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내가 젊다고 만만한가 본데, 한 나라의 교황을 상대로 너무 건방진 거 아냐?”
“…그, 그렇다면 사과하죠.”
쫄았다. 힘없는 가문의 영애란 이렇듯 비굴한 것이다. 그때 눈앞의 남자가 어깨 너머로 흘러내린 샛노란 금발을 쓸어 올리며 쿡쿡 웃기 시작했다.
“…흥, 됐어요. 저 혼자 나가보죠.”
뭐가 저렇게 웃긴 건지 모르겠다. 라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신한 걸음걸이로 문 쪽으로 총총 걸어갔다.
“너 말이야…….”
벌써부터 비아냥거릴 준비가 된 사람처럼 신랄한 어조가 뒤에서 들려왔다.
“여자 맞지?”
“…그게 무슨?”
<너 지금 기사로 남장 중이지 않느냐.>
‘……!!’
라라는 그제야 남장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 샤워하면서 두피 느낌이 조금 이상하다고 했다. 다행히 가발은 잘 씌워져 있는 듯했지만 이미 습관적으로 많은 것을 노출한 느낌이었다.
“말투하며 걸음걸이며, 어디 곱게 자란 귀족 영애 같아서 하는 말이야.”
“어, 어머! 참! 귀족 영애 같은 말투가 어딨으며, 귀족 영애 같은 걸음걸이는 또 뭔가욧!”
“너 바보야?”
비꼼에 라라는 욱한 마음에 목소리를 낮췄다.
“바보라고 부르지 마요.”
“그럼 뭐라고 부를까? 멍청이?”
태평하게 받아치는 목소리가 싸가지가 가출한 지 한참 된 것 같다. 교황이 뭐 이래?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여자도 울릴 만큼 예쁘장한 데다 교황씩이나 되니까 저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광과 성격을 제외하고는 모든 걸 가진 남자가 바로 미하일일 테다.
<여기서 멋진 말을 하나 던져 줘야 되느니라.>
‘뭐를요?’
<당하고만 있을 생각이었느냐? 이래서 엑스트라는……. 쯧, 멋진 말을 할 줄 모르는 엑스트라는 가만히 내가 하는 말만 따라 하느니라.>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될까요, 라라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신은 고집스러웠다.
<당신의 요실금이 놀림거리가 되는 게 옳지 못한 것처럼.>
“당신의 요실금이 놀림거리가 되는 게 옳지 못한 것처럼…….”
<제 지능 또한 놀림감이 되는 것은 옳지 못해요.>
‘그거 완전히 바보라고 인정하는 거잖아요!’
라라의 반발에도 신은 대수롭지 않은 듯 침묵을 지켰다. 그동안 미하일의 눈에 라라는 뜸을 들이는 걸로 보였는데,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놀림거리가 되는 게 옳지 못하다라, 그래서 뒷얘기는 뭔데?”
“그, 그러니까 저를 놀리는 건 옳지 못하다구요.”
“쿡쿡, 너 무슨 책 읽으면서 말하냐? 대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놀리지 마요!”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단 생각이 들었다. 라라가 슬며시 입을 다물고 서있자 별안간 그가 찻잔을 내려두고 몸을 일으켰다. 욕실에 들어가 널어놓은 제복을 가져오더니 던지듯이 라라의 품에 안겨주었다.
“따라와, 정원 출구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이랬다가 저랬다가 당최 알다가도 모를 심보였다. 괜히 의심스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미하일이 먼저 문밖으로 나서자 라라는 젖은 제복을 안고 부랴부랴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잎들이 우거진 깊숙한 정원 속을 말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하얀 조약돌로 만든 산책로가 나타났다.
“이 길을 따라서 쭉 걷다 보면 정원 출구가 나올 거야. 거기서부턴 나가는 통로가 보이니까 바보가 아닌 이상 어련히 찾아가겠지. 혹시 또 길을 잃는다면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
친절한 설명을 기대한 자신이 바보였다. 막 그를 지나쳐 가려는데 미하일이 제게 고개를 돌렸다. 연한 금빛 머리칼이 불어온 바람에 바스라질 것처럼 하얗게 반짝거렸다.
“그 옷, 돌려주러 와라?”
“…그럴게요.”
누가 안 돌려준댔나, 라라는 심통하게 입을 삐죽였다.
“그럼 됐어.”
개의치 않는다는 담담한 말투와는 달리 그의 눈은 집요하게도 자신을 놓지 못했다. 라라는 부담스러운 기분에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동안 등을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졌는데 라라가 뒤늦게 뒤를 돌아보자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라라는 저택으로 돌아온 뒤 엘리나5에게 편지를 썼다.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저택으로 돌아갔다는 얘기와 무례하게 느껴졌다면 사과한다는 내용이었다. 보낸 지 두 시간 만에 엘리나5에게서 답장이 왔는데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와 푹 쉬라는 말만 적혀있었다.
‘후우……. 내가 잘한 걸까.’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엘리나5가 자신을 해치려 한 것은 아닐 텐데 자신이 너무 과민 반응을 한 것 같았다.
애초에 신성력은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힘이 아닌가. 그녀가 자신에게 쓰려 했던 힘은 그런 파괴적인 빔이 아닌 예전에 한번 쏘았던 사람을 치료하는 힘일 테다.
‘그때는 손가락에서 나왔는데.’
몸 어디서든 신성력을 방출해 낼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쓰임새에 따라 신성력이 나오는 곳이 다른 걸까. 라라는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느새 스르륵 잠이 몰려옴을 느꼈다.
아무튼 엘리나3은 정말 좋은 친구라는 것을, 기사단은 정말 평화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는 기회였다.
* * *
연병장에서 시작된 조례는 아침부터 힘이 넘쳤다.
“제군, 다음 주에 있을 승급 시험 준비는 잘돼가나!”
“네!!”
군기 잡힌 우렁찬 외침에 라라 혼자 잠이 덜 깬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옆에 서있는 엘리나3은 비장한 각오를 다지듯 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최고점을 받은 기사는 다음 달 검술 대회에 자동 출전 기회가 주어지니 모두들 분발하도록!”
“예엡!!”
“낙제한 놈은 퇴단, 혹은 강등이니 한 놈도 빠짐없이 통과하기 바란다! 거기 신입―!”
중대장은 모여있는 수많은 면면들 가운데 라라만을 콕 집어 호명했다. 라라가 놀라 “예, 예……?” 하고 허둥지둥하자 우렛소리보다도 엄한 호령이 떨어졌다.
“얼빠진 얼굴 하지 말고!! 넌 오늘부터 특별 훈련이다!”
‘그, 그런……!’
속으로 ‘적당히 낙제 받고 퇴단당해야지.’ 하고 생각한 걸 들킨 걸까. 라라는 절망적인 기분을 느꼈다. 도움을 요청해 보려 엘리나3을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부러워, 특별 훈련이라니.” 하고 낮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신입을 제외하고 모두 해산―!”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라라는 중대장 손에 끌려가야만 했다. 연병장의 구석에 서자 곧바로 묵직한 검이 제 앞에 던져졌다. 풀썩하고 피어오르는 흙먼지에 라라가 기겁할 때 호랑이 중대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제대로 들지 못하나!!”
“히익…….”
“그놈의 히익 소리도 금지다! 자, 쥐고 휘둘러 봐라. 네놈을 아주 뜯어고쳐 주마.”
“전 그냥 이대로가 좋은데…….”
“네가 무슨 사정으로 남장을 하고 기사단에 들어온 건지는 몰라도, 나는 한번 부하로 받은 녀석은 절대 내치지 않는다!”
얼핏 감동적일 만한 상황이었으나 라라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을 내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200번 휘두르기 실시!!”
근성 없는 놈이니 뭐니 침을 튀기며 욕을 해대는데 라라는 무서워서라도 검을 들고 위아래로 흔들어야만 했다. 다섯 번 휘두르고 내려놓고, 다섯 번 휘두르고 내려놓고, 그렇게 죽기 살기로 105개를 채운 순간이었다.
“읏, 꺄윽!”
어깨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심하게 지끈거린다 했더니 갑자기 우두둑 소리가 들려왔다.
“고작 105번 휘두르고 엄살 부리지 마라!!”
“으, 흐윽, 팔이… 아파요흐으읍 흐으으엉. 아얏… 어어엉.”
라라가 검을 내려놓고 눈물을 질질 짜자 호출받은 의무병이 곧바로 달려왔다. 상태가 어떤지 살피기 위해 라라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의무병의 눈빛이 믿기 힘들다는 듯이 마구 흔들렸다.
“…설마, 당신 여자……?”
‘이놈의 기사단 나가버리고 싶다.’
“어깨 인대 파열입니다.”
라라는 욕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마른 눈을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보였지만 기분은 거지 같았다. 이 기사단에 온 뒤로 되는 일이 하나 없는 것 같았다.
“어깨에 무리가 가는 운동은 피하시고 최소 한 달은 회복할 수 있게 두어야 합니다.”
“이번엔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예? 방금 뭐라고…….”
뭐에 씐 사람처럼 라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무실을 벗어났다. 레이디 축지법으로 복도를 가로지른 후 연병장으로 향했다. 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중대장이 보였다.
라라는 씩씩 어깨를 들썩이며 중대장의 뒤로 다가갔다. 그러곤 인대가 파열되지 않은 손을 우아하게 들어 올려 넓은 등을 똑똑 두드렸다.
“이봐요.”
“이봐요……? 지금 중대장인 나를 부른 건 아니겠지?”
중대장은 험악하게 눈꼬리를 치올린 채 라라를 돌아보았다. 왜소한 체격의 남장 기사를 어떻게 혼쭐낼까 벼르듯 거칠게 이를 갈았다.
라라도 마찬가지로 눈을 최대한 치떴다. 환불 화장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앙칼진 눈매에 중대장의 얼굴이 요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팔이 안 올라가요.”
“허, 참나. 팔이 안 올라가서 뭐?!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지? 군기가 빠져서…….”
“팔이 안 올라간다구요! 내 팔 물어내요! 물어내라구욧!!”
훈련 중이던 기사들은 고막을 건드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하나둘 검을 내려놓았다. 그중에 엘리나3도 있었다. 술렁거리며 어수선한 분위기가 퍼져나가자 중대장은 굵은 눈썹을 꿈틀댔다.
“이게 조용히 못 해!”
“조용히 못 해욧!! 내 팔 어쩔 거예요? 예!! 저 정말 화가 났다구요! 이런 구질구질한 곳에서 강압적인 상관의 명만 따르다가 내 팔이 요 모양 요 꼴이 났는데 어어…어떻게! 진정해요?!!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욧?! 말해보세요오욧!”
작은 몸으로 성큼성큼 다가선 라라가 흰자가 보일 만큼 부릅뜬 눈으로 중대장을 쏘아보았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면서 이러는 게 우스워 코웃음 치려던 순간이었다. 중대장은 자신의 육체를 콱 조여오는 엄청난 기운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살기?’
설마 라안, 저 작은 남장 기사가 표출하고 있단 말인가.
“어떻게!! 책임질 거예요오옷!!”
“일단… 그 진정 좀 하고. 신입.”
“지금 팔이 이렇게 됐는데 진정하게 생겼냐구욧!! 이래선 왼손 매니큐어도 바르지 못한다구욧!!”
“기사가 매니큐어를 왜 발라! 알겠어! 알겠으니까! 자, 반차 써줄 테니까 대신전 가서 치료받고 와. 치료비는 우리 기사단에다 청구하고.”
“흥, 그렇게 나오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