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아무리 그녀에게 질투가 난다 해도 이런 식으로 그녀의 정성을 망쳐야 속이 후련하겠습니까.”
“…오해예요. 라라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요. 다 제가 못나서…….”
“그대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그리 시무룩해하는 겁니까.”
누가 보면 평소에는 북풍한설보다도 냉하지만 엘리나1의 앞에선 한없이 다정한 남자인 줄 알겠다. 저 X발 놈.
‘이러면 내가 던진 것 같잖아! 존나 못된 년 만들어 놓고 저게 뭐 하는 거야……!’
뒷목 잡기 일보 직전인 라라를 아는지 모르는지 디체스는 엘리나1의 손목을 부드럽게 눌러 잡으며 문 쪽으로 당겼다.
“나갑시다, 엘리나1.”
“그렇지만…….”
“그대 마음에 상처를 입힌 자를 그대는 용서할지 몰라도 나는 아닙니다.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공작님, 걱정은 감사하지만 라라는 그런 친구가 아녜요……. 친해진 지 한 시간밖에 안 됐지만 알 수 있는걸요……. 아.”
제대로 된 해명은커녕 엘리나1은 “아…아…….” 하고 가오나시 같은 소리만 내며 끌려갈 뿐이었다. 문고리를 붙잡은 디체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라라를 돌아보았다.
“라라, 당신에겐 실망했습니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그대를 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낸 건 아니니 이따 3시쯤에 다시 와서 몸 상태를 확인하겠습니다.”
‘이쯤 되면 자기가 제일 쓰레기라는 걸 알긴 할까…….’
두 사람이 나가자 엘리나2와 엘리나3은 서로를 잠시 응시할 뿐 다른 일에 몰두했다.
<오― 마이 갓!! 그래!! 이런 클리셰를 원했다고!! 이 기세를 몰아 이대로만 쭉쭉! 가즈아!>
신은 만족했는지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치는 것 같았지만 라라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라라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순수하고 착하고 심성 맑은 엘리나1이지만 그녀와 가까이에 있는 자는 반드시 악녀 포지션을 맡게 된다. 엘리나1이 의도치 않아도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게 만들 것이다.
오리지널 여주의 절대적인 권위는 변하지 않았다.
* * *
2주가 흘렀다. 라라는 저녁이 돼서야 전신 깁스를 풀고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오랜만에 목욕을 하니 얼마나 개운한지 몰랐다. 말린 머리를 가지런히 땋아 내리고 잠옷으로 갈아입기 무섭게 라라는 침대 밑에서 캐리어를 꺼냈다.
약 반년 만에 꺼낸 캐리어였다. 옅게 깔린 먼지를 직접 정성스럽게 닦고 안에 들어있는 잡동사니들을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일 기사단에 출근하려고 부지런히도 준비하는구나.>
‘무슨 소리세요? 내일 출근 안 할 건데요.’
<그게 무슨 소리냐!>
‘이제 겨우 회복했는데 당연히 일주일은 푹 쉬어줘야죠.’
<디체스와 엘리나3 사이에 또 무슨 논클리셰가 발생했을지 알고! 얼른 사명감을 가지고 본래 임무로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정말! 저도 오랜만에 좀 쉬자구요. 그리고 내일은 어쨌든 안 돼요! 절대!’
라라는 강하게 못을 박았다. 세계 평화보다 더 중요한 게 뭐냐고 신이 따지고 들어오자 라라는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내일은 아주 중요한 온리전이 열리는 날이라구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칠 순 없어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
대답해 주지 않고 라라는 냅다 침대 위에 누웠다. 어서 내일이 왔으면, 입술 끝이 앙증맞게 말려 올라갔다.
온리전이 열린 곳은 수도의 코믹월드, 즉 수코였다. 반년 만에 열린 온리전인 만큼 라라는 잔뜩 기합이 들어간 상태였다. 신간 동인지들을 모두 구입해야겠다는 비장한 포부를 안고 행사장 안에 들어서자 마침 아는 지인의 얼굴이 보였다.
아침 9시였다. 역시 조금 늦은 건가, 라라가 조급한 기분에 입술을 슬그머니 깨물자 지인이 먼저 라라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오셨군요!”
“호호, 당연하죠! 유리 님 신간 구매하셨나요?”
“물론이죠. 새벽부터 와서 줄 서서 기다렸어요.”
이런……. 라라는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유리 님의 신간이 있는 곳을 향해 뛰었다. 그런 그녀는 귀족 영애로서의 기품도 우아함도 버린 지 오래였다.
<대체 이곳은 뭐고, 너는 뭔데 이렇게 바삐 뛰는 것이냐?>
‘보면 몰라요? 『마법소녀 릴리카』 온리전이잖아요. 만화 『마법소녀 릴리카』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여는 행사 같은 거예요.’
『마법소녀 릴리카』.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샛별처럼 등장한 마법소녀물 만화로, 그 당시 만화라는 개념이 없었던 이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물론 마니아 계층으로 퍼져나가 여전히 만화 시장은 작은 편이었지만 전 세계 최초의 만화라는 점에선 높이 평가받을 만했다.
마법소녀물의 시초이자 모든 2차계의 존경의 대상이 된 ‘다케우리 히나코’라는 독특한 필명의 작가는 단 한 번도 세간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현재까지 꾸준한 연재로 건재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언제 다음 권이 나올지 모른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마법소녀로 선택받은 릴리카가 변신을 해서 어둠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꿈과 희망의 이야기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여전히 인기였다. 어둠의 힘을 봉인할 때마다 흰 장미가 그 자리에 피는데 작중에서는 에로디스의 꽃, 독자들 사이에선 편하게 봉인 장미라고 불린다.
‘봉인 장미는 마법별을 살리는 귀중한 힘의 원천이라 마법소녀 릴리카는 이걸 모으는데요. 만화 초반부에선 이 봉인 장미를 사이에 두고 로브신사와 릴리카가 라이벌로 나와요. 근데 미운 정이 정보다 더 무섭다고, 서로를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점차 마음을 열어가죠. 그 케미가 웬만한 연애 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쫄깃한 맛이 있다니까욧!’
라라는 그들의 케미에 푹 빠져 열세 살 때부턴 정모에 참가해서 이런저런 정보를 습득하고 인맥을 넓혀왔었다. 아까의 지인도 정모에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그래……. 네 취향을 알겠느니라. 취존하겠다. 그래서 『마법소녀 릴리카』의 덕후들이 모인 이 행사에선 대충 뭘 하느냐?>
‘보통 2차 창작품을 팔죠. 수위본 판매도 가능해서 저같이 동인지를 모으는 사람들에겐 성스러운 장소인 거죠.’
동인지 컬렉션 중에서도 라라가 가장 아끼는 1순위 장르는 단연 『마법소녀 릴리카』의 로브신사X릴리카 장르였다. 라라를 동인지의 세계로 인도해 준 그 첫 번째 동인지가 바로 생일 선물로 받은 유리 님의 동인지였고 말이다.
‘동인계에서 아주 잘 알려진 유리 님은 17금과 19금의 아슬아슬한 동인지로 인기를 끄는 분이에요.’
통판도 있지만 신간 동인지의 경우 직접 행사장에서 구입하는 방법밖에 없어 라라가 이렇게 서두르는 거였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구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입장과 동시에 매진되는 경우도 있기에 긴장을 늦춰선 안 되는데 오늘은 들뜬 나머지 너무 여유로웠다.
스쳐 지나가는 로브신사 등신대들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만 같았다. 끌고 있는 캐리어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자 라라는 아예 캐리어를 번쩍 안아 들고 달렸다.
얼마나 숨 가쁘게 뛰었을까, 멀지 않은 곳에 유리 님 부스로 추정되는 흰 테이블이 보였다. 안쪽에는 20대 중반의 성숙한 자태를 드러낸 유리 님이 조신하게 앉아 마지막 남은 한 권을 사 갈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유리 님! 이거 주세…….”
라라가 가볍게 점프해서 신간 동인지를 잡은 그 순간이었다. 반대편에서 소리 없이 치고 들어온 큰 손이 있었다. 세이프를 외치며 아슬아슬하게 베이스에 들어온 야구 선수처럼 날랜 동작이었다.
“내가 먼저 집었다능.”
옆에서 들려온 낮은 중저음에 라라는 고개를 들었다. 색 바랜 체크 남방과 청바지 패션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돌돌 말린 포스터가 꽂힌 배낭을 메고 한 팔에는 다키마쿠라를 안고 있었다. 동글뱅이 안경을 쓰고 있어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턱과 코, 입술은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누구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깊게 눌러쓴 야구 모자 아래 튀어나온 검자줏빛 머리나 전체적인 체격을 봐선 남자가 확실해 보였다.
“나에게 팔라능, 유리 님.”
“…이봐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 아직 잡고 있거든요? 그리고 제가 먼저 집었다고욧!”
“아니라능. 간발의 차긴 했지만 이 몸이 더 빨랐다능.”
“웃기셔, 정말! 제가 먼저 집었다니까요.”
라라는 끄응 하고 매끄러운 동인지 겉면을 누르고 있는 손가락에 모든 힘을 불어넣었다.
“…이거 놔요.”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이번 동인지 표지는 지금까지 모아온 동인지들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자극적이고 퀄리티가 높아 보였다. 19딱지가 붙어있는 짙은 와인색 배경에, 릴리카의 손목을 묶고 있는 가시덩굴과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로브신사. 벌써부터 내용이 심히 궁금해지는 것이다.
“세 배 더 얹어주겠다능.”
“그런 식으로 치사하게 나오기예욧? 유리 님을 돈으로 매수하려 하다니!”
“뭘 모르나 본데,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선 돈이 최고라능.”
“전 그럼 네 배 드릴게요, 유리 님!”
다른 동인지 네 권을 포기해야겠지만 유리 님 신간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은 대수롭지 않았다.
“열여섯 배 주겠다능.”
‘미친……!’
보통 다섯 배로 뛰어야 되는 거 아닌가. 네 배를 더 곱하다니 뭐 하는 인간인지 모르겠다. 유리 님은 난처하게 미소 짓다가 “아니에요. 원래 가격만 받을게요.” 하고 말했다.
“여기욧!”
라라는 핸드백에서 빠르게 돈뭉치를 꺼내 들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남자의 명치를 가격해 잽싸게 동인지를 뺏어 들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 서라능!”
명치를 부여잡은 남자가 저를 잡기 위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얼마나 빠른지 어느새 바짝 추격해 와 다섯 발자국 정도를 남기고 있었다.
‘에라잇……!’
라라는 달리는 데 거치적거리는 캐리어를 뒤로 집어 던졌다. 쿠당탕 하고 큰 소리가 들려와 슬쩍 뒤를 돌아보자 캐리어에 발이 걸려 넘어진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안경이 벗겨져 앞이 안 보이는지 앞머리가 쓸려 내려올 정도로 푹 고개를 숙인 채 더듬더듬 안경을 찾아 쓰는 모습이 안쓰럽긴 했지만 경쟁의 세계란 냉정한 법이었다.
‘미안하지만 에로디스의 꽃, 아니 신간 동인지는 내가 가져간다!’
라라는 여유롭게 로브신사의 명대사를 속으로 외치며 행사장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