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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14)화 (14/115)

14화

단시간 만에 상처가 아물었다. 라라는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 입을 살짝 벌렸는데 바로 그 순간, 크리온의 눈이 움찔거렸다. 눈을 뜬 그는 가장 먼저 엘리나2와 눈을 마주쳤다.

“어, 일어났네? 저기 괜찮아?”

“…….”

엘리나2의 손에 코를 가져다 댄 크리온은 킁킁 냄새를 맡다가 뒤로 물러섰다. 어째 대형견 남주라 하기엔 뭔가 이상한데? 라라가 그렇게 생각할 때 크리온의 시선이 라라에게로 옮겨갔다.

“…그르르르릉.”

목울대를 타고 사나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발광하는 황금빛 눈에 라라는 움찔하며 피 묻은 책을 등 뒤에 숨겼다.

‘…아무리 봐도 대형견 남주 아니죠? 이 사람 뭔가 이상한데요.’

<남주를 대형견이라 부르는 클리셰가 사라진 것 같다. 아마도 그는 일반 대형견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구나.>

‘그게 뭐예욧!’

라라는 금방이라도 자신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 같은 대형견 남주의 모습에 놀라 두 팔로 머리를 가렸다.

이때 엘리나2가 조용히 라라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곤 대형견을 제압하려는 듯 매섭게 그를 노려보며 천천히 자신보다 큰 남자에게 다가갔다. 한껏 예민해진 크리온은 그르렁 소리를 내며 주춤주춤 벽 쪽으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난다는 건 지금 잔뜩 겁에 질려있다는 거야.”

엘리나2는 물러섬 없이 바짝 다가서며 크리온의 앞을 막아섰다. 크리온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옆으로 다리를 뻗으며 팽팽한 대치를 이어나갔다. 마치 강X욱 훈련사님이 빙의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믿어도 돼.”

“…으르르르.”

“너를 해치지 않아. 약속할게.”

“…끼잉.”

자신을 치료해 줬던 사람으로 기억이 된 건지 곧 크리온이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엘리나2의 앞으로 다가왔다. 엘리나2는 낯을 가리는 크리온을 귀엽게 받아들였다.

“옳지, 착하다. 너 몸만 크지 상당히 순하구나?”

라라는 떨어진 채 그 훈훈한 광경을 지켜보다가 엘리나2의 어깨에 순순히 머리를 묻고 있던 크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크리온이 입술을 벌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였다.

“…그르르르릉.”

등에다 ‘맹견 주의’를 써 붙여야만 될 것 같았다.

‘일 잘 풀린 거겠지……. 대형견 남주가 여주만 따르는 건 클리셰니까.’

라라는 등 뒤에서 헥헥 소리를 내며 걷고 있는 크리온을 외면하며 생각했다.

인간다운 면모를 찾아볼 수 없는 리얼 짐승남이었다. 물지 안 물지 눈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의 연속이니 웬만한 밀당 고수들은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았다.

엘리나2는 단순하게 그가 오랫동안 이종족 노예로서 갇혀 산 데다 인간다운 취급을 받지 못해 이렇게 된 거라 안쓰러워했다.

“다시 인갑답게 살 수 있게 옆에서 도와주고 싶어.”

“그 말은…….”

“보호자도 없고 돌아갈 곳도 없잖아? 내가 의지가 될진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돕고 싶어.”

명랑한 엘리나2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말하니 라라는 새삼 그녀가 다시 보였다.

일단 남주를 찾든 엘리나3을 찾든 해야 할 것 같아 복도로 나왔으나, 새로운 환경에 흥분한 것인지 크리온은 가만히 있질 못했다.

“거기로 가면 안 돼!”

“……?”

엘리나2의 단호한 외침에 크리온은 다른 쪽으로 뛰어가려다 말고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제자리를 빙빙 돌더니 벽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라라는 피로감을 느꼈다. 그를 일일이 쫓아다니며 저지하는 엘리나2가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앞만 보며 걷다가 웬일로 뒤가 조용하자 슬쩍 돌아보았다.

목에 개 목걸이를 차고 얌전히 엘리나2의 옆을 걷는 크리온이 보였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개와 개 주인 같았다.

“…그 목줄은 대체……?”

“아, 이거? 개 목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저기에 떨어져 있기에 주웠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겠다며…….’

라라는 미세하게 눈가에 주름을 만들어 냈다. 정말 여주에게 맡겨도 되는 걸까 의심이 들었다. 그보다도 상식적으로 이 복도 한가운데에 개 목줄이 떨어져 있는 것도 이상했다. 남주가 더 이상하긴 하지만.

<잊었느냐? 클리셰 보상 제도이니라.>

‘아, 맞다. 그런 게 있었죠.’

<거지 같은 거라니, 말이 심하구나.>

‘…거지 같다고 한 적 없는데요.’

자기가 생각해도 거지 같구나. 더 이상 얽매이고 싶지 않아 라라는 꿋꿋이 앞만 보고 걸었다. 복도 코너를 세 번 돌자 거대한 문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다행히 아는 얼굴은 없었다. 이곳만 유독 인력이 집중된 걸 보니 아마 여기서 노예 경매가 이루어진 것 같았다. 드레스의 매무새를 한번 가다듬고서 라라는 기사들 앞으로 다가갔다. 기사답게 작은 인기척에 바로 고개를 돌렸다.

“공녀님 아니십니까!”

“공녀님!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어서 공작저로 가시지요.”

‘…그 옆에 자작 영애도 있지요.’

기사들은 엘리나2를 발견하고는 하나같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공녀가 둘씩이나 실종됐는데 꽤 애간장을 태웠을 것이다.

“엘리나3은요? 엘리나3은 어디 갔죠?”

엘리나2는 목줄 끝을 붙잡은 채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두 발로 서서 으르르 소리를 내는 금발 남자를 이상하다는 양 힐끗대는 기사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었다.

“그게…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 당장 찾아야 돼. 실피드!”

또 정령왕을 불러낸 건지 어디선가 작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왔다. 엘리나2가 심각하게 허공에 대고 뭐라 뭐라 얘기하는 동안 맞은편에서도 심각한 보고가 이어졌다.

“방금 팔려 간 기록이 적힌 장부를 확인했습니다만, 엘리나3 공녀님은 레칼이라고 하는 부유한 상인에게 팔려 간 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레칼……?”

“네. 돈과 여자에 미친 배불뚝이 영감인데, 특히 이곳을 평소 자주 드나들었다네요. 노예들을 대거 사들이기로 유명해서 이쪽에선 손이 큰 손님으로 대우받았답니다.”

대충 들어도 기분 나쁜 변태 영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자에게 엘리나3이 강제로 팔려나갔다니…….

<무사히 클리셰대로 진행되었다니 다행이니라.>

‘다행은 개뿔이!’

라라는 불현듯 엘리나3의 얼굴을 떠올렸다. 비록 회상할 만한 좋은 추억거리는 없다지만 그래도 친구였다. 만약 남주가 조금이라도 늦게 나타나서 무슨 일이라도 당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라라, 어서 가자.”

부드럽지만 강하게 손목을 붙잡아 주는 손이 있었다.

“엘리나3을 구하러.”

엘리나2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라라의 손목을 붙잡고 뛰었다. 바깥에 산책 나가는 줄 아는지 크리온이 신나서 껑충껑충 따라 뛰었다. 이에 기사들이 공녀를 호위하기 위해 서둘러 뒤따라 붙었다.

어느새 한마음 마라톤처럼 우르르 좁은 복도를 달리는 사람들로 인해 라라는 정신이 없었다. 마왕과의 최후 전투라면 몰라도 변태 영감을 퇴치하러 가는 것치고는 과할 정도로 인원이 많았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금방이라도 인파에 휩쓸릴 것 같은 그때였다. 활짝 열려있는 정문 사이로 한 사내가 달빛을 맞으며 서있었다.

“공녀는 이 내가 책임지고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이 목소리는……!’

파급력은 대단했다. 모두가 그 자리에 멈춰서 한곳을 바라보았으니까. 라라는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기사들을 휘어잡을 인물은 기사단장 디체스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신도 함께 말이지요.”

난데없이 바로 앞에서 들려온 저음에 라라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사무용 안경을 벗은 디체스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등 뒤부터 인파가 양쪽으로 나뉜 걸 보니 일일이 헤집고 여기까지 자신을 찾아온 것 같았다.

‘아니, 나라고……?’

엘리나2와 헷갈린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의 이지적인 검은 눈은 콕 집어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곧이어 엘리나2의 손에서 제 손목을 빼내 대신 쥔 그가 마치 연인처럼 가깝게 입을 숙여왔다.

“다시는 내게서 떨어질 생각 마십시오, 라안.”

“왜 굳이 귀에다가 속삭이시는……!”

“그런 발칙한 여장까지 해서 내게서 멀어지려 했다니 유감입니다. 다음은 어떤 식으로 탈출해서 이 나를 즐겁게 해줄지 매우 궁금하군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대는 죽어서도 내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뜨겁고 질척한 입김이 닿자 귓바퀴를 따라 솜털이 오소소 돋아났다. 집착하는 대사가 생각보다 항마력이 높아서 라라는 설렌다기보다는 소름이 끼치는 것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당신은 사막의 뜨거운 태양 같습니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나를 더 갈증 나게 만들어.”

‘창피하니까 그만해!!’

그는 주위 눈은 신경조차 안 쓰는지 강압적으로 라라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라라도 이땐 몰랐다. 상사의 불편한 집착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얼마나 무섭게 발전할 수 있는지를.

* * *

흔들림 없는 최고급 소파 시트에 앉았으나 기분상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라라는 숨통이 콱콱 조였다. 화살처럼 제게 꽂혀있는 시선 때문에 제 얼굴이 과녁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말해보십시오, 어째서 내게서 도망친 건지.”

“딱히 단장님에게서 도망친 건 아니고요. 누명 때문에, 이대로 갇혀있을 순 없단 생각에 너무 억울해서 탈출한 거였어요.”

“고작 그런 이유로 내게서 벗어나려 했단 말입니까.”

아니꼬운 눈빛이 날카로웠다.

“네……. 정말 그 이유예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네요. 오늘부로 관둘게요.”

<당장 취소하지 못하겠느냐!>

신의 꾸지람에도 라라는 작정한 사람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왔어야 했다. 자신이 무슨 부귀를 누리겠다고 기사단에 입단한 건지 모르겠다.

“적성에 맞지도 않고, 사실 검을 쥐는 법도 잘 몰라요.”

“그런 핑계를 대면 내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에요. 그리고 저…….”

머뭇거리다가 라라는 힘겹게 입술을 뗐다.

“여자예요. 애초부터 속이고 입단한 거였어요.”

“그런 핑계를 대면 내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아니, 핑계 아니고 진짜예요! 여자인 게 어떻게 핑계가 될 수 있는진 몰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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