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저기 엘리나―”
“난 2야. 한 번 본 적 있지? 그냥 엘리나2라고 불러줘!”
“어떻게 두 사람 다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보다 아까 그 바람은 대체 뭔가요?”
“편하게 말 놔도 돼. 엘리나3의 친구는 나에게도 친구니까!”
‘뭐지…, 이 청춘우정물 같은 대사는.’
라라의 심오한 표정을 읽은 것인지 맞은편 소파에 앉아있던 엘리나3이 담담하게 설명해 주었다.
“엘리나2는 정령왕과 친구거든.”
“실피드에게 부탁하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몰라. 이렇게 인상을 팍 쓰고서, 내가 왜 인간 따위를 날라야 되지? 하고 말하는데……. 윽, 밖에서 엄청 째려보고 있다.”
‘정령왕?! 그런 게 이 세계에 존재했어? 언제?!’
라라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엘리나2는 난감해했다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 귀를 막는 등 다양한 행동과 표정을 보였다. 좀 미친 사람 같았다.
엘리나2는 엘리나3과는 다르게 쾌활하고 친화력이 좋은 성격인지 굳이 묻지 않았는데도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을 어떻게 탈출시켰는지에 관한 얘기였다.
“땅의 정령왕 노아스가 감옥 벽에 구멍을 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줬어. 그 뒤에 불의 정령왕 샐리온이 쇠창살을 녹여서 구부러뜨렸고, 최종적으로 엘리나3이 너를 꺼냈다는 말씀! 믿음직스럽지? 얘가 할 때는 한다니까?”
다 된 밥에 엘리나3 뿌리기나 다름없었다. 라라는 이 이상 알고 싶지도, 알아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얼른 방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다들 고마워요. 아니, 고마워.”
“아니야, 아냐.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이 정도뿐이라서 미안한걸.”
“라라, 일단 이 옷으로 갈아입어.”
엘리나3이 내민 상자 안에는 심플한 드레스와 구두가 들어있었다. 미안함에 이런 깜짝 선물을 준비한 건가 싶자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라라는 군말 없이 기사 제복을 벗고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가발을 벗으니 정수리가 시원했다.
“그동안 친구로 지내줘서 고마워. 네가 계속 생각날 거야.”
엘리나3의 진지한 말투와 흐릿한 미소가 아니었다면, 아마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을 테다.
“갑자기 웬 인사니……? 호호.”
“신분을 만들어 두었으니 오늘 새벽에 출항하는 배를 타고 떠나.”
“갑자기 그게 무슨……. 호호…….”
“상대는 에스테반 공작가야. 우리로선 너를 지킬 방법이 이것밖에 없어. 그러니 뒷일은 맡기고 최대한 이 제국에서 멀리 도망치는 거야.”
‘나 그냥 자작 영애로 돌아가면 끝날 일이고! 아니, 것보다 똥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 해?’
스케일 크게 노는 주인공들 아니랄까 봐 자신을 멀리 보내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리나 보다. 짜증이 났지만 라라는 애써 우아한 미소로 위장했다.
“이만 내려도 될까? 호호…….”
“우린 널 이곳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뭐든 할 거야. 그러니까 믿어줘.”
‘너부터 나를 믿어!! 내가 안 쌌다고!!’
자신을 진정한 똥튀로 만들 작정인 것 같았다. 잠깐, 정말 탈출을 감행했으니 자신이 똥 싼 범인이라는 걸 인정하는 꼴이 아닌가. 라라는 혐의에서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유력 용의자로 선고받은 것 같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 이 마차 세워! 마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마차 천장도 두들겨 봤지만 마차는 멈출 줄을 몰랐다. 역시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여주였다. 두 명의 여주가 뭉쳤을 뿐인데 일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렸다.
수도 외곽에서 벗어난 마차는 구불구불한 산맥을 지나 웬 영지로 들어선 후 한참을 더 달려 나갔다. 한 번도 수도 밖으로 나와본 적이 없는 라라는 창가에 붙어 앉은 채 한 줄기 눈물을 흘려보냈다.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지 마…….’
스펙터클한 밤이었다.
* * *
이른 아침부터 기사단 지하 감옥은 소란스러웠다. 죄인 하나가 탈출을 한 것이다. 디체스는 출근하자마자 연락을 받고 곧장 지하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리니엇 공작가와 슈모르드 자작가에서 실종 신고가 접수됐습니다. 영애분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고…….”
부단장이 옆에 따라붙으며 급히 보고를 올렸지만 디체스의 온 신경은 이제 막 도착한 지하실에 쏠려있었다. 그는 창살 주변을 한번 살핀 뒤 구부러진 창살에 시선을 가져갔다.
“외부에서 끊은 것 같습니다.”
미리 조사를 마친 기사가 뒤에서 보고했다. 평소라면 한 번의 끄덕임을 보였겠지만 디체스는 인내심을 잃은 사람처럼 감옥 안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입 기사의 두 팔을 묶어놓았던 끈이 끊어져 있었다. 감시를 붙여놓았어야 했다. 자신이 한눈을 판 사이에 이런 괘씸한 짓을 벌이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내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희미한 중얼거림이 가느다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옆에 선 부단장은 그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신입 기사, 행운을 비마.’
가정의 대소사 참견은 물론 휴일에도 연락하는 상사가 바로 디체스였다. 부디 무시무시한 상사의 집착으로부터 도망쳐 무사히 새 직장에 이직하길, 그는 조용히 기도했다.
* * *
사건의 중심이 여주라서 감사한 적은 처음이었다. 다섯 시간을 꼬박 달려 제국 서쪽 항구에 도착한 라라는 꼼짝없이 배에 오르게 생겼었는데, 출항 직전에 사라져 준 엘리나2 덕분에 무사히 배를 떠나보낼 수 있었다.
“…어디로 간 거지.”
초조해하며 골목을 누비는 엘리나3과는 달리 라라는 마음이 유독 평온했다.
배를 타고 나가 국제 미아가 되는 일을 면했으니 오죽 안심이 될까. 엘리나2가 평범한 엑스트라였다면 걱정됐겠지만 여주인공이란 걸 아니 딱히 걱정이 되지 않았다.
늘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이 여주였다. 이왕 사라져 준 거 다른 배들이 모두 떠나간 뒤에 천천히 돌아왔으면 했다.
“…그거 들었어? 요즘 이 마을에 장기 매매가 극성이라네.”
“…어휴, 아직 못 돌아온 처자가 154명이라면서?”
숙덕숙덕 길거리에서 떠드는 사람들의 말이 들려왔지만 라라는 의연한 태도로 생각을 이어나갔다.
실종된 여주는 어떻게든 무사히 돌아오게 되어있었다. 보나 마나 이 실종도 남주와의 극적인 만남을 위한 장치일 것이다.
“…여기가 부둣가라 그런지 다른 곳보다 흉흉한 사건이 더 많이 일어나나 봐. 내가 듣기론 그런 실종 사건만 올 들어 154건이래.”
“…그럼 154명의 처자들은 다 어디로 간 겨?”
“…간 빼고, 쓸개 빼고, 콩팥 빼고, 그걸 어디다 쓸지는 몰라도 아무튼 마구잡이로 빼간다던데.”
애초에 그녀의 곁에는 정령왕이 네 명이나 붙어있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자신보다 훨씬 안전했다.
“…저번에 왜 정령술사인 여자가 이 마을에 놀러 왔다가 실종된 뒤 다섯 시간 만에 변사체로 발견됐는데, 글쎄 간도 없고, 쓸개도 없고, 콩팥도 없고…….”
“꺄아아악!!”
라라는 필사적으로 달려야만 했다.
만약 이번에도 클리셰가 작용 안 한다면? 논클리셰의 힘이 여기까지 미쳤다면? 남주와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장기 매매 엔딩으로 끝난다면? 여기까지 생각하자 식은땀이 비 오듯이 쏟아져 내렸다.
왠지 다 자기 책임 같았다. 비록 5분이라지만 5분 동안 태평히 생각에 잠겼던 과거 자신의 뺨을 올려붙이고 싶었다.
“뭘 좀 알아낸 거야?”
엘리나3은 라라가 대체 무엇을 보고 저렇게 달려가나 싶어 묵묵히 친구의 곁에서 따라 뛰었다. 점점 으슥해지는 골목의 풍경에 엘리나3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였다. 골목 모퉁이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흐느낌에 엘리나3은 라라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쉿 하고 주의를 주며 휘청거리는 라라를 잡아주었다.
“혹시 모르니까 넌 남아있어.”
그렇게 말한 엘리나3은 빠르게 발검하며 모퉁이 너머로 뛰어 들어갔다.
왠지 불량배가 자주 출몰할 것 같은 뒷골목이었기에 라라는 걱정이 돼서 모퉁이 너머로 슬쩍 눈만 내밀었다. 멀지 않은 곳에 무뢰배에게 둘러싸인 엘리나2가 보였다. 그리고 엘리나2를 구출하기 위해 홀로 뛰어든 엘리나3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차 안에서 남장 가발을 벗고 온 탓에 엘리나3의 긴 은빛 머리칼이 허공에서 물결쳤다. 아무리 화장을 지우고 제복을 입었다 해도 딱 봐도 곱상한 귀족 여식이었다.
역시나 그녀를 무시하는 대사가 골목 안에서부터 쩌렁쩌렁 들려왔다.
“이런 누추한 곳에 귀족 아가씨가 두 명이나 굴러들어 오다니 말이야. 뭣들 해, 저년 안 잡고.”
“무기를 들고 있는데 어떻게 접근하란…….”
“상대는 여자 하나잖아! 검도 제대로 못 휘둘러서 휘청거릴 여자 상대로 쫀 거냐?”
자기 얘기에 라라는 뜨끔했다. 다행히 엘리나3은 걸크러시 타입의 여주였다. 그동안 쌓아 올린 검술 내공으로 무뢰배들이 자신들의 경솔한 발언을 후회할 정도로 아주 혼쭐을 내줄 것이다.
“엘리나3, 조심해! 이 녀석은 단순한 폭력배가 아니야! 정령왕들도 잠재워 버린 흑마술사로 제국 흑마술 재단에서 인재로 선정된 후 세계 흑마술 대회에서 56개의 상을 거머쥔 대단한 실력자야!”
‘뭐야, 그 엄청난 스펙은……! 것보다 걔들 스펙을 어떻게 알아낸 건데?’
그 순간이었다. 고개를 젖히고 웃던 부하들 중 한 명이 갑작스레 “커헉!”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그 뒤를 이어 옆에 있던 부하가 배를 파고드는 둔중한 검집에 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두 명을 해치운 엘리나3은 아까의 엘리나2의 충고를 듣긴 한 건지 막 나갔다.
“당장 엘리나2를 놔줘.”
“네년…….”
“난쟁이 똥자루 같은 게 자기랑 5센티밖에 차이 안 나는 여자를 납치해서 떵떵거리고 싶은 건가, 슈퍼 루저.”
“힘을 쓰지 않으려 했더니 안 되겠군!”
‘안 돼! 엘리나3, 도발하지 마! 네가 발린다고! 스펙 차이가 어마어마하다고! 쟨 세계 챔피언급이라고!!’
라라는 그녀를 말리기 위해 골목 안으로 들어갔으나 이미 무뢰배의 대장은 흑마술을 부리고 있었다.
골목 안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까만 뱀이 나타났다. 빠른 속도로 엘리나3에게 달려들더니 단번에 집어삼키길 듯이 쫘악 입을 벌렸다.
막아내기 위해 엘리나3이 검에 힘을 불어넣은 순간이었다. 검날과 맞부딪친 독니에서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검의 예리한 은빛이 먼저 잡아먹히고 그다음 엘리나3의 목 위로 퍼져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