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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19)화 (19/115)

19화

오랜만에 수코에 왔는데 그냥 돌아가긴 아쉬워서 라라는 사람들 틈에 껴서 바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건물 밖에는 로브신사 코스어들이 많았다. 평소라면 뚫어져라 보고도 남았을 고퀄 코스프레였지만 이상하게도 눈길이 가지 않았다. 그날 밤에 만난 그 진짜 같았던 로브신사 때문이었다.

그 수수께끼 존잘님을 머릿속에서 떨쳐내기 위해 입구를 어슬렁거릴 때였다. 마침 운이 좋게도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지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지인님!”

라라는 반갑게 지인에게 다가갔다. 아까 그녀를 두고 간 게 제법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지인의 두 손에 들린 가방 안에는 알록달록한 동인지들이 빽빽이 담겨있었다.

라라가 부러운 눈으로 힐끗대고 있을 때 지인이 라라의 품에 안겨있는 동인지를 발견했다.

“구하셨네요?”

“네, 하하……. 힘들었어요.”

“역시 유리 님 동인지는 치열하죠. 그래도 저희가 귀족 영애라 다행이에요. 평민이었다면 정말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말이죠.”

말없이 라라는 수긍했다. 평민들 사이에서는 덕질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라라는 자작 영애로 태어나 이렇게 편하게 덕질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보다 오늘 경매 정말 기대되죠? 저는 이미 한가득 사버려서 경매 구경만 해야겠지만요.”

“네? 그게 무슨…….”

“어머나, 라라 양, 얘기 못 들었어요? 당연히 경매 소식을 알 거라 생각했는데.”

몇 년간 꾸준한 덕질을 해온 라라를 알기에 지인은 더욱 고개를 갸웃하기만 했다.

“피규어 장인이 만든 로브신사 한정판 특전 피규어가 나온대요. 로브신사 팬들 사이에선 이미 소문이 쫙 퍼졌던데요?”

“네?!!”

“정말 모르셨구나. 당연히 아시는 줄 알았어요.”

“제가 최근에 바쁜 일이 좀 생겨서 덕질을 쉬었었거든요…….”

안도의 눈물을 속으로 흘리며 라라는 지인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듯이 몸을 수그렸다.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는데, 감사해요.”

“덕질은 서로서로 도와가며 해야죠. 이런 게 덕후의 정이 아니겠어요?”

“흐읍……. 지인님이 최고세요.”

간신히 경매권을 손에 넣은 라라는 경매 시작 5분 전에 경매장에 입장했다. 이미 만석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인원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맨 뒷자리에 남은 두 자리에 앉으며 라라는 지인과 동인지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요즘 흑마법사X로브신사 위주로 먹어서 아침부터 BL부스를 세 바퀴나 돌았어요.”

“대단하세요. 저도 좀 일찍 올 걸 그랬어요.”

“로브신사와 흑마법사의 대결 편 보셨나요?”

“당연히 봤죠. 원작 정주행만 몇 번을 했는데요, 호호.”

“세상에, 이번에 스칼렛 님이 로브신사가 만약 졌다면 어떻게 됐을지 동인지로 풀어내셨는데 원작 바탕이라 그런지 더 몰입되는 거 있죠? 흑마법사가 노리던 게 사실 릴리카가 아니라 로브신사의 몸이라니 은근히 그럴듯하기도 해서 진짜 너무 쩔어요.”

“글쿤요.”

라라는 헤테로만 파기에 BL 발언에는 솔직히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역시 덕질도 파는 방향이 같은 사람이어야 통하는 게 더 많은 것 같다.

경매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에 라라는 떠들기를 멈추고 정면을 돌아보았다. 앞자리부터 순서대로 번호판이 지급되었는데 라라는 ‘46’이 크게 적힌 동그란 번호판을 받았다.

잠시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었을까. 이윽고 경매사가 경매 무대 위에 올라섰다. 행사 주최자의 짤막한 연사가 이어지고 경매사의 유쾌한 인사와 함께 곧바로 경매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상품입니다.”

‘처음부터 나오진 않을 테고, 한 중간쯤에 나오겠지…….’

“로브신사의 한정판 특전 피규어입니다.”

‘뭐얏!’

반사적으로 혀를 깨문 라라는 번쩍 번호판을 들었다. 응찰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경매 초반부터 모두 다 손을 들고 있었다. 아까 전만 해도 사이좋게 대화를 나눈 지인도 지금은 넘어야 할 적이었다.

무대 위로 수준급의 워킹을 선보이며 전문 코스어가 나타났다. 릴리카의 변신 모습을 그대로 재연한 고퀄 코스에 남성 덕후들의 함성이 낮게 터져 나왔다. 코스어는 무대 한가운데에 서서 피규어를 받친 황금색 방석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경매 관계자로 보이는 통통한 남자가 서둘러 무대에 뛰어 올라왔다. 이에 남성 덕후들의 우우우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경매사에게 귓속말로 뭐라 말을 전했다.

“…아, 죄송합니다. 이번 경매품은 예매 낙찰자가 따로 정해져 있는 상품이었다고 하네요. 경매 주최 측의 실수로 불편을 드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모쪼록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럼 다음 경매품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경매사는 능란하게 진행을 이어갔지만 몇몇 응찰자들이 불평을 토로했다.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 경매사는 다시 열띤 분위기로 되돌리기 위해 목소리 톤을 높였다.

“놓쳤다고 아쉬워하시는 분들, 다음 순번부터가 진짜 이 경매의 시작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으실 겁니다! 무려…….”

경매사는 짓궂게도 한 박자 쉬며 응찰자들의 면면을 첫 줄부터 끝줄까지 훑었다. 라라도 뒷말이 이어지길 기다렸으나 경매사는 끝까지 얘기해 주지 않았다.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선 바로 무대 뒤에 쳐진 커튼으로 팔을 뻗었다.

“큰 환호와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30년 경력의 장인의 손에서 태어난, 로브신사의 지팡이를 완벽 재현한 지팡이입니다!”

라라는 아쉬움에 손만 쪽쪽 빨다가 다음 경매품에 대해 듣고 눈이 뒤집혔다. 손수 제작한 로브신사의 지팡이라니. 일상생활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데다 방에 숨겨둘 데도 없었으나 온몸이 이건 꼭 사라고 반응하고 있었다.

서로 번호판을 치켜들고 높은 가격을 부르기에 바쁜 그때, 무대 커튼이 열리며 그 사이로 경매 관계자가 나타났다. 아까보다 더 짙은 야유가 터져 나왔다. 또다시 경매사와 관계자 사이에 비밀스러운 말들이 오갔다.

“…네?”

경매사도 황당한 반응을 감추지 못하는 게 또 무슨 실수가 있었나 보다. 경매 관계자는 서둘러 무대 아래로 내려갔지만 경매사는 곤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 정말이지 죄송합니다. 이번 경매품을 모두 사들이기로 예약하신 분이 계시다고, 방금 전달받았습니다.”

단번에 경매장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경매사는 경매권을 100% 환불해 드리겠다는 말로 응찰자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과열된 분위기는 쉬이 누그러들지 않았다.

“지금 장난해!”

“이러려고 내가 새벽부터 수코에 온 줄 알아! 주최자 어딨어!!”

“총책임자 나오라고 그래!”

무대 위로 작은 쓰레기들이 던져졌다.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비스듬히 쳐진 무대 커튼 뒤에서 누군가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어깨 너머로 튀어나와 있는 긴 포스터와 안정적으로 다키마쿠라를 안고 있는 폼이 범상치 않았는데, 라라는 그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저, 저 사람은……?’

“다들 진정하라능.”

가벼운 어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힘이 실린 묵직한 목소리 톤이었다. 잠시 조용해지나 싶더니 장내가 더욱더 소란스러워졌다.

“설마…, 저분은 전설의 덕후님!”

아. 누군가의 외침에 라라는 그제야 저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맨 처음에 그와 마주쳤을 때 어디서 본 것 같다 했더니.

전설의 덕후.

라라는 그를 한번 본 적이 있었다. 비록 가까이가 아닌 먼 곳에서 본 것이지만 그 강렬한 존재감을 잊을 수 없었다.

매년마다 열리는 온리전에 나타나 로브신사X릴리카 장르의 2차 창작품을 휩쓸어 가기로 유명한 남자였다. 소문에 의하면 마법소녀 릴리카의 초기 골수팬으로 덕질 경력만 10년이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모 같은 외부적인 활동이 전혀 없어 정체가 베일에 싸인 인물이기도 했다.

부르는 명칭을 봐도 알겠지만 덕후들 사이에선 거의 전설로 추앙받는 존재였다. 그리고 라라는 무려 그런 자를 상대로 도발했단 거였다.

“나를 화나게 한 자는 들으라능. 눈앞에서 경매품을 모조리 빼앗긴 기분이 어떠냐능?”

도르르르, 끌고 들어온 캐리어를 무대 중앙에 세운 그가 장내를 한번 훑었다.

“이 캐리어의 주인이자 내게서 동인지를 훔쳐 달아난 범인은 순순히 자백하는 게 좋을 거라능.”

“음, 저거 라라 양의 캐리어가 아닌가요……?”

“쉿! 조용해요.”

급히 지인의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무대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무대로 나오라능.”

“…….”

라라는 손을 들어 얼굴을 비스듬히 가리고 몸을 낮춰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슬금슬금 몇 걸음 갔을까,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외침에 걸음이 절로 우뚝 멈췄다.

“비굴하게 도망칠 작정인가! 마법소녀!”

‘저 대사는…….’

로브신사의 명대사 중 하나였다. 입이 간지러웠다. 자신은 저 대사를 받아치는 릴리카의 대사를 알고 있었다. 움찔움찔, 떨리던 입술이 결국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열렸다.

“…나는 단 한 번도 도망친 적 없어요, 로브신사.”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돌아보지 않는 거지.”

“그건…….”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 편은 로브릴리를 파는 덕후들에겐 성전이나 다름없는 편으로 두 사람의 관계 전환의 중요한 시작점이기도 한 편이었다. 만화책이 닳도록 봐댄 사람답게 절로 입이 움직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니까요.”

“어째서지?”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으니까요. 굳이 당신이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이든 내 정체를 알면 실망할 거예요. …난 그저 평범한 여고생일 뿐이에요. 성적은 보통이고, 외모도 특출 나지 않은 그저 평범한 여고생이죠. 당신은 변신을 한 내 모습만 봐서 그래요. 난 당신이 생각하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는 네가 어떤 자인지 알고 있다. 항상 꿈과 희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마법소녀. 뒤에선 울어도, 남들은 알아주지 못해도, 세계 평화를 위해 싸우는 너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허스키하면서도 감정을 잘 살린 저음이 나직했다. 목소리가 가까워져 옴에 라라의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정말 등 뒤에 로브신사가 서있는 기분이었다. 드라마 CD의 중요성을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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