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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15)화 (15/115)

15화

보통 남장 여자가 사실은 여자라고 밝히면 놀라는 척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라라는 그 미적지근한 태도에 김이 다 샜다.

여주였다면 100% 경악하거나 진짜 여자가 맞냐고 재차 묻거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동공이 흔들렸을 텐데, 엑스트라는 그런 거 1도 없구나.

“라안.”

그런 라라의 씁쓸한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디체스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는 선뜻 라라의 손목을 붙잡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말했다.

“경이 여장 남자든 남장 남자든 그건 내가 그대를 놓을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둘 다 남자잖아!’

공기 속 잔잔한 떨림이 전해져 오자 라라는 그만 움칫 손가락을 떨었다. 살짝 고개를 들자 어두운 그의 눈이 보였다. 정 없이 날렵한 직선을 그리던 눈매 끝이 녹아내릴 것처럼 부드러웠다.

“나는 절대 경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게 아닙니까.”

‘입단한 지 고작 하루 됐을 뿐인데요.’

라라는 속으로 작게 토를 달았다. 이를 알지 못하는 디체스의 목소리는 점차 열을 띠며 고조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미 하나가 아닙니까. 뜨거운 단결력으로 뭉친 황.실.기.사.단. 가족보다도 더 가족 같은 편안한 분위기,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불편함을 눈치채 주는 끈끈함.”

“전혀 눈치 못 채주시고 계신데요…….”

“상관과 부하의 끈끈한 관계란 늘 마음을 든든하게 해줍니다. 피가 물보다 진할진 몰라도 우리 기사단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기사단이 내 기사단이라는 마음으로 그 한 몸 충성을 다한다면 그대는 이미 한 집단의 어엿한 구성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든 남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잔 게 중요하다고요!”

회사에서의 가족 같은 분위기가 족 같은 분위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더했다.

“여자인 걸 눈감아 줄 테니 기사단은 그만두지 마십시오. 애당초 놓아줄 생각도 없지만.”

“아니요.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제가 그만두고 싶다고요.”

“상관없습니다.”

‘아니, 내가 상관있다고!!’

혈압. 라라는 뒷목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들어올 때도 내 맘이 아니었는데 나갈 때도 내 맘이 아니라니. 한번 발을 넣으면 헤어날 수 없는 피라미드 조직의 늪에 빠진 것만 같았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자 라라는 상사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디체스가 엘리나3을 훌륭하게 구출만 한다면 완벽한 클리셰의 완성일 테다.

산골 으슥한 곳에 숨겨진 으리으리한 저택을 보니 확실히 뭔가 있을 것 같았다. 변태 영감의 저택에 잠입하기 위해 디체스가 먼저 신속하게 저택 후문으로 접근했다. 고용인들이 드나드는 뒷문을 열자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쉽게 복도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불이 꺼진 복도는 캄캄했다.

<디체스는 엘리나3이 순결을 잃기 직전 변태 영감에게서 엘리나3을 무사히 구하느니라. 하지만 옷이 풀어 헤쳐지고, 가발을 벗고 있는 엘리나3을 보고 자신의 부하 에드가3과 동일 인물임을 눈치채지. 그렇게 여자임을 눈치채고 둘 사이에 야릇한 분위기가 피어나는 것이니라.>

‘똑같이 생긴 엘리나2를 이미 봤잖아요. 그런데도 눈치 못 채던데요…….’

<네가 옆에서 힌트를 던져주면 되지 않느냐. 눈치 없이 남장 이름으로 부른다든지.>

‘힌트가 아니라 그 정도면 아예 떠먹여 주는 거 아닌가요?’

<적당히 알아서 하거라.>

적당히가 가장 어렵다는 걸 신은 알까. 난감한 미소를 띠며 저택 복도를 걷던 라라는 어디선가 들려온 얕은 신음 소리에 멈춰 섰다. 디체스도 마찬가지로 걸음을 멈췄는데, 그의 얼굴은 이전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굳어있었다.

라라도 충격에 의해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희미해도 그 신음 소리가 엘리나3의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서 못 합니다.”

허탈감을 뒤로하고 분기가 실린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건 어두운 복도를 통째로 집어삼킬 것처럼 깊은 분노였다.

허리춤에 걸린 검자루에 손을 가져간 디체스가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는 방을 찾아 나섰다. 얼마나 빠른지 라라는 쫓아 달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마침내 어느 방 앞에 도달한 디체스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검을 검집째 풀어내었다.

“감히 날 빼고 둘이서만 지지고 볶다니……. 나도 같이 껴서 하는 겁니다.”

‘미친놈아!’

거추장스러운 검을 바닥에 던져두고 재빨리 탈의를 하며 디체스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를 말리기 위해 라라가 허겁지겁 뒤따랐다. 하지만 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그들의 상상과는 많이 달랐다.

“하아… 하아…….”

식은땀에 흠뻑 얼굴이 젖은 엘리나3이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그런 그녀의 곁에는 한 배불뚝이 노인이 앉아있었는데 그는 개기름이 낀 손으로 정성스레 물수건을 짜고 있었다.

“거기, 무슨 볼일로……?”

창백한 이마 위에 물수건을 얹어준 배불뚝이 노인이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청객들을 돌아보았다. 심술이 뒤룩뒤룩 묻어나는 두 겹의 턱과 튀어나온 배 따위만 본다면 정말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변태 영감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좀 전의 행동을 보면 전혀 변태 영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라라는 슬쩍 침대를 돌아보았다. 흐트러지기는커녕 원래 입고 있던 제복 차림 그대로인 엘리나3이 보였다. 해치기는커녕 정성스레 간병을 한 것 같았다.

‘변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여기도 논클리셰가…….’

<내 사전에 논클리셰란 없느니라. 아니더라도 클리셰대로 되게 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 누명을 씌우라는 거예요?!’

<당연한 소릴. 우린 어떻게든 클리셰를 되찾아야 하느니라.>

‘저 노인의 인생이 달린 일이라고요.’

<네게 맡겨진 사명을 생각해라, 선택받은 자여. 네 어깨에 이 세계의 운명이 달려있다.>

뭐 이런 신이 다 있냐는 불경한 생각이 들었지만 라라는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오빠를 구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공녀인 걸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충분히 죄로 인정됩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인…….”

“크흠, 나가서 얘기하죠. 아픈 사람을 깨울 정도로 급한 얘기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그동안 디체스와 노인 사이에 짧은 얘기가 오간 건지 두 사람은 따로 바깥으로 나갔다. 다행히 라라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기회라 여긴 라라는 문을 잠그고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침대 옆 서랍부터 시작해서 커다란 옷장 서랍까지 모두 열어보았다. 맨 아래 칸을 열자 곱게 개어진 노인의 팬티가 놓여있었다.

라라는 그것을 쥐기가 심히 망설여졌지만 머릿속으로 오빠를 생각했다. 착하고 따스한 시스콤일 적의 오빠를.

팬티의 끄트머리를 쥐고 라라는 재빠르게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이걸 엘리나3의 머리 위에 씌워놓으려다가 그럼 엘리나3이 변태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어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럼 이렇게 해두는 게 좋겠지.’

엘리나3의 어깨 위에다 살포시 팬티를 덮어놓았다. 뭔가 여자의 어깨에 흥분하는 변태로 착각할 만했다.

그리고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 라라는 창문을 통해 방을 빠져나가 다시 후문으로 돌아 들어갔다. 화장실에 다녀온 척 레이스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는 시늉을 하며 말이다.

복도에는 디체스와 노인이 한창 얘기 중이었다.

“사들인 노예만 해도 108명씩이나 되던데 이건 어떻게 변명할 참입니까.”

“…이렇게 된 이상 전부 얘기할 수밖에 없겠군요.”

난감한 기색을 띤 레칼 영감이 곧 허탈한 음성으로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열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찍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요. 아내와도 얼마 못 가 사별하고 완전히 혼자가 되었죠.”

라라는 슬그머니 그들의 곁에 다가서며 “여기 수압이 약하네…….” 하고 중얼거리다가 점점 얘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남은 생을 혼자서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재산이 많은데도 공허하단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지요. 딸과 아내의 뒤를 따르려고 마음먹은 날…, 우연히 저희 집으로 도망쳐 온 노예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꿀꺽.”

“지금의 제 수양딸이지요.”

아. 라라와 디체스는 동시에 놀란 눈을 했다.

“열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노예로 팔려나갔다가 마차가 멈춘 틈을 타 간신히 도망친 아이였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거두었죠. 정말 내 딸처럼 키웠습니다. 함께 지내는 동안 정말 내 딸아이가 살아있다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하루하루가 행복했습니다.”

잇몸이 만개한 미소였다. 개기름이 낀 못생긴 얼굴이 마치 보살처럼 환하게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황금빛의 누런 뻐드렁니가 부의 상징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수양딸이 그러더군요. 자신만 행복한 게 죄책감이 든다고……. 아직도 거기에 갇혀있는 자신의 친구들을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다고 말이지요. 더 많은 친구들이 구출됐으면 좋겠다고 눈물을 쏟으며 말하는데 어찌 부모 되는 사람이 나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손을 닦으려고 꺼낸 손수건으로 라라는 슬쩍슬쩍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눈가는 발갛게 변한 지 오래였다.

“한창 꿈을 꿀 나이에 철창 안에 갇혀서 사람 취급 못 받으며 사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더군요. 그 뒤로 제 전 재산을 노예들을 사는 데 썼습니다.”

“흐읍…….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뻔한 얘기지만, 그렇게 하나둘 집으로 데려오다 보니 어느새 108명이 되어버렸죠. 하지만 저는 행복합니다. 노예상의 눈을 속일 수만 있다면, 저 자신이 세간에 뭐라 소문이 나든 상관없어요.”

단호한 결의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제가 죽기 전까지는 그 애들의 뒤를 봐주면서 지켜주고 싶습니다. 아니, 지금보다 더 많은 아이들을 구해와 꿈을 꾸며 살 수 있게 해줄 겁니다. 그게 제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러니 공작 전하, 저는 아직 잡혀갈 수 없습니다……. 끄흐윽.”

디체스의 옷자락을 붙든 채 바닥에 주저앉는 레칼 영감 옆에서 라라는 따라 오열했다.

그는 변태가 맞았다. 모든 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감성 변태……. 이렇게까지 울어본 감동 사연은 처음이었다. 얼마나 눈물을 펑펑 쏟은 건지 눈이 다 따가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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