깨닫고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미안해요, 치료받으러 온 거라 안 가져왔어요…….”

“됐어. 다음에 직접 찾아와서 돌려줘.”

의복이 무거운지 미하일은 미약하게 미간을 접으며 의자 위에 소리 나게 앉았다. 저렇게 차려입으니까 확실히 교황 같기는 했다.

교황의 집무실을 신기한 눈으로 휘둘러보던 라라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정면을 돌아보았다.

“저번에 왔던 정원 별채로 찾아올 수 있지?”

“그때 길을 헤매다가 발견한 거라 다시 찾아가라 하면 자신이 없는데, 그냥 안내해 주시면…….”

“바보냐. 정원 출구에서부턴 오는 길 알잖아?”

가뜩이나 신이 무식하다고 쪼아대서 짜증 나는데 대놓고 바보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상했다. 그 신의 그 교황이군. 라라가 불순한 생각을 머릿속에 품을 때였다.

“것보다 치료.”

“……?”

라라가 놀라 눈을 키우자 미하일이 가까이 와보란 듯이 건성건성 손짓했다. 혹시 속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 라라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의 표정을 살피던 중 갑작스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해, 안 내밀고.”

“뭘 내밀어요?”

“치료받을 곳 말이야. 답답하네…….”

라라가 오른쪽 어깨를 슬쩍 내밀자 미하일이 왼팔을 잡아 강제로 소파에 앉혔다. 설마 상처를 봐주려는 걸까. 라라가 놀라 자신의 앞에 선 그를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가 옷의 단추를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노출에 라라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매끄러운 복부가 드러나자 라라가 어디다 눈을 둬야 할지 몰라 발갛게 얼굴을 물들일 때였다. 그의 배꼽에서 하얀빛이 응축되더니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넌 거기서 나오는 거야?!!’

엘리나5도 그렇고, 교황도 그렇고, 이놈의 종교 집단은 신성력 나오는 곳이 대체 어떻게 돼먹은 건지 모르겠다. 그런 라라의 눈빛을 읽은 건지 미하일이 자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이상할 만도 하겠지. 보통 심장에서 가까운 눈이나 입, 손에서 신성력을 방출하는데, 아까 들었다시피 내 경우엔 방광에 신성력이 모여있어서 배꼽으로 배출되거든.”

“이거 웃어야 하는 건가요?”

“그래서 옆에서 보면 약간 참외 배꼽이야……. 우습게도 말이지. 이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뒤에서 저주받은 체질이라고 수군거렸었고.”

“역시 웃는 대목인 거죠?”

“그래도 다행인 거지. 만약 배꼽에서 좀 더 아래쪽에서 나왔더라면…….”

미하일의 뜨거운 손이 순간 제 옆머리에 닿았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귓등 너머로 쓸어 넘겨주는 손길이 일순 야릇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라라의 머릿속이 강렬한 붉은색으로 뒤덮였다.

“…너 뭔 생각 하냐?”

“아, 아, 아무것도 안 생각했는데요?!”

“그보다 이제 팔 들어봐.”

“아.”

라라는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아까의 화끈거리는 고통이 거짓말이라는 듯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