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11)화 (11/115)

11화

거대한 뱀의 형상은 대기에 흩어졌으나 그 치명적인 마비 독은 엘리나3의 전신을 야금야금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엘리나3은 흔들거리는 시야가 곧 기우뚱 무너짐을 느꼈다. 동시에 제 몸도 허물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챙그랑,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무릎을 꿇은 엘리나3은 서서히, 힘겹게 라라를 돌아보았다.

‘너 설마… 나를 믿고 그렇게 나댄 거였니?’

뒤를 부탁한다고 얘기한 은색 눈동자가 바르르 떨리며 감겼다. 라라는 이 뒤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엘리나3!”

엘리나2가 무뢰배 대장의 품에서 거칠게 벗어나 차가운 뒷골목 바닥에 쓰러진 엘리나3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무뢰배들에게 목덜미를 맞고 기절했다.

‘대, 대체 어떻게 해야…….’

하얗게 질린 라라가 제자리에서 발발 떨고만 있을 때, 무뢰배의 대장이 라라를 스윽 돌아보았다. 탐욕스러운 눈동자가 다음 타깃을 발견해 번들거리나 싶더니 이내 무관심 속에 푸욱 꺼졌다.

“가자. 네놈들은 이년들 안고 따라와라. 오랜만에 손에 들어온 상등품들에 상처가 나면 안 되니까.”

이대로 가면 엘리나들을 놓칠 게 분명했다. 라라는 주춤주춤 그들을 뒤쫓아 갔다.

‘…신이시여, 저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되나요……?’

<클리셰대로 잘 진행되고 있으니 놔두면 되느니라. 이렇게 노예 시장에 끌려가 경매에 오르고, 거기서 새로운 남주를 만나게 될지니.>

‘그, 그래도요! 만약 논클리셰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그렇게 걱정이 되면 너도 납치당해서 함께 따라가면 되는 일이니라. 물론 쟤네는 너를 납치할 생각은 1도 없어 보인다지만. 풉.>

‘이 신이 진짜, 말이면 단 줄 알아요!’

라라는 발끈하며 일부러 발소리를 더 크게 냈다. 이에 맨 뒤에서 걸어가던 부하가 힐끔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철저히 무시를 당한 기분이었다. 굳이 납치할 만큼의 가치가 없는 엑스트라라 이건가. 약간 기분이 상한 라라는 레이디 축지법을 사용해 그들을 앞질러 갔다. 그리고 험악하게 생긴 두목과 마주했다.

“…얜 또 뭐야?”

아까 봐놓고서 이제 처음 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라라는 조금 고마웠지만 차별 대우에 약간 속으로 욱하게 되었다.

“저, 저는 왜 납치하시지 않는 거죠……?”

“노예 상품도 등급이라는 게 있는 거야, 아가씨. 우리도 물건을 경매에 부칠 때 수수료를 뗀다고. 근데 그쪽을 납치하면 남는 게 없어. 썩 저리 안 비켜!”

호통에 움찔했지만 라라는 눈물을 머금고 로브 안주머니에 있던 모든 돈을 끄집어내었다.

“이걸로 수수료 내면 되잖아요!”

“수수료가 문제가 아니라, 그쪽은 상품 가치가 없다니까 그러네.”

“저도 귀족 영앤데 왜요! 왜 사람 차별하고 그래요!! 속상하게……!!”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더러운 외모지상주의 세상. 그런 라라가 안되어 보였는지 두목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라라의 목덜미를 쳐 기절시켜 주었다. 라라는 행복한 꿈을 꾸며 그들에게 납치되어 갔다.

라라는 자신의 몸을 강하게 흔드는 손길에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아른거리는 시야 속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엘리나2……? 엘리나3……? 그것이 문제로다. 라라가 마른 입술만 달싹일 때 약간 발랄한 톤의 음성이 들려왔다.

“정신이 들어? 휴, 다행이다.”

어깨를 쥔 손을 내리며 엘리나2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납치됐었어. 기억나?”

“으응.”

라라는 그녀의 눈을 외면한 채 대답했다. 그래, 납치당한 건 당한 거니까. 거짓말은 아니잖아, 애써 양심에 대고 변명하며 말이다.

현재 끌려와 있는 곳은 노예를 가두는 감옥인 것 같았다. 복도를 사이에 둔 반대편에도 감옥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는데 그 안에는 하나같이 미녀뿐이었다. 엘프, 인어, 수인족 등 종족도 다양했다.

은발에 은색 눈을 가진 진정한 여주 외양의 엘리나를 이길 자는 이 세상에 없겠지만, 그녀들도 여주 못지않게 절세미인들이었다. 라라는 칸을 나눠 차별하지 않고 이 특등 반열에 함께 있을 수 있게 배려해 준 두목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근데 라라, 엘리나3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기억나? 엘리나3이 보이지 않아! 분명 검을 뺏겼을 텐데, 아, 어떡하지? 별달리 연락할 방법도 없는데!”

“일단 진정해 봐. 정령왕들은 아직도 자고 있어?”

“그게 소환이 되지 않아. 원래 서로의 마음속을 공유하기에 언제 어디서든 불러낼 수 있는데…, 무슨 사특한 주술을 건 게 틀림없어.”

엘리나2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갑자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되자 라라는 바로 신을 탓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대책 없이 클리셰만 믿고 따라왔다가 상황만 악화됐잖아요!’

<시간문제이니라. 절체절명의 순간 남주가 구하러 와서 무사히 탈출하게 돼있느니라.>

“크아아아아악! 으아아… 아아아아악!!”

그때였다, 남자의 숨넘어가는 비명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뒤를 이어 톱으로 사람 뼈를 갈 때 나는 살벌한 소리가 들려왔다. 감옥 끝에 위치한 낡은 문에서 나는 것 같았다.

라라는 생각했다, 분명 저곳은 고깃간일 거라고. 팔려나가면 다시는 못 볼 노예들에게 맛있는 고기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직접 고기를 손질하고 요리하는 곳일 거라고. 그리고 저 비명 소리는 사람이 아닌 단순히 사람 비명과 비슷한 돼지 멱따는 소리일 거라고.

그리 굳게 믿는 순간 문 틈새로 검붉은 핏물이 천천히 흘러내려 왔다. 서로 어깨를 맞댄 라라와 엘리나2는 흰자가 더 많이 보일 만큼 눈을 홉떴다.

<말 취소이니라.>

얍삽하게도 신은 말을 바꿨다.

<원래 클리셰를 바로잡는 것은 너의 역할이다. 내가 못 해서 너에게 맡긴 일인데 내게 책임을 물으면 어떡하느냐? …여보세요. 아, 담당자님, 연령가를 19세로 바꿔야 될 것 같아서 연락드렸는데요. 아뇨, 야한 신은 아니고 내용이 좀 잔인해질 것 같아서…….>

그런 신의 예언은 적중했다. 낡은 문이 열리고 배불뚝이의 거구가 피가 묻은 망치를 들고 어슬렁어슬렁 복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라라는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억누르며 최대한 감옥 구석에 가깝게 붙었다.

“다음은 누구로 할까나. 클클…….”

‘살려줘어어!!’

도망치기 위해 엘리나2와 앞다투어 쇠창살을 움켜쥐었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 발랄하던 개그캐인 엘리나2가 패닉에 빠져 팔만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여주 상태 이상해졌잖아요!!’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질끈 베어 문 라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클리셰를 바랐다. 남주가 빨리 구해주러 와주지 않는다면 로판 최초로 여주 토막 엔딩을 보게 될 테다.

<라라여, 네 차례이니라.>

‘뭐, 뭐가요?’

데드 플래그를 세우는 말에 흠칫 돌아본 순간 쇠창살 바로 너머에 서있는 거구와 눈이 마주쳤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거구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세 겹으로 접힌 턱과 목에는 자잘하게 튄 피가 굳어있었다.

“너희 둘로 정했어. 자, 누구 먼저 시작할래?”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라라는 엘리나2를, 엘리나2는 라라를 돌아보았다. 누가 먼저 살인마의 손에 잡혀 도살장으로 끌려갈 것인가, 죽음의 눈치 게임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3초도 지나지 않아 살인마의 손이 엘리나2의 가는 손목을 붙잡았다.

“아악! 이거 놔! 실피드!!”

위기에 몰린 여주의 절박한 비명이 감옥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놀란 라라는 덜덜 떨리는 몸을 절로 움츠러뜨렸다.

<지금이다. 울먹거리되 마음을 다잡은 듯이 비장한 투로 따라 말하거라. ―내가 대신 갈게요. 그러니 내 친구를 놓아줘요……. 미안해, 엘리나2……. 나 이렇게라도 너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왜요……? 제가 왜 나서요……?’

<엑스트라의 희생만큼 눈물 나는 장면도 또 없느니라. 그러니 그 한 몸 던져 여주를 살려내는 감동적인 클리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이 신이 진짜…….’

반발이 거셌지만 신은 꿋꿋하게 주장하였다.

<죽는 게 두렵고 삶에 미련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살아야 하는 건 친구인 여주라고 생각하기에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엑스트라라니, 얼마나 바람직하느냐.>

‘친해진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무슨 내 목숨을 대신 포기해요! 그리고 사람 목숨 가지고 저울질하지 마세요. 신이 돼서 못 하는 말이 없어, 정말!’

<너는 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엑스트라로서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이래도!>

‘솔직히 이런 건 여주가 솔선수범해야죠!’

<여주가 죽으면 이 세계는 끝나는데 솔선수범은 개뿔이니라.>

‘이니라만 붙이면 다 신처럼 자애롭게 들릴 줄 아나 보죠? 그 말투 엄청 거슬리거든요. 흥.’

콧대 높은 새침한 아가씨처럼 라라는 천장을 향해 고갤 돌려버렸다.

<넌 독자들에게 기억되고 싶지 않느냐? 물론 엑스트라 친구 이름 따위 금방 잊히겠지만, 그런 착한 애가 있었지… 하고 독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좋은 이미지로 남을 것이니라.>

‘그런 욕심 없어요. 세상 모든 사람이 그런 명예만 좇는 삶을 사는 건 아니라고요. 비록 이 세계의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나도 내 인생의 주인공이란 말예요! 소소하게 살다 갈 거란 말예욧!’

<아주 잘났느니라.>

말대답을 하면서 조금 긴장이 풀린 라라는 그제야 주위가 눈에 들어왔다. 엘리나2가 어디 갔지? 이미 엘리나2는 낡은 문으로 끌려 들어간 지 오래였다.

‘꺄아아아악! 어떡해애애!’

라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제 목숨 귀한 걸 알기에 여주를 대신해 개죽음을 택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여주가 죽는 걸 두고 볼 수만도 없었다.

창살문 앞으로 가 어떻게 하면 열 수 있을지 고민에 잠겼다. 그러던 중 문틈이 살짝 열려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엘리나2를 끌고 가는 데 급급한 나머지 자물쇠를 제대로 잠그지 않은 모양이었다.

쇠창살 사이로 손을 통과시켜 걸쇠를 살살 밀어내자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문을 나서는데도 다리가 다 후들후들거렸다.

이대로 도망칠까 하는 생각이 수백 번은 들었지만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한 걸음씩 나아갔다. 핏물이 고인 낡은 문 앞에 멈춰 선 라라는 꿀꺽 침을 삼켰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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