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13)화 (13/115)

13화

구시렁대면서도 부끄러워 뺨은 발갛게 달아오른 지 오래였다. 지금 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아무 말이나 내뱉던 라라는 뒤늦게 앞에 있는 남자가 아무 말도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슬며시 고개를 들자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그가 보였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군.”

그 말과 동시에 남자의 손바닥이 라라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한번 쓰다듬으며 씨익 웃고 가버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라라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노예 경매가 진행되는 층으로 올라가는 것 같았지만 뒤쫓아 갈 수도, 그를 부를 수도 없었다.

‘어쩜 그런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담?!’

숙녀의 머리에 함부로 손을 가져다 대다니 이상한 남자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자신이 이상한 걸까. 묘하게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라라는 한동안 고개만 푹 숙이고 있어야 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선택받은 자여, 지금이라도 여주를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주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다니요?’

<남주가 여주를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구하는 클리셰가 있어야 남주와 여주의 관계가 급속도로 발전하느니라.>

‘아무리 그래도 신이 이런 일을 시키는 건 아니죠!’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오빠를 논클리셰로부터 구해야 하지 않느냐!>

다급한 음성에 뒤늦게 정신 차린 라라는 수술용 턱받침을 내던지고 수술실을 벗어났다.

‘그렇지만, 만약 여주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남주인 황제가 여기에 도착했다는 건 이미 확실하지 않느냐? 이대로 클리셰를 날려버릴 순 없느니라.>

황제? 라라는 갸웃하다가 방금 그 남자를 떠올렸다.

황제 폐하가 이곳에 있다는 건, 여기에 함께 온 그는 역시 폐하를 가직한 곳에서 보필하는 자라는 것일 테다. 제 추측이 들어맞음을 확신한 라라는 그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했다.

<어차피 위험에 처해도 남주가 구해줄 것이니라. 안전 장비가 다 돼있는데 뛰어내리길 두려워하는 꼴이니라. 그냥 눈 딱 감고 저질러 버리거라!>

계속해서 이어지는 설득에 라라는 결국 여주를 일부러 해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마 사건의 중심지인 노예 경매장으로 엘리나2를 데려가면 무슨 위험이든 처하게 될 것이다.

대기실에서 한가롭게 잡지를 읽고 있을 엘리나2를 끌고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지만 막상 도착한 대기실 안은 텅 비어있었다.

‘대체 어딜 간 거지……?’

라라는 빠르게 방을 벗어났다. 다시 감옥으로 돌아오자 모든 감옥 안이 텅텅 비어있었다. 라라는 길게 이어지는 감옥 복도를 가로질렀다. 복도 끝에는 새로운 복도가 있었다.

복도 끝에 도착하자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타고 올라가 문을 열자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가 드러났다.

“경매 진행자와 경매에 참석한 자들 모두 잡아들였습니다. 노예로 잡혀 온 여성들 구출에도 성공했습니다.”

“남자와 어린아이들도 잡아 온 모양이던데, 그들을 가둔 감옥이 따로 있는 모양이야. 이거 원, 건물 구조가 미로처럼 복잡하다 보니 어디에 가둬놓은 건지…….”

멀지 않은 곳에서 굵직한 목소리들이 들려오자 라라는 벽 뒤에 숨어 그들을 훔쳐보았다. 기사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골치 아프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어떡하죠? 이미 현장 진압을 끝낸 상태인 것 같은데.’

<노예 경매는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뉘느니라. 여주인공이 팔리는 경우와 사는 경우다. 팔리는 경우는 여주인공이 납치를 당해 무대 위에 노예로 서게 되는 클리셰고, 사는 경우는 여주인공이 우연히 노예 경매에 참가해 미남자를 구해내는 클리셰이니라.>

‘그렇단 말은…….’

<잡혀있는 노예로 남주 중 하나가 있을 확률이 높다. 이것을 노려야 한다.>

어떻게든 기사들보다 먼저 엘리나2가 그 노예 남주를 구해야만 했다. 아니, 구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서둘러 몸을 돌린 라라는 기사들을 피해 구석으로 달렸다. 외진 곳이라면 뭐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기사들이 이미 수색을 마친 곳인지 모든 문이 열려있었다.

‘이렇게 쉬울 리가 없지.’

엘리나2도 없고, 노예 남주의 위치도 모르고, 막막할 따름이었다.

<라라여, 저 문이다.>

그때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만 오질나게 하는 줄 알았는데 쓸모가 있긴 한 모양이었다.

라라는 신이 알려준 문으로 들어갔다. 이미 기사들이 한번 헤집어 놓아 방은 아수라장이었다. 책들이 꽂힌 책꽂이와 반쯤 말려 올라간 양탄자, 넘어진 의자와 엉망이 된 책상 서랍. 라라가 방을 빙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책상 아래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

잔뜩 경계한 라라가 그곳을 돌아보자 책상 위로 불쑥 머리가 나타났다. 입고 있는 옷은 넝마가 아닌가 싶을 만큼 해져있었고, 그 사이로 섬세하게 짜인 근육들이 보였다.

완전히 몸을 일으킨 남자는 책상을 짚었다. 손은 웬만한 남자들보다 커다랬고, 손톱도 야수처럼 자라있었다. 잔뜩 헝클어진 금발 사이로 채도 높은 황금색 눈이 번쩍인 순간이었다. 남자가 책상을 타 넘어 제게 달려들었다.

“꺄아악!”

뒤로 발라당 넘어진 라라는 손에 잡힌 묵직한 것을 눈을 감은 채 휘둘렀다. 생존 본능에 의한 움직임이었다.

빠악, 하는 강렬한 소리가 울렸다. 눈을 뜨자 자신의 위에 허물어진 금발의 남자가 보였다.

<지금 남주한테 뭐 하는 짓이냐!!>

“저, 저, 저게 남주라고요?!”

<그러하다. 이름은 크리온. 대형견 포지션을 맡고 있는 남주이며, 종족은 아름답고 마법에 능숙한 드래곤이니라.>

라라는 자신의 손에 들린 두꺼운 책을 내려다보았다. 책 모서리에 묻은 피에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서, 섯, 서, 설마.”

산발인 금발을 물들이며 조금씩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신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허옇게 안색이 질린 라라는 파바박 뒤로 물러났다. 엉덩이가 쓸려 얼얼한 것 같았지만 왠지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남주를.

덜덜덜덜. 라라는 수전증 말기 환자처럼 손을 떨었다.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힘없이 떨어진 책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너…, 네가… 방금…….>

살인 순간을 목격한 목격자처럼 신의 목소리도 따라 떨렸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깊어질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때, 꿈틀하고 기적처럼 남주 크리온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사, 사, 살아있어요!”

<어서 구급상자를……! 저 찬장 밑을 살펴보아라. 어서!>

“아, 알겠어요!”

허둥지둥 몸을 일으킨 라라는 찬장 밑을 뒤지기 시작했다. 신은 신인 건지 정말 구급상자가 있었다.

라라는 크리온의 옆에 앉아 상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붕대와 알 수 없는 고약, 핀셋, 거즈 등 여러 가지가 들어있었지만 막상 뭐에 손을 가져가야 할지 몰랐다.

붕대를 꺼내든 라라는 무작정 크리온의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출혈을 멈추기 위해 그저 온 힘을 다해 꽉 머리를 조였다. 엉터리 실력에 크리온의 머리카락이 붕 떠서 이마가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지미 뉴트론도 아니고, 그게 무엇이냐! 멋이 하나도 안 살지 않느냐!>

‘지금 멋이 중요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패션 붕대로 감는 거였는데. 라라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 크리온의 황금색 눈썹이 움찔 떨렸다. 드래곤답게 회복력이 빠른 것이다.

<잠깐! 아직 눈을 뜨면 안 되느니라!>

‘네? 왜요……?’

<남주에게 있어 처음 도와준 상대는 중요하다. 마치 새끼 강아지가 처음 눈을 떠 본 상대를 어미로 인식하여 따르는 것처럼, 처음으로 자신을 치료해 준 여주에게 반하게 되는 것이니라. 지금 눈을 뜨면 라라 너를 따르게 될 것이 뻔하다!>

‘그, 그럼 어떡해요!’

라라가 허둥지둥하는 사이, 크리온이 눈을 반쯤 뜨고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라라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잡힌 것으로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크리온의 몸이 다시 허물어졌다.

‘꺄아아아아악!’

다행히 이번은 피가 나지 않았지만 라라는 슬슬 자신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손이 마구 떨릴 때 문밖에서 낮은 발소리가 울렸다.

“방금 여기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거기! 무슨 일이십니까?!”

기사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소리를 내질렀다. 바닥을 적시고 있는 다량의 피와 쓰러져 있는 남자, 그리고 손을 떨고 있는 여자. 그때 여자가 홱 머리를 돌려 외쳤다.

“빨리요!! 아무나 빨리 엘리나 공녀를 데려와 주세요!!”

다급한 외침에 기사는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서둘러 방을 빠져나가 엘리나 공녀를 찾기 시작했다. 그동안 라라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흔들리는 동공으로 크리온만을 내려다보았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눈뜨면 다시 기절시키고, 다시 일어날 기미를 보이면 기절시키고. 잔인함에 익숙해지는 자신이 싫었다. 손이 무감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라라가 다섯 번 정도 이 일을 반복했을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며 그토록 보고 싶었던 엘리나2인지 엘리나3인지가 등장했다.

“라라? 이게 무슨 일이야?”

“찾았는데 대체 어딜 갔던 거야!”

“잠깐 화장실에.”

‘아니, 우리 납치됐다는 자각은 있니……?’

혼란스러운 눈길로 엘리나2를 봐주다가 라라는 다시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때마침 와줘서 다행이야. 어서 와서 이 사람 좀 봐줘!”

마치 위급 환자를 눈앞에 두고 살리기 위해 분발하는 의료진 같았다. 엘리나2는 피가 묻은 붕대를 보며 “이렇게 심한 짓을 하다니……. 노예상 놈들.” 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라라는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실피드, 내 목소리가 들리면 나와줘.”

사악한 주술의 힘이 풀렸는지 곧 방 안에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그 뒤로 엘리나2의 혼잣말이 이어졌다.

“이 사람을 말끔히 치료해 줘. 그리고 노예상 놈들을 잡아서 똑같이 만들어 주든가 해야겠어. 아니, 그럴 필욘 없어. 나한테 다 생각이 있거든. 이번 한 번만 봐줄 수 있잖아! 젠장, 눈에 먼지 들어갔잖아! 아, 알겠어. 미안해. 미안하다고!”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정신과 상담이 시급해 보일 모습이었다. 정령왕과 얘기를 마친 건지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닥쳤다. 바람은 크리온의 머리를 감싸더니 곧 붕대가 스르륵 풀리며 그 사이로 스며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