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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12)화 (12/115)

12화

만약 들어가자마자 살인마와 눈이 마주치면 어떡하지? 토막 난 시체가 널려있다면? 피만 봐도 속이 울렁이는데 비위 약한 자신이 그곳에 제정신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아마 기절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라라는 슬쩍 문을 밀어 발을 들이밀었다. 안에서는 아까의 그 살인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너무 작아 뭐라고 하는진 알 수 없었다.

슬금슬금 숨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피가 튄 하얀 커튼이 보였다. 언제라도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커튼 끝을 쥐고 젖히자 녹색 수술대가 나타났다. 다리 하나 잘리고 없는 남자의 시신이 누워있을 거라 여긴 것과는 달리,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은 남자가 편히 누워있을 뿐이었다. 양약 수술을 받은 남자 노예였다.

“여기 이 부분이 약간 콤플렉스인데 살짝만 깎아낼 수 있나요?”

“당연히 가능하지. 클클……. 이래 봬도 성형외과만 30년째 운영하고 있다고.”

안쪽 방에서 엘리나2와 살인마, 아니 성형외과 전문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노예를 팔기 전에 노예의 외모를 업그레이드시키는 작업이 이 감옥에서 이뤄지고 있던 것이다.

확실히 피가 많이 튀어서 그렇지 바닥 타일이나 벽지, 수술대 주변 상태를 보아 생각보다 청결하게 관리되는 곳이었다.

클리셰대로라면 미치광이의 잔인한 인체 실험이었을 텐데 다행히 논클리셰가 저희를 살린 것이다.

성형외과 전문의는 엘리나2에게 성형 전, 후 사진이 담긴 팸플릿을 보여주었다. 준수하다는 느낌을 주는 노예들의 외모가 화려한 미남미녀로 변한 걸 보니 상당히 실력 있는 곳 같았다. 어쩐지 감옥 안에 미녀들이 널려있다 싶었다.

<이럴 수는 없느니라. 심각한 생명의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면 남주가 구하러 오는 의미가 없는 것을…….>

‘이미 논클리셰가 점령한 거 어쩌겠나요. 제가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요? 호호홋.’

쌤통이라고 대놓고 말하진 않았으나 라라의 과한 웃음소리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여야지요? 안 그런가요?’

신의 말을 인용한 라라가 얍삽하게 문을 열고 상담실로 들어섰다.

“내가 대신 성형할게요. 그러니 내 친구를 놓아줘요……. 미안해, 엘리나2. 네 얼굴에 칼을 대는 건 차마 볼 수가 없었어. 나 이렇게라도 너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라라……. 맞아. 넌 좀 해야 돼.”

엘리나2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며 작게 수긍했다. 옆의 의자를 꺼내주자 라라는 다소곳하게 앉아 용건을 말했다.

“아무튼, 친구보다 먼저 상담받고 싶은데요.”

“누가 멋대로 들어오라고 했어? 안 그래도 손이 많이 갈 것 같아서 나중에 하려고 미뤄뒀건만. 얘가 살짝만 다듬는 수준이라면, 너는 아주 갈아엎어야 돼.”

“호호, 농담도 심하셔라! 가, 갈아엎다니 참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가는 게 느껴졌으나 라라는 애써 당당한 척 목소리를 드높였다. 속으론 이미 울고 있었지만 차마 머릿속에서 깔깔대는 신의 웃음소리에 눈물을 보일 순 없었다.

그렇게 남주는 오지 않고, 성형 견적 상담이 진행되었다.

“어디 보자. 얼굴형은 둥근 편인데 입술은 작고, 콧대는 높지 않은 편이고, 얼굴 비대칭이 살짝 있는 것 같네. 그나마 눈이 적당히 큰 편인데 평범해서 특별히 인상을 심어줄 정도는 아니네.”

남의 얼굴에 삿대질하며 성형 전문의는 화려한 말발을 선보였다. 라라는 전부 옳은 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왠지 들으면 들을수록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 거울을 보며 딱히 못난 얼굴이라고 생각한 적 없고 적당히 예쁜 편이라 여겼는데 이렇게 전문적으로 분석을 당하니 정말 심각하게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밋밋해서 어디 가도 눈에 띄지 못하겠고. 이거이거, 너무 평범한 상이라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네.”

무도회든 어딜 가든 주목받지 못하고 엑스트라 1이 되고 마는 현실이 전부 외모 탓으로 느껴졌다. 라라는 비장한 톤으로 말했다.

“저 선생님만 믿을게요.”

“일단 여기다 사인을 하고.”

수술 동의서를 작성하기 무섭게 라라는 수술대에 올랐다. 턱받이를 해준 성형 전문의는 소독약을 묻힌 수건으로 제 얼굴을 박박 닦아내기 시작했다. 알싸한 냄새 뒤로 약간 고리타분한 냄새가 얼굴 위에 남았다.

‘발 닦는 걸레 아니지……?’

물론 단박에 의심을 접은 라라는 무한 신뢰를 담은 눈으로 성형 전문의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화가처럼 라라의 얼굴에다 능숙하게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턱을 갸름하게 돌려 깎고, 여기 광대뼈도 부각되는 게 흉하니까 좀 깎고, 이왕이면 웃을 때 보기 좋게 보조개도 만드는 게 좋겠고. 그리고 앞트임, 뒤트임은 당연히 들어가야 되겠고, 코에 보형물을 넣어서 미인 코 각도를 만들면 훨씬 낫겠네.”

“네, 네, 그렇게 해주세요. 저 진짜 선생님만 믿을게요. 다시 예쁘게 태어나고 싶어요…….”

<신은 믿지도 않으면서 기적을 바라는구나, 쯧쯧. 그냥 안 하는 게 어떻느냐? 딱 봐도 불법 시술 같은데.>

아까의 말다툼의 앙금이 사라지지 않은 건지 신은 틱틱거리며 말했다. 조금 걱정되어 하는 말이었으나 라라가 듣기엔 전혀 아니었다. 자기에게 시비를 건다고 생각해 속으로 구시렁댈 뿐이었다.

‘엑스트라는 개인 만족도 못 하나……. 진짜 치사하고 드러워서.’

자신은 여주처럼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를 더 사랑하고 싶을 뿐, 외모에 자신감을 가지고 싶을 뿐이었다. 마취 효과가 있는 풀을 씹으며 라라는 긴장 반, 설렘 반의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수술이 진행되려던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문이 벌컥 열리고 그 사이로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기사들의 출현에 성형 전문의는 손에 든 메스를 떨어뜨렸다. 라라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휘둥그레 눈을 떴다가 뒤늦게 남주의 등장 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쉬엄쉬엄 걸어서 왔나?! 여주는 진작에 뒈지고도 남았겠다……. 올 거면 제때 오든가, 중요한 순간에 찾아올 게 뭐람.’

지각한 남주를 탓하며 라라가 뚱하게 수술대 위에 앉아있을 때, 기사들은 서둘러 성형 전문의를 붙잡아 바닥에 꿇어앉혔다.

“꼼짝 마! 불법 시술 혐의로 체포하겠다!”

“억울하다……! 부작용도 한번 없었고 의료 도구도 매일 세척하는데!”

“아직까지 피해 사례가 없다 해도 공식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시술이란 점은 변하지 않는다.”

라라가 벌떡 상체를 일으킬 때였다. 멀리서 뚜벅뚜벅 정갈한 발소리가 울리더니 이윽고 기사들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왔다.

그는 라라도 아는 이였다. 윤기가 흐르는 검자줏빛 머리 아래 남자의 넓은 어깨가 드러났다. 눈을 날렵하게 뜬 채 사위를 둘러보던 카를라히가 라라의 앞에 선 기사와 눈을 마주치고 빠르게 다가왔다.

그 존재감이 어찌나 대단한지 묵직하고 차가운 분위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기사가 즉각적으로 보고를 올렸다.

“납치한 영애를 상대로 강제로 불법 시술을 하려던 자입니다. 처분을…….”

“강제로 받는 거 아녜요!”

우스꽝스럽게도 초록색 턱받이를 하고 라라는 성형 전문의의 앞을 막아섰다.

“의느님은 아무 잘못 없어요. 제가 증명해요.”

카를라히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멀리 있던 기사가 뛰어와 그에게 보고했다.

“위층에서 노예 경매가 진행되는 모양입니다.”

“이곳은 됐으니 먼저 가서 경매에 참가한 자들을 검거하라.”

“네!”

기사들에게 명령하는 그를 보며 라라는 눈을 예리하게 치떴다. 공작저 무도회에서도 느꼈지만 신분이 높은 자가 분명했다.

‘그러니까 겁도 없이 폐하를 사칭하고 다니지. 황제 직속 근위대의 부단장쯤 되려나? 검을 찬 걸 보면 기사는 맞는 것 같은데…….’

라라는 진지하게 추측을 끝내고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여주, 아니 엘리나2 구하러 온 거면 저깄을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풀어주시고 다른 볼일 보세요. 전 계속 수술받을 거니까.”

대기실이라고 써진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인 후 라라는 다시 수술대 위에 누웠다. 바닥에 넙죽 엎드려 덜덜 떨던 성형 전문의가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카를라히가 느릿하게 걸음을 뗐다.

“왜 이런 위험한 일을 하려는 거지?”

“그쪽은 충분히 잘생겼으니까 이해할 수 없겠죠. 저 같은 경우엔 이목구비가 밋밋하다고요. 부모님이 물려주신 소중한 얼굴 블라블라할 거면 신경 끄고 여주나 찾으러 가세요.”

“예쁘다는 건 주관적인 게 아닌가?”

“주관적이래도, 대중이 선호하는 미의 기준이라는 게 있잖아요. 얼굴 작고 눈은 크고 코도 오뚝한 그런 거요.”

라라의 말에 카를라히는 그녀의 옆에 선 채 가만히 턱을 문지를 뿐이었다.

“확실히 그런 얼굴도 매력적이지. 하지만 지금 모습은 귀엽지 않은가?”

귀여워 보인다. 그 말이 라라의 심장에 단박에 꽂혀 들어왔다. 평소라면 식상하게만 들렸을 칭찬일 텐데, 인생 처음으로 외간 남자의 입을 통해 들어서인지 심장이 작게 뛰었다.

‘왜, 왜 이러지.’

자신의 남자 친구는 어디까지나 로브신사였다. 비록 2D라서 두께가 얇긴 하지만 제 모든 로맨스적 환상을 이뤄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쪽이 대체 뭔데… 저한테 귀엽다느니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라라는 도도한 한 송이의 장미를 흉내 내며 말에 가시를 세웠다.

“불쾌하게 들렸다면 미안하군.”

순순히 사과하는 남자의 태도에 라라는 조금 누그러진 듯 턱을 들었다.

그 새침한 모습을 바라보던 카를라히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그녀의 얼굴에 그려진 조잡한 밑그림 때문이었다.

“아무튼 굳이 남들 때문에 변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보면 볼수록 매력 있는 얼굴이라.”

라라는 자신의 얼굴에 스케치가 되어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헤벌쭉해졌다. 그러다 번쩍 정신을 차리고 우아하게 손을 들어 부채 대신 입을 가렸다.

“흐, 흥.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도 제가 예쁘진 않아도 매력적이란 것 정돈 알고 있거든요? 그렇게 띄워주지 않아도 원래부터 성형은 할 생각 없어서…….”

‘내가 매력적이라고……? 보면 볼수록 매력 있다고? 세상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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