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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22)화 (22/115)

22화

<어느 세월에 문을 찾으며, 남주 미하일이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느니라. 그래서 여주 엘리나는 창문으로 침입하느니라.>

라라는 주저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 창틀에 두 팔을 올려놓았다. 힘껏 힘을 주어 한쪽 다리를 걸쳐놓는 데 성공하자 그 뒤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떨어지지 않으려 악착같이 달라붙은 개구리 같은 폼으로 창문을 타 넘어 매끄러운 방바닥에 착지한 순간이었다.

“누구야…, 너.”

바로 멀지 않은 곳에서 껄끄럽게 벼린 미성이 들려왔다.

라라는 삐그덕거릴 것만 같은 고개를 움직여 옆을 돌아보았다. 음울한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연한 금발의 남자가 서있었다. 밀랍처럼 창백한 낯빛과 바스라질 것처럼 옅은 금색 속눈썹에 경계의 빛이 서려있었다.

좀도둑 신세를 면하기 위해 라라는 어떻게든 변명을 둘러대려 했으나 그 전에 미하일이 뒤로 물러서며 단호히 말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나가.”

“저, 저기…….”

반쯤 그늘이 진 하늘색 눈은 창가에 서있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앙칼진 고양이 같은 분위기의 그는 성격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라라는 차마 뭐라 변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세게 말아 쥔 그의 주먹이 바르르 떨리는 게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타인을 향한 분노가 아닌 그 자신을 옭아매는 두려움에서라는 걸 라라는 눈치 빠르게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다가가 어설픈 위로의 말을 건네는 상황은 더 최악이라 판단했다. 어색해서 질식할 것 같은데 거기에 경계심까지 선명하게 느껴져 라라는 정말 돌아가고만 싶었다.

‘오, 신이시여. 도와주세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여, 지금부터 내 말을 따라 하라.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 좋죠?>

“…….”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 좋죠?>

“…….”

다물린 라라의 입은 아교로 이어붙인 듯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저 말을 꺼내는 순간 ‘넌 X발 눈치도 없냐.’ 소리를 듣기에 딱인 것이다.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날 믿어라, 선택받은 자여. 여주는 첫 만남 때 이렇게 말했느니라.>

‘그건 여주니까 가능한 거고요. 저 진짜 못 하겠어요…….’

격하게 거부하는 라라에게 신은 넌씨눈 고급 과정 1일 코스를 계속해서 강요해 왔다.

<따라 하느니라. ―우리 친구가 되어보지 않을래요?>

“…….”

<우리 친구가 되어보지 않을래요?>

“…우리… 친구가… 되어보지 않을래요……?”

라라는 꾸역꾸역 따라 읊었다. 정말 하기 싫어서 두 눈이 소심하게 내리깔렸다. 역시나 맞은편에선 비웃음이 들려왔다.

“하, 친구? 그쪽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초면부터 친구 소리가 나오는 거지?”

<알고 있어요.>

“…….”

<알고 있어요.>

“…아, 알고 있어요.”

한글을 자동으로 읽어주는 프로그램 같았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자 라라는 서둘러 이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 주인이시잖아요?>

“이 집 주인이시잖아요……?”

죽빵 각이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구겨져 있던 입매가 펴지며 그의 얄팍한 입술 새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푸핫, 요즘 기사들은 다 그렇게 뻔뻔한가 보지? 하하, 크큭.”

‘대체 웃음 포인트가 뭘까.’

라라가 어설프게 따라 웃을 때였다. 연갈색 바지 앞섶 위로 서서히 고동색 얼룩이 퍼지기 시작했다.

“아……. 또 시작이네.”

미하일은 웃는 것을 멈추었지만 그의 종아리를 따라 계속해서 물이 흘러내렸다. 어느새 바닥에 웅덩이진 맑은 물을 라라는 충격 먹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신조차 할 말을 잃었다.

“이런 놈과 정말 친구 해도 괜찮겠어?”

미하일의 자포자기에 빠진 얼굴 위로 자연스럽게 자조의 빛이 떠올랐다. 연한 하늘색 눈동자가 굳은 라라의 얼굴을 오롯이 담은 채 서글픈 미소를 그려냈다. 그 와중에도 중력을 못 이긴 물방울들이 그의 발치에 뚝뚝 소리를 내며 추락했다.

태어날 때부터 이랬다.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력이 심장이 아닌 방광을 짓누르면서 치료 불가능한 요실금이 되었다.

“남자 요실금이라니, 웃기지?”

<뭬, 뭬야?! 남자 요실금이라니……!>

가난한 서민 여자를 집에 데려온 아들이 못마땅한 부잣집 사모님만큼 앙칼진 목소리였다.

<내가 널 어떻게 만들었는데! 심장병인 네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좀 진정하세요. 골 울린단 말예요!’

흥분한 신의 음성이 라라의 머리를 헤집어 놓을 때, 미하일이 질끈 아랫입술을 베어 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소가 사그라지기 시작한 얼굴에는 병색이 덕지덕지 묻어나 있었다.

제게선 떼려야 뗄 수 없는 병이었다. 어릴 적부터 방에 격리된 채 요실금용 기저귀를 차며 살아야만 했다. 웃는 것조차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친구조차 사귈 수 없었다.

미하일은 가슴 쓰라린 기분을 맛보았다. 바닥을 적시는 뜨끈한 액체를 보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손빨래를 하는 것도, 침대 시트를 갈아치우는 것도, 모두 다 지옥 같았다. 하루에 수십 번을 되풀이하게 되는 이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테다.

노력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하일 그 자신도 요실금용 기저귀를 벗고 정상인처럼 살아보려 노력했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었다. 저를 절망의 구렁에 밀어 넣고 우롱하듯이 요실금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었다. 현재까지도.

<이래 가지곤 병약남주 클리셰가 위태롭다……! 심장이 약하다는 콤플렉스로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남주는 굳게 닫고 있던 마음의 문을 여주에게만 개봉하느니라. 근데 뭐?!! 요실금?!!>

‘요실금도 병이긴 병이잖아요. 당사자도 심각해 보이고. 저희 할아버지도 요실금 때문에 고생하셔서 잘 알아요.’

<그건 네 할아버지고! 쟨 남주이지 않느냐!!>

‘지금 남의 할아버지 무시하는 거예요!!’

“…하, 비웃어도 좋아. 더럽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지.”

병을 평생 달고 산다는 건 이런 거였다.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지 않는 삶, 늘 병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삶. 병에 속박당한 채 겨우겨우 연명하는 이 삶에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미하일은 굳은 채 침실 문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대로 저 안으로 들어가 숨으면 자신은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질까. 속에선 뜨거운 조소가 끓어올랐다.

“음, 죄송해요.”

그때였을까, 믿기지 않은 말이 들려온 것은.

“딴생각하느라 못 들었어요. 뭐라고 하셨죠……?”

“…뭐……?”

“딴생각을 하느라 못 들었어요. 그 다시 얘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더럽다고 생각했다면 솔직하게 그렇다고 말하라고. …20년 동안 늘 혼자였어. 이 지긋지긋한 병 때문에 말이지. 너도 내가 저주받은 몸이라고 생각하잖아. 틀려?”

자기 연민에 가득 찬 말을 내뱉는 그는 확실히 마음이 병들어 보였다. 라라는 마음이 좋지 못해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솔직히… 남의 소변은 더럽지만 병이 더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저희 할아버지도 요실금으로 많이 고생하셨거든요. 얼마나 힘든지 이해할 수 있어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 갈래로 묶어 내린 연한 금발이 흘러내린 등을 바라보다가 라라는 슬슬 되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멋대로 들어와서 미안해요. 이제 가볼게요.”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라라의 오른손을 낚아채듯 쥔 커다란 손이 있었다. 놀란 라라는 반쯤 뒤로 고갤 돌렸다. 어느새 바짝 다가와 있는 수려한 얼굴이 절박함으로 얼룩져 있었다.

몸은 앞쪽으로, 얼굴은 뒤쪽으로 돌린 채 어정쩡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라라가 결국 얼마 못 가 휘청거렸다. 미하일은 라라의 반대쪽 팔을 빠르게 붙잡았으나 근력이 없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같이 쓰러졌다.

콰당, 제법 큰 소리가 울렸다. 라라는 자신의 몸 위로 넘어진 미하일로 인해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겉으로 봤을 땐 말라 보였는데 남자라 그런지 꽤 무거웠다.

“얼빵한 게… 혼자 넘어지고 난리야?”

까칠한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오자 라라는 욱한 마음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 붙잡으신 게 누구신데…….”

그 순간 자신의 코에 닿을 듯이 내려온 가는 콧대에 눈이 크게 떠졌다. 뭐지, 뭐지. 난데없는 키스 신이라도 벌이려는 걸까 싶어 라라는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입술에는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 더 자극적인 목소리가 귓바퀴를 따라 흘러들어 왔다.

“잠깐 이대로……. 큿, 하아.”

“……?!!”

뜨겁게 몰아쉰 숨결이 안면에 닿기 무섭게 라라의 얼굴이 불탄 고구마처럼 확 달아올랐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미하일은 쥐고 있던 라라의 손목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서인지 미간에 짙게 주름이 잡혔는데 그 모습이 여간 섹시한 게 아니었다.

붙잡힌 손목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빗방울이 마구 바닥을 두들기는 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왔다. 라라는 돌덩이처럼 무거운 시선을 툭 떨어뜨렸다. 동공에선 소리 없이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바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자신의 제복 바지를 그대로 적시고 있었다.

‘물을 얼마나 마신 거야! 아아아악!’

난생처음 외간 남자의 집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상황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텐데, 현재 라라는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은 사람처럼 해탈하기만 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한숨을 포옥 내쉬며 거실로 나오자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밀랍 인형이 아닌가 싶을 만큼 뽀얀 피부와 창백하게 굳은 하늘색 눈동자가 티 한 점 없이 맑았다.

“저기, 이제 돌아가 보려고 하는데요. 길 좀 여쭐 수…….”

“옷 다 안 말랐으면서 어딜 가려고.”

“이 옷 입고 가면 되잖아요?”

“빌려준다고 한 적 없는데?”

태연한 목소리였다. 이에 조금 욱한 라라는 그의 앞으로 도도하게 걸어가 허리 위에 양손을 얹었다.

“이봐요! 누구 때문에 제 옷이 젖었는데…….”

“내 아래에 있던 네 잘못이지. 진정하고 차나 마시지 그래?”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올리는 남자의 폼에 어이가 없어서 절로 콧방귀가 나왔다.

“차 그만 마셔요. 차는 배뇨 작용을 돕는다구요!”

“이뇨 작용이겠지.”

“아무튼요! 정 이렇게 깐깐하게 나오시겠다면야, 젖은 옷을 입고 나갈게요. 그러니까 당장 나가는 길을 알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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