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일어나십시오. 그대가 이리 무릎을 꿇는다 해서 그대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칼 같은 어투였다. 쉽게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차가운 이성주의자처럼 무심하게 복도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가 갑자기 안경을 꺼내 들어 썼다.
“내게서 눈물을 빼낸 죄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겁니다.”
‘너도 울었냐……?’
여러모로 답답한 상관이긴 하지만 앞뒤가 꽉 막힌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마성의 박애주의자다웠다.
레칼 영감은 디체스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서로 촉촉하게 젖어 든 눈을 수습하느라 바쁘다가 뒤늦게 눈들을 마주치자 어색함만이 감돌았다.
“그, 일단 다시 들어가시죠.”
레칼 영감이 먼저 운을 떼며 방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감동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라라가 속으로 경악할 때 철컥철컥하고 문고리 헛돌아 가는 소리가 울렸다.
“문이 잠겨있는……?”
당황한 레칼 영감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라라가 허겁지겁 말을 이었다.
“저, 저, 저기요! 노인분께 창문을 타 넘으라 할 수도 없고, 공작님께 시킬 수도 없으니 제가 돌아가서 창문을 타 넘을게욧!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럴 필요 없어요. 마침 열쇠를 가지고 있어서.”
“안 돼요. 열지 마세요!! 제발!!”
레칼 영감이 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문고리를 돌리는 그 짧은 순간 온갖 회의감이 다 찾아들었다. 나는 대체 뭘 한 거지, 이렇게 착한 분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단 말인가, 어깨가 추워 보여서 팬티를 덮어줬다는 변명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텐데, 누가 봐도 변태 확정…….
그때였다. 라라의 두 눈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들어왔다. 엘리나3의 몸 위에 웬 검은 로브의 남자가 올라타 있었다. 그녀의 손목을 수갑으로 채우고서 침대 헤드보드에 걸어놓으려는 장면을 세 사람은 정확히 목격했다.
금방이라도 겁탈하려는 듯한 자세에 레칼 영감이 가장 먼저 눈을 까뒤집었다.
“이 변태 새끼가! 지금 남의 집에서 뭐 하는 거냐……!!”
하마터면 변태가 될 뻔한 자가 단 3초 만에 다른 이를 변태로 만든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디체스가 붙잡기 위해 몸을 날리자 민첩하게도 남자는 엘리나3의 몸 위에서 뛰어 내려와 재빨리 창문을 타 넘었다. 외풍을 맞아 크게 펄럭거린 검은 로브 자락이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바로 사라졌다.
그것을 멍하니 볼 새도 없이 라라는 방을 벗어나 후문 쪽으로 갔다. 창문에서 나가면 어차피 빙 돌아서 후문 쪽으로 오게 되는 저택 구조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레이디 축지법을 사용해 신속하고도 조용히 후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뒷문을 나가자 멀지 않은 곳에서 펄럭이는 검은 로브가 보였다.
“이봐요, 당신!”
라라의 부름에 수수께끼 로브의 남자가 멈춰 섰다. 저가 만만한 건지 여유 있게 뒤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깊숙이 로브를 눌러쓴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정말 멈춰줄 줄은 몰랐기에 라라는 제법 당황한 상태였다. 하지만 침착함을 되찾고 천천히 운을 뗐다.
“…그 로브, 『마법소녀 릴리카』 2권 25화에서 로브신사가 처음 입고 나왔던 그 로브 맞죠?”
그는 말이 없었다. 아마 정곡을 찔렀을 것이다. 『마법소녀 릴리카』 원작은 물론 웬만한 2차계 동인지까지 섭렵한 라라였다. 덕질한 기간이 몇 년인데, 자신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저것은 단순한 로브가 아니라 로브신사의 코스프레용 로브였다.
“내 눈을 속일 생각 말아요. 그러니까 순순히 말해요.”
이렇게 나서는 성격이 아닌데 주인공 같은 짓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알아내야만 했다. 저 로브의 구매처를.
별안간 남자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후드 아래 갸름한 턱선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알게 모르게 희미한 감정이 드러나는 긴 입술선도.
‘뭐지, 정답…이란 걸까.’
남자가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낌새를 보이자 라라는 한 발짝 따라붙으며 급히 외쳤다.
“그럼 이, 이거 하나만 말해요! 엘리나3이 목적이라면 당신은 업고 갔을 테죠? 하지만 굳이 레칼 영감님의 침대에다 묶으려 했다는 건… 엘리나3이 목적이 아니란 소리겠죠? 혹시 일부러 레칼 영감님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당신은 대체 그 로브를 어디서 구한 거예요? 한정판일 텐데…….”
주객전도의 순간이었다. 로브 아래 희미한 곡선을 그리던 입술이 매끄럽게 휘어 올라갔다. 그 미소가 아름다워서 라라는 순간 홀린 기분이 들 정도였다.
“라안……! 어떻게 됐습니까.”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라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뒤쫓아 달려온 디체스를 마주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검은 로브의 남자는 밤공기에 녹아내린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허무함도 잠시, 라라는 눈앞에서 범인을 놓쳤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에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 그게…….”
“다치진 않았습니까?”
화내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냉정하게 굴지 않았다.
“이만 들어갑시다.”
“저, 근데 엘리나3은 괜찮나요?”
“손만 묶으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옷을 풀어 헤치려 한 흔적은 없었습니다.”
“다행이네요.”
한시름 놓은 기분으로 라라는 디체스를 따라 저택 안에 들어섰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게 되었다. 옷을 확인했다는 건 엘리나3이 제복을 입고 있는 걸 봤다는 소리일 텐데?
디체스의 옆얼굴을 훔쳐봤지만 그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었다. 긴 복도를 가로질러 다시 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앉아있는 엘리나3이 보였다.
식은땀에 젖은 긴 은색 머리를 가지런히 묶어 내린 모습이 검을 쥐는 기사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가녀린 태를 드러낸 채 그녀가 라라를 돌아보았다.
“…라라.”
목소리가 약간 잠겨있었다. 한번 열병을 앓은 것뿐이라지만 라라는 호들갑을 떨며 엘리나3에게 다가갔다.
“오! 에드가3! 괜찮아? 에드가3? 에드가3이 이렇게 아프다니…….”
“감기일 뿐이야.”
“하지만 에드가3은 평소 건강했잖아. 에드가3, 에드가3답지 않아.”
라라는 고의적으로 에드가3을 남발했다.
“에드가3……?”
정확하게 들린 건지 디체스가 굳은 얼굴로 엘리나3을 바라보았다. 같은 남장 여자인데 정말 취급이 달라도 너무 달라 놀라울 정도였다.
그는 믿기지 않는단 듯이 문가에 멈춰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어릴 적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부모님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했는데 커서 확인해 보니 진짜였단 걸 알게 된 사람처럼, 그는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당신이 에드가3이란… 그렇다는 말은 그 풍성한 머리가 진짜 머리란 말입니까?”
‘아니,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가는데!’
공녀인 게, 여자인 게 더 중요한 포인트 아닌가. 라라는 어이가 없어서 슬쩍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너무 심각한 분위기에 대놓고 웃을 수 없었다.
“대답해 보십시오.”
“…단장님을 속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엘리나3은 고개를 숙였다. 어떤 식으로 변명해도 자신이 공녀라는 사실을 지울 순 없었다. 규율을 어긴 자는, 기사단의 수치다.
“…죄송합니다.”
담담하려고 노력했으나 수포였다. 꽉 깨문 입술 새로 바스라질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테다. 숨겨야만 하는 자신의 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무거워진 기분에 엘리나3이 고개를 깊숙이 떨어뜨릴 때였다.
“어째서 가발 따위를 썼던 겁니까. 나는 그대가 진정 부분 탈모 환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같이 탈모 관리 숍에 가자고 말을 하려 했습니다.”
귓속을 두드리는 다정한 음성에 엘리나3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그녀 앞에 선 디체스가 엘리나3의 숱 많은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는 것이 진짜였다. 디체스의 입가에 희미하게 포기의 빛이 어렸다 사라졌다.
“그런데 이젠 그 마음을 접어야겠군요.”
배신감이 어마어마해 보였다. 지인을 데려가면 20% 할인을 해줬던 모양이었다.
“당신이 부분 탈모가 아니라는 점은 유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대의 모근을 뿌리째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장님.”
“이 일은 둘만의 일로 덮어두겠습니다.”
“피쉬익―”
그만 튀어나온 웃음소리에 라라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엘리나3과 디체스의 눈길은 라라에게 간 지 오래였다.
“왜 웃는 겁니까. 탈모가 우스운 겁니까.”
“…아뇨, 갑자기 웃긴 기억이 떠올라서……. 죄송해요.”
라라는 쭈뼛대다가 솔직하게 사과했다. 엘리나3을 돌아보자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침대에서 내려와 방을 나서고 있었다. 엘리나3이 밖에 있는 레칼 영감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간 사이, 라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건은 일단락이 마무리됐지만 이러다 로맨스 판타지를 접어야 할 판이었다.
* * *
너덜너덜한 몸과 정신을 이끌고 라라는 마차에 올랐다. 피곤해서 눈을 감자 기다렸단 듯이 로브를 쓴 수수께끼 남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대체 그 한정판 로브는 어디서 구한 걸까. 그보다 굉장히 키가 크고 몸이 날렵했었다. 마치 만화 『마법소녀 릴리카』의 초반부에 릴리카와 봉인 장미를 두고 추격전을 벌였던 로브신사의 모습처럼.
수수께끼의 로브를 쓰고 한밤중에 나타나 릴리카를 훼방 놓는 강렬한 등장 신에 많은 독자들이 로브신사의 정체를 궁금해했었다. 현재 35권에 이르러서는 남주로 확정 지어져 로브신사X릴리카 커플링이 공식으로 굳어진 지 오래였다.
라라는 로브신사X릴리카 동인지를 접하고 그다음 원작을 접한 케이스라, 어찌 보면 최애인 로브신사 덕분에 동인지 수집이라는 취미가 생겼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존잘님…, 원작의 로브신사를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 냈었어.’
짧았던 존잘 코스어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라라는 편히 소파에 몸을 묻었다.
눈을 뜨니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이틀 동안 연락조차 주지 못했으니 분명 가족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정문을 지나 불이 꺼진 거실로 들어서자 아무도 없었다.
이 새벽에 누가 일어나 있겠냐마는. 엑스트라의 설움을 털어놓을 상대가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라라는 괜스레 눈물이 찔끔 났다.
‘오랜만에 내 보물인 동인지나 읽으면서 힐링해야지…….’
힘겹게 계단을 오르던 그 순간이었다.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