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성녀 발탁 시험은 대신전의 가장 은밀하고 깊숙한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매년 첫 해가 뜨는 날 대신전에 와 기도했지만 이렇게 깊이 들어와 본 건 처음이었다.
신기함에 차 곁눈질하기 바쁜 라라와는 달리 엘리나5는 여러 번 드나들었던 곳에 온 것처럼 조용한 시선이었다.
‘…이런 곳에서 대체 어떤 시험을 볼까.’
떠들어선 안 되는 엄숙한 분위기 때문에 라라는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라라가 예상하는 시험은 대충 이러했다. 기도실에서 신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거나 신성력을 발휘하거나 인내심을 테스트받거나 교황의 질문에 답하는 면접식일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고된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엘리나5는 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저 자그맣게 입술을 휘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와도 보살 페이스로 넘길 것만 같았다.
[시험 시작을 알리겠습니다. 후보생들은 각자 자신의 수험 번호가 붙어있는 기도실로 들어가 주십시오.]
천장에서부터 웅웅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마치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신비로웠다. 엘리나5의 수험 번호는 5였다. 라라는 괜히 저가 다 긴장이 되어 신에게 답을 구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성녀는 당연히 엘리나5겠죠?’
<당연하니라. 논클리셰의 힘이 이곳까지 미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근데 대체 구체적으로 어떤 시험을 보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신성력을 얼마나 잘 다룰 수 있는지를 테스트하느니라. 신성력이란 어떤 자가 쓰느냐에 따라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때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능력, 즉 신의 권능이로다…….>
무거운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자 어느덧 기도실 안이었다. 성스러운 분위기의 방 안은 생각보다 비좁았다. 벽에 붙어있는 소파에 라라가 살짝 걸터앉을 때 엘리나5는 정면을 향해 올곧게 어깨를 펴고 섰다.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정면을 봐주세요.]
안내자의 음성이 들려오고, 방 안의 조도가 서서히 높아졌다. 아무것도 없는 정면에 사람 머리 모양의 과녁이 스르륵 나타났다.
라라가 무슨 시험인지 감을 잡을 수 없어 갸웃한 순간이었다. 엘리나5의 두 눈에서 강렬할 만큼 새하얀 빛이 쏘아져 나갔다.
콰아아아아앙―!!
아무런 전조도 없이 쏘아진 빛은 단 0.1초 만에 과녁물과 뒤에 있던 벽을 파괴시켰다. 산산조각으로 튀어 오른 파편들은 라라가 앉아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얼마나 끝이 뾰족한지 벨벳 소파에 깊숙이 박혀버렸다.
“꺄아아아앍!!”
<무, 뭐, 뭣이여!! 저게!! 선택받은 자여, 좀 진정하거라!!>
‘진정하게 생겼어요?!!’
신성력은 레이저 빔처럼 곧은 일직선을 그리며 다른 과녁들을 맞혀댔다.
콰아아왕!! 쾅!! 콰와아아앙―!!
연달아 울리는 폭발음에 맞춰 벽과 바닥이 미친 듯이 흔들리자 라라는 패닉에 빠졌다.
자신도 저 빔(신성력)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치밀자 라라는 문으로 뛰어가 방문을 긁어댔다.
“누가! 누가 좀 살려주세요! 밖에!! 아무도 없어요?!! 나 죽어!! 엄마!!”
<진정하거라. 나도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신성력이 저렇게 쓰이다니 놀랍구나.>
‘감탄하지 마요! 이 상황에!!’
암만 봐도 기괴해 죽겠는데 신의 눈에는 여주가 뭘 하든 예쁜 모양이었다. 신성력으로 과녁을 맞히는 시험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것보다 과녁 모양은 왜 사람 머리 모양이란 말인가. 저걸 맞으면 사람 머리도 산산이 부서진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일까.
목 상태는 생각하지 않고 너무 크게 비명을 질러댄 탓에 금방 목이 쉬어버렸다. 문 앞에 쪼그려 앉은 라라는 울음을 멈추지 못해 끅끅거리며 엘리나5의 등을 쳐다보았다. 지켜주고플 만큼 작은 등이 저렇게 공포스러울 수도 있구나, 새삼 깨닫게 되었다. 왜 국가에서 성녀를 철저히 보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신성력이 이렇게나 위험한 거였어……? 아니, 그보다 예전에 나한테 저거 쏜 적 있지?!’
<핵과 같은 위력이로다. 앞으로 성녀 여주 보유국이 강대국이 될지니. 비록 상상치 못한 위력이었지만 로판계에 저런 여주 하나쯤은 필요하니라.>
‘얼마나 여주 편인 거예요!’
차라리 알지 못했으면 좋았을 것을. 점차 눈앞이 뿌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흐릿해진 의식 속에서 라라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엘리나5 후보생, 100점 만점에 99점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라라는 눈을 떴다. 아이보리빛 커튼이 나부끼는 방이었다. 커튼 틈새로 비쳐드는 새하얀 햇빛을 본 순간 트라우마처럼 살아난 기억에 흠칫 몸을 떨었지만, 다행히 평화로운 곳인 것 같았다.
“정신이 드나요?”
돌연 평화를 깨는 음성이 가직한 곳에서 들려왔다. 생존 본능에 의해 뒤로 파바바박 물러났다가 그만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이불과 엉킨 꼴불견스러운 라라의 모습에도 엘리나5는 잔잔히 웃어 보일 뿐이었다. 라라는 뒤늦게야 그녀의 옷차림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월계관 형태의 순금으로 된 머리 장식이 섬세하게 은빛 머리칼을 두 갈래로 감싸고, 늘어뜨린 머리끝에는 금수와 은수가 번갈아 가며 놓인 허리 장식이 반짝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직선으로 떨어지는 치마 라인이었으나 물결치듯 양쪽으로 나뉘며 내려오는 흰 레이스 자락은 은근히 풍성해 보였다.
성녀만이 입을 수 있는 성복 같았다. 라라가 기품조차 잊고 입을 떠억 벌리고 있을 때 엘리나5가 다가와 그녀를 도와주었다.
“저 성녀로 발탁되었어요. 슈모르드 양이 뒤에서 열심히 응원해 준 덕분이에요.”
‘아뇨……. 저는 열심히 비명을 지른 것밖에 없는데요…….’
“어떤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될지 모르겠네요.”
‘아뇨……. 목숨만 살려주신다면야…….’
이불에서 나올 수 있게 도와주는 상냥한 손길이 몸에 닿을 때마다 라라는 불량배의 툭툭 치는 주먹에 맞는 힘없는 소년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감히 눈조차 마주칠 수가 없었다. 언제 그 눈에서 파괴적인 하얀 빛이 쏘아져 나올지 알 수 없어 더욱 긴장되었다. 안면 근육은 물론 온몸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척추를 타고 싸한 식은땀이 계속해서 내달렸다.
“역시 몸이 많이 안 좋은 것 같네요. 저번에도 쓰러지더니, 오늘은 땀까지 흘리고 얼굴도 핼쑥해졌네요.”
“이, 이건… 가, 감기 기운이 조금 있어서…….”
“어쩌다가 감기에 걸린 거예요?”
걱정이 담뿍 묻어나는 말이 라라의 귀에는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말로 자동 필터링되어 들려왔다. 안색이 허옇다 못해 물에 빠진 사람처럼 퍼렇게 질리자 엘리나5는 두 팔을 걷어붙였다.
“안 되겠어요. 제가 조금 신성력을 써야…….”
“꺄아아악, 잘못했어요!! 그것만은 절대 쓰지 말아주세요!!”
다시금 눈물을 터뜨리며 라라는 울부짖다가 자신의 손목을 붙잡으려는 엘리나5의 손을 알아차리곤 냅다 몸을 일으켰다. 레이디 축지법도 버리고 오로지 살기 위해 방을 뛰쳐나왔다.
“영애! 돌아와요!”
등 뒤에서 가녀린 외침이 들려왔지만 라라는 멈출 수가 없었다. 살고 싶었다. 이렇게 간절하게 바란 적은 처음이었다.
“허억… 허억.”
대신전의 복도는 생각보다 넓고 복잡했다. 나오는 벽마다 하얀 미로의 벽을 연상케 했다. 몇십 분이 흘러갔는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걸었을 때다. 라라의 눈에 건물 바깥과 이어지는 창문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공포의 대신전보다는 차라리 자연적인 정원을 헤매는 게 정신 건강에 훨씬 나을 것 같았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었지만 라라는 살기 위해 창틀을 뛰어넘었다. 마침 입고 있는 옷이 기사 제복이라 타 넘는 것은 수월했다.
‘…그보다 정원 출구는 어디에 있는 거지?’
라라는 어째 건물 안보다도 더 드넓은 것 같은 정원 속을 헤매야만 했다.
사실 이곳은 대신전 중심부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개인 정원으로 교황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황제조차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금단의 구역에 라라는 발을 디딘 것이다.
눈부신 햇살이 금가루처럼 뿌려진 정원 길은 희귀한 관상화로 꾸며져 있었다. 푸릇푸릇 손을 내밀고 있는 잎사귀들을 지나쳐 라라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것만 같은 비밀스러운 장소에 들어섰다. 작은 꽃밭과 정자로 꾸며진 그 끝에는 별채로 추정되는 건물 외벽이 드러나 있었다.
‘여긴 사람이 사는 곳인 걸까요?’
<왠지 이 안에 남주가 있을 것 같구나.>
‘남주라니요……?’
<미하일 레스터, 이 나라의 젊은 교황이자 병약남으로 여심을 사로잡는 남주이니라.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엄청난 양의 신성력을 품고 태어난 탓에 심장병을 앓고 있는 가여운 자다.>
라라는 신성력이라는 특정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해 버렸지만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루 마음 편히 쉴 수 있기는커녕 수시로 찾아오는 심장의 통증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매일을 괴로워하느니라. 동반되는 발작 증세 때문에 스스로 정원 별채에서 나오는 것을 꺼려한단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교황 성하가 계시다는 얘기만 들었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저는 그냥 연세가 있으셔서 외부 활동을 안 하시는 건 줄 알았어요.’
<그는 실제로 스물밖에 되지 않았느니라.>
라라는 왠지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심장병 때문에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니…, 누구는 하루 종일 방에서 뒹굴며 하루 세 끼 스파게티만 끓여 먹어도 냄새나게 잘 살던데.
<선택받은 자여, 네가 나설 차례다.>
‘저요?’
<미하일은 아직까지 어떤 여주와도 만나지 않았느니라.>
‘그럼 더더욱 저와 만나면 안 되지 않나요? 처음 다가와 준 사람일수록 큰 호감을 품는 법이잖아요?’
<네 말이 옳다. 그러나… 만일 미하일이 논클리셰의 힘에 잡아먹혔다면 여주와 만나는 일에 지장이 생길 것이 뻔하다. 네가 먼저 가서 남주의 상태를 확인하고 오너라. 마침 남장 중이니 괜찮을 것이다.>
하긴 남자 대 남자로 대면한다면 엘리나의 ‘손을 내밀어준 첫 번째 여자’ 타이틀을 지켜줄 수 있을 테다.
무전을 통해 명령을 전달받은 특수 요원처럼 라라는 신속히 건물로 접근했다. 벽의 모퉁이를 한 번 더 돌아서자 커다란 창문이 보였다. 하얗게 나부끼는 커튼 사이로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둑한 방 풍경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창문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그냥 문을 찾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