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언제 돌아볼 거지, 이 나를.”
왔다! 명장면! 속으로 환호하며 라라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이 순간은 갑갑한 현실에서 벗어나 릴리카에 완전 빙의가 되어있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줄 줄은 몰랐어요, 로브신사.”
“늘 목소리만 바락바락 높일 줄 아는 네게 이런 소심한 면이 존재할 줄은 몰랐군.”
“사람은 동전처럼 앞면과 뒷면이 함께 존재하는 법이에요. 선한 사람도 악한 힘에 잡아먹히는 거 당신도 많이 봐왔잖아요?”
“그래서 이젠 마법소녀는 관두고 어둠의 세력에 잡아먹히기라도 할 생각이란 건가?”
“그러면 당신이 날 구해주면 되겠네요. 에로디스의 꽃, 늘 탐냈었잖아요?”
경매장 한가운데에 서서 자연스레 대사를 읊는 두 사람을 덕후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만화책 대사를 통째로 다 외우다니 뭐 저런 씹덕후가 다 있냐는 표정들이었다.
“당신에게만 보여준 거예요, 이런 모습. 고마워해요. 그러니 당신도 내게 진짜 모습을 보여줘요.”
이 뒤는 릴리카가 로브신사의 후드를 직접 뒤로 넘기는 장면이었다. 잘생긴 그의 얼굴이 처음 나오게 되는 편으로 많은 여성 팬들이 심장을 부여잡은 편이기도 했다.
라라는 로브 대신에 상대의 안경테를 붙잡았다. 안경을 막 벗겨내려던 찰나, 커다란 손이 라라의 손목을 잡아 저지시켰다.
“이 정도면 됐다능.”
차마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덕후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인은 눈치만 살피다 결국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났다.
라라는 시끄러운 발소리에 뒤를 돌아봤다가 경매장 출구를 빠져나가는 인파 속에 섞여있는 지인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미쳤어! 미쳤어!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몸을 돌려 나가려는 라라의 손을 붙잡는 단단한 손이 있었다.
끈질기게도 동인지를 돌려받겠다는 건가. 라라가 남자의 손을 떨쳐내려던 그 순간이었다. 손끝에 딱딱한 것이 닿아 내려다보니 캐리어 손잡이였다.
남자의 손은 라라에게 캐리어 손잡이를 쥐여주고는 그대로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얼떨결에 캐리어를 돌려받게 된 라라는 “어?” 하고 황당한 소리를 내며 제 앞에 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인정하겠다능. 너는 그 동인지를 가질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능…….”
“…정말 이렇게 줘도 되겠어요?”
“아쉽긴 하지만 나중에 다시 구하면 된다능. 그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건장하게 떡 벌어진 양어깨가 아래로 힘없이 처져있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막막할 것이다. 어느새 텅 빈 경매장을 뒤로하고 남자가 등을 돌린 그 순간이었다.
“잠깐만요.”
라라가 남자를 불러 세웠다. 빙글빙글 소용돌이무늬가 새겨진 안경알이 비스듬히 라라를 향해 돌아갔다.
“당신도 만만치 않은 마법소녀 릴리카 덕후인 것 같은데… 빌려줄게요. 일단 내가 먼저 읽고.”
“너야말로 그래도 되겠냐능. 쉽게 남에게 빌려줄 물건이 아니잖냐능. 진정한 덕후라면 소장용과 읽는 용으로 두 권씩 둘 정도로 중요한…….”
“그렇긴 하지만 믿음이 생겼거든요. 당신이라면 내 동인지를 함부로 다루지 않을 것 같아요.”
한번 제 손에 들어온 동인지는 아무리 친한 지인이라도 빌려주지 않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그가 제게 먼저 양보한 시점에서 라라는 그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비록 두꺼운 안경 때문에 눈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분명 선한 눈을 가진 사람일 것 같았다.
“당신에게만 빌려주는 거예요, 내 보물. 고마워해요.”
큰 키의 사내를 지나친 라라는 출구를 빠져나가면서 릴리카의 명대사를 인용해 말했다.
문을 열자 머리와 어깨 위로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았다. 그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건지, 아니면 의외라 조금 놀란 건지 조용히 다물어져 있던 남자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리며 열렸다.
“아, 그렇고말고. 평생 고마워하지.”
뒤늦은 대답이 한낮의 햇살보다도 부드럽게 라라의 등에 와 닿았다.
4장 병약남주의 정석
아침이 밝아왔다. 출근하기 죽어도 싫었지만 라라는 대충 남장을 하고 방문을 열고 나왔다. 완치 판정을 받고 일주일 동안은 어떻게든 뻐겨봤지만 신의 잔소리에 귀가 따가워서라도 기사단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옥 같던 침대 위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참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다시 계단에서 구를까. 계단 앞에 서자 격한 충동이 일었다.
‘…아냐, 그렇다고 몸을 희생시킬 순 없어.’
잘못해서 손가락이 몽땅 부러지기라도 한다면 동인지를 쥘 수 없게 된다. 막 계단 아래로 내려오자 아슬아슬하게도 오빠와 어머니가 모퉁이 바로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다.
“승급 시험이 곧이구나.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이제까지 해왔던 대로만 한다면 분명 좋은 성적이 나올 거야.”
“네, 어머니. 이제 출근해 볼게요.”
전치 4주라던 오빠 새끼는 괴물 같은 회복력으로 저보다 먼저 나았는데, 심지어 기사단 스케줄을 무리 없이 소화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어서 가보렴.”
오빠는 묵례한 후 지나쳐 걸어갔고, 그 뒷모습을 어머니는 제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라라는 이 틈을 타 반대편 복도로 무사히 건너갈 수 있었다.
<자, 어서 서두르거라.>
‘걷고 있어요.’
<저기에 동인지가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뛰란 말이다! 푸하하하.>
신은 저번 온리전 때 이후로 자신을 놀리는 데 아주 재미가 들린 모양이었다. 라라는 높고 쾌청한 하늘을 슬쩍 흘기고서는 번화가 거리에 들어섰다.
가문의 마차를 탄다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갈 게 뻔하므로 번화가까지 걸어 나와 다른 마차를 타야 했다. 그나마 한적한 시간대라 시내 마차를 쉽게 잡아탈 수 있었다.
“휴우.”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늦은 점심에 일어나 마사지를 받고, 다과회에 참석해 영애들과 우아하면서도 한적하게 수다를 떨고, 저녁에는 무도회에 참석해 미래의 신랑감을 찾는 그런 일상을 꿈꿨는데, 점점 낭만적인 일상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오늘부터는 다시 흙먼지 속을 뒹굴며 땀 냄새나 맡아야 된다니 제 신세가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그때였다. 덜컹하고 돌연 마차가 멈춰 서자 라라는 그만 창틀에 기댄 채로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간이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자 한 여인이 마차 옆에 주저앉아 있었다.
“워, 워!”
마부는 놀란 말들을 진정시킨 후 급히 내려 여인에게 다가갔다. 조금 성을 내려던 그는 막상 마주한 아름다운 외모에 할 말을 잊은 듯이 멍해져 버렸다.
라라는 여인의 뒷모습만 보고도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희귀한 은발에 귓바퀴마저 조각품처럼 섬세하게 도드라진 여인은 다름 아닌 엘리나였다. 애초에 여주가 아니고서야 달리는 마차 앞에 맨정신으로 끼어들 인간이 세상에 또 어딨을까.
마차 문을 열고 내려선 라라는 마부를 대신해서 엘리나에게 말을 걸었다.
“엘리나4 공녀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셨어요. 어디 다치진 않으셨나요?”
“엘리나5랍니다.”
엘리나5는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라라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새끼 고양이가 폴짝하고 땅 위로 뛰어내렸다.
“…설마 새끼 고양이를 구하시려고…….”
“소중한 생명이 다치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어요. 제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시길.”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분명했다.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라라는 괜히 멋쩍기만 했다. 말없이 서있는 라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리나5가 희미한 미소를 띠며 먼저 말을 걸었다.
“사실 성녀 발탁 시험을 보기 위해 대신전으로 가는 중이었어요.”
“성녀 발탁 시험이요? 어머, 설마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겠죠? 성녀 발탁 시험이라니! 정말 가보고 싶네요. 외부인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국가 시험이잖아요?”
“네, 혹시 라안 경도 관심이 있다면 같이 가지 않겠나요?”
“아…….”
그제야 라라는 제 꼴을 알아차렸다. 남장한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것을 보니 그녀는 엘리나3에게 들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잊고 있던 현실을 다시 깨닫게 되니 라라는 기분이 우울해졌다.
“마음 같아선 곁에서 구경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제가 지금 기사단에 출근해야 돼서요…….”
라라는 눈물을 머금고 뒷말을 이어야만 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좋겠네요.”
“그렇군요. 기사단 생활은 어떤가요? 적응할 만한가요? 엘리나3은 아무 문제 없다고 하지만 남장한 상태로 생활하기 많이 힘들죠?”
“네, 정말 힘들어 죽을……. 호호, 그럭저럭 지낸답니다.”
나긋나긋한 위로의 말에 라라는 하마터면 본심을 까발릴 뻔했다. 이래서 사제 앞에 서면 저절로 고해 성사하게 되는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엘리나5는 마음이 곱다는 점에선 엘리나1과 성격이 비슷해 보였지만 좀 더 성숙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느낌상 엘리나1이 곱게 자란 공주님이라면, 엘리나5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여왕님 같았다.
그때,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엘리나5가 가볍게 짝 손뼉을 치며 성스러운 미소를 흩뿌렸다.
“그렇다면 이게 괜찮겠네요. 제 호위 기사로서 같이 가는 건 어떤가요?”
“호위요?”
“네. 공작 가문에서 요청한 일이라고 한다면 기사단에서도 수긍할 테고, 하루 출근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제가 호위를 잘할 수 있을지…….”
“워낙 안전한 곳이라 호위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시험이 치러지는 동안 곁에 앉아만 계세요. 오늘 폐를 끼친 것에 대한 자그마한 보상이라 생각해 주세요.”
결국 호위 기사인 척 옆에서 구경하면서 푹 쉬라는 말이었다. 천사님이 분명했다. 굳이 국가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분은 성녀가 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분이란 것을.
엘리나5의 따뜻한 자비에 라라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라라는 기사단에 있을 엘리나3을 버리고 엘리나5를 따라 대신전으로 향하였다.
수도에서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히는 대신전은 크게 세 구간으로 나뉜다. 일반인에게 공개되며 신자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과 사제들의 생활 공간인 별관, 그리고 교황이 기거하는 비공개적인 중심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