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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17)화 (17/115)

17화

갑작스레 오빠의 방문이 열리더니 잠이 덜 깼는지 눈을 비비적거리며 오빠가 튀어나왔다. 오빠는 놀란 듯이 저를 내려다보았는데 그 모습에 라라는 괜히 숨을 멈췄다. 오빠는 나를 찾았던 걸까…….

“뭐야, 군대 갔던 거 아니냐?”

아까의 경악하는 반응이 이해가 된 순간이었다. 왜 여깄냐고, 포상 휴가 받은 거냐고 재차 묻는 오빠의 물음에 라라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야, 너 탈영한 거 아니지……?”

“…….”

“일단 물 먹게 비켜라. 아니다. 네가 떠 와라.”

마치 인심 쓰듯이 개소리를 지껄이는 오빠 새끼였다.

“3초 준다. 물 떠 와라.”

“…오늘 잘 걸렸다…….”

“……?”

“…죽어버려! 죽어!!”

“이게 탈영하고 정신을 놨나!”

라라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오빠를 향해 달려들었다. 목을 조르기 위해 뻗은 라라의 두 팔을 로렌스는 간신히 한 팔로 막아냈지만 점점 계단 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인간이 실성하면 평소보다 다섯 배의 괴력을 낸다더니, 사실이었다.

“아이 씨…, 작작 안 해!!”

로렌스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외친 그 순간 라라가 “죽어라!!” 하고 외치며 점프했다. 힘껏 몸통을 부딪친 순간 건장한 그의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우당탕탕. 눈썰매처럼 빠르게 계단 위를 미끄러지는 오빠의 몸 위에 납작 엎드린 채 라라는 함께 내려갔다. 마지막 칸에 다다라서 두 사람의 몸이 분리되었다. 라라는 왼쪽으로, 로렌스는 오른쪽으로 튕겨 걸레 조각처럼 널브러졌다.

그 소란에 1층 침실에서 자고 있던 자작 부인이 자작과 함께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허겁지겁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가 계단 아래 쓰러져 있는 자식 둘을 발견했다.

“에그머니나!”

자작 부인이 놀라서 약한 심장을 부여잡을 때 자작이 황급히 자식들에게 다가가 맥박을 짚었다. 다행히 두 놈 다 살아있었다.

* * *

“하아…….”

전신 깁스를 하고 방 천장을 올려다보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거지 같았다. 라라는 목 깁스 때문에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오빠 새끼와 함께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전치 2주 판정을 받아 누운 지 사흘이 지났다.

혼자선 똥오줌을 가릴 수가 없어 기저귀를 차고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고, 밥도 시녀들이 떠먹여 주었다. 누워있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처음 알았다.

한 가지 기쁜 사실은 오빠 새끼는 전치 4주라는 것이다. 라라가 혼자 멍을 때리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들어섰다.

“라라, 손님이 왔단다.”

“오……. 제발 들여보내지 마세요. 이런 꼴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단 말예요.”

무도회에서 몇 번 만나 친분을 쌓아놓은 영애가 몇 있었지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놓을 만큼 절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라라는 이 수치스러운 꼴을 가족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리니엇 공녀님들과 에스테반 공작님이 몸소 찾아와 주셨단다. 예를 갖추렴.”

‘아니, 이 꼴로 대체 어떻게 예를 갖춰요. 기저귀도 혼자서 못 가는데…….’

속은 답답한데 가슴조차 두드리지 못하는 제 신세에 라라는 그만 울컥해 버렸다. 어머니가 자신을 두고 방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네 사람이 나타났다.

“상태는 좀 어때.”

“소식 듣고 같이 왔습니다. 상태는 좀 괜찮습니까?”

기사단에 있다가 짬을 내 온 것인지 제복 차림의 엘리나3과 디체스가 다가왔다. 그 뒤로 명랑한 얼굴의 엘리나2와 순수함 100%의 수줍은 미소를 띠며 엘리나1이 등장했다.

“괜찮아? 어쩌다 그런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너한테 실피드를 붙여두는 거였는데, 아, 실피드. 농담이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말래?”

“미안해요, 갑자기 찾아와서……. 상태는 어떠세요?”

벌써부터 시끄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다 내쫓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위해 일부러 병문안을 와준 것이 고마웠다.

“로렌스 경도 옆방에서 휴양 중이라 들었습니다. 번갈아 가며 들르겠습니다.”

라라는 조용히 디체스의 등을 노려보았다. 줏대 없는 상사는 버려두고 여주들과 어울려야겠다. 문가에 서서 보이지 않는 정령왕과 재밌게 얘기를 나누는 엘리나2와 소파에 앉아 검을 손질하는 엘리나3도 쫓아내야겠다.

그때, 엘리나1이 라라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여왔다.

“점심은 먹었어요?”

“아뇨, 아직이요.”

“아, 잘됐네요. 그럼 제가 만들어 와도 될까요?”

방긋 웃으며 엘리나1이 손뼉을 쳤다. 요리사가 있는데 왜 굳이 공녀인 그녀가 직접 만들겠다는 건지 라라는 이해하지 못했다.

<순수하고 착한 심성의 여주가 병자를 간호하는 것은 클리셰이다. 원래라면 부상당한 남주를 간호해야겠지만… 흠, 마침 디체스가 와있는데 나와 함께 완전범죄를 꿈꾸지 않겠느냐.>

‘신 맞나요.’

길 잃은 어린 양을 상해 혐의로 구속되는 길로 친히 인도해 주는 신이라니, 독실한 신자가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죽 만드는 건 처음이지만, 잠시만 기다려요? 곧 만들어 올게요.”

작은 미소와 함께 엘리나1이 사랑스럽게 말했다. 이에 발랄한 엘리나2가 엘리나1의 뒤를 쫓았다.

“나도 갈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죽을 대령할 테니 기대해!”

엘리나2가 당당하게 외치더니 가만히 검만 손질하고 있던 엘리나3을 강제로 일으켜 세워 끌고 나갔다. 그제야 방 안이 좀 조용해지자 라라는 편안함을 느꼈다.

눈을 감고 휴식다운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 깜빡 존 건지 갑자기 시간이 확 당겨진 느낌이 들었다. 웅성웅성 주위가 시끄러웠다.

“라라! 일어나서 이것 좀 먹어봐.”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그릇을 쟁반에 받친 채 들고 있던 엘리나2가 자신 있게 말했다. 일어나지 못하는 라라를 위해 등 위에 세 개의 베개를 겹쳐놓아 누운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각도를 만들어 주었다.

목을 숙일 수가 없는 라라를 위해 엘리나2가 직접 스푼을 쥐었다. 엘리나2는 슬쩍 애매한 미소를 띠고선 죽을 휘휘 저었다.

“내가 만들어 봤는데… 생각보다 요리가 어렵더라고? 물론 먹고 죽진 않겠지만!”

호언장담하는 얼굴이 어째 더 의심스럽기만 했다. 라라는 뻣뻣하게 정면만 바라보다가 제 입까지 올라온 스푼을 눈만 굴려 내려다보았다.

비주얼이 흡사 어디서 말똥을 퍼온 것 같았다. 얼마나 태웠으면 짙은 고동색으로 변할 수 있는 거지. 라라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알아차린 엘리나3이 재빠르게 끼어들어 엘리나2의 수저를 빼앗았다.

“이건 아마 못 먹을 거야.”

“이게 어때서?!”

“그럼 네가 먹든가. 난 내 친구가 이런 음식을 먹고 탈 나는 꼴은 볼 수 없어.”

엘리나3……. 라라는 새삼 무뚝뚝한 그녀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제부턴 자신이 먹이겠다며 엘리나3이 자기가 만든 죽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라라는 눈을 굴려 죽을 확인하고는 떨떠름하게 미간을 구겼다.

“…저기 엘리나3, 그거 뭐야?”

“영양 만점 죽.”

윤기가 흐르는 고기 살점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말굽이 떠있는 건데.

“기운 회복에 좋은 거야. 남기지 말고 다 먹어. 힘들게 구한 거야.”

너 설마 우리 집 말 잡았니……? 이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으나 라라는 말하지 않았다. 이래서 칼 쓰는 여주가 무서운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을 뿐이다.

“엘리나3, 소화가 잘 안 되는 사람한테 고기죽은 무리일 것 같아, 응?”

조심스럽게 말을 건 엘리나1이 자신이 만든 죽을 앞으로 내밀었다. 라라는 “저거! 저거!” 하고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정상적인 죽이었다. 차라리 맛이 없더라도 비주얼적으로 괜찮은 걸 먹고 싶었다.

엘리나1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키웠다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러곤 뜨거우니까 조심히 먹으라며 호호 불어준 후 라라의 입에 가져가 주었다.

맛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담백하고 고소한, 정말 무난하게 맛있어서 특별할 정도였다. 논클리셰 오염 지역에서 찾은 유일한 청정 구역이었다. 라라는 깔끔하게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요.”

“아― 정말? 맛있다니 다행이야.”

순수하게 기뻐하다가 엘리나1은 아차하고 제 입술을 가렸다. 너무 편하게 말을 놓은 것이다.

“있잖아요, 라라 양. 이제 서로 말 놓을래…요?”

“좋아.”

“고마워. 사실 전부터 친해지고 싶었어.”

실로 풋풋한 소녀들의 대화였다. 이것이 여주와 여주 친구의 정석이라는 듯이 다정다감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디체스가 방으로 들어왔다.

하필이면 그때 가스가 아래로 몰리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최근 누워 지내다 보니 소화가 잘되지 않았는데, 이 기회를 놓치면 건강에 몹시 나쁠 것 같았다.

“…저기 엘리나3, 나 방귀가 나올 것 같아. 미안하지만…….”

라라가 엘리나3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얘기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 후 엘리나2와 엘리나1에게 조용히 전했다. 잘 알겠다는 듯이 씨익 웃은 엘리나2가 뜬금없이 “라라라라~” 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 엘리나1이 디체스에게 걸어가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했다.

“저기… 슈모르드 양이 방구 마렵다는데 잠시 나가주실 수 있으세요?”

수치스러운 기분에 라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숙녀에게 있어 방귀란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제가 언제욧! 제가 언제 그런 저질스러운 말을 했다는 거죠! 호홋!”

“아, 미안해, 라라. 내가 눈치가 없었나 봐…….”

안절부절못하는 엘리나1의 모습에 라라는 상승하던 분노 곡선이 살짝 수그러들었으나 얼굴은 여전히 벌겠다. 그 순간 라라의 이불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던 빈 죽 그릇이 굴러떨어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죽 그릇이 산산조각 났다.

“…아, 내가 치울게.”

엘리나1이 화들짝 놀라며 깨진 그릇 조각을 주우려는 순간이었다. 뻗어진 큼직한 손이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움켜쥐어 말렸다.

엘리나1은 고개를 들었다. 생애 처음 닿은 남자의 손은 뜨거웠다. 델 것 같은 체온과는 달리 표정은 한없이 차가워서 엘리나1은 가슴이 잠시 술렁였다.

“뒤로 물러나십시오.”

“네에……?”

엘리나1을 자신의 등 뒤로 보낸 디체스는 침대 위에서 뻣뻣하게 전신 깁스를 하고 있는 라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답지 않게 싸늘하고 매서운 눈이었다. 마치 여주를 시샘하여 패악을 부린 엑스트라를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사나운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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