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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9)화 (9/115)

9화

몇 시간이 흐른 걸까. 라라는 흐릿한 시선으로 은회색 철창을 바라보았다. 불편한 자세로 묶인 탓에 팔과 다리의 감각이 무감각해진 지 오래였다. 그에 반해 생존에 관련된 기본적인 욕구는 선명하기만 했다.

춥고 배가 고팠다. 지금쯤 부모님은 저택에 돌아오지 않은 자신을 걱정할 터였다. 오빠 새키는 스파게티나 끓여 먹고 있겠지……. 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그림이었다.

<정신을 차려 다행이구나.>

‘대체 제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죠.’

<여자 주인공과 엮이면 원래 피곤한 법이지.>

‘이것도 여자 주인공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아……. 그러고 보니.’

자신을 막아서던 작은 등이 떠올랐다. 설마 애초부터 자신은 그 똥폼을 위해 억울하게 희생당해야만 하는 포지션이었단 말인가, 소름 돋는 구조가 아닐 수 없었다.

<여주가 빛나기 위해선 주위가 어두워야 하는 법이란다. 온갖 고난과 역경이 휘몰아쳐 줘야 여주의 가치와 매력도 한층 더 선명해지는 것이다.>

‘오, 이런……. 내가 걸어 다니는 지뢰와 친구를 먹은 거였다니.’

자괴감에 라라가 몸서리를 치던 중이었다. 멀리서 철문이 열리는 기이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옅게 깔린 어둠 속에 샛노란 불빛이 나타남과 동시에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지 너그러우시다 못해 자비로우시단 말이지. 책상 밑에 응가를 싼 흉악한 범죄자에게 모진 고문은커녕 손가락 하나 다치게 하지 말라니 말이야.”

“그러게 말야. 칫. 마침 일어났나 보네, 저놈의 죄인 녀석.”

나이가 있는 간수였다. 그는 딱딱한 빵 한 덩이와 우유병을 감옥 안에 밀어 넣어주면서 모든 주름을 이용해 한껏 인상을 찌푸려 보였다.

“마음 같아선 공작 전하를 욕보인 네 녀석의 엉덩이를 인두로 지져버리고 싶지만, 우리에게 친히 내리신 명령 덕분에 하지 않는 거다.”

“저 억울해요! 제발 여기서 꺼내주세요!”

“억울? 우린 다 봤다! 네 녀석이 여기 끌려오면서 미친 듯이 웃던 모습을……. 악마 같은 녀석아, 이제 와 선량한 척 굴어도 우린 네 본모습을 알고 있다고!”

윽박을 지르자 놀란 라라는 그만 쾅, 하고 벽에 머리를 찧었다.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내는 라라에게 간수들은 잘됐다는 양 킬킬대 주다가 감옥을 벗어났다.

뒤로 묶인 두 팔을 풀지 못해 라라는 어정쩡하게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식판 위에 대충 던져놓은 것 같은 빵을 입에 물었다. 우걱우걱 먹다 그만 목이 막혀 컥컥거렸다. 우유병 입구를 막고 있는 나무 마개 때문에 마시지도 못하고 바닥을 뒹굴며 괴로워했다.

나름 자작 영애인데. 아……. 그냥 자작 영애라고 말할걸. 라라는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 * *

디체스는 현재 기사단 건물 뒤에 있는 후원에 도착해 있었다. 후원 입구에다 지려놓은 오줌이 따끈따끈한 상태인 걸로 보아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쫓고 쫓는 추격전은 이제 그만합시다. 아무리 더 도망쳐 봐야 어차피 그대는 내 손안에 있는 것을.”

피곤했다. 어서 빨리 제 품 안에 두어야 이 피로가 가실 것만 같았다. 디체스는 사무용 안경을 정장 포켓에 걸고는 예리한 눈길로 어둑어둑해진 주변을 훑었다.

발자취를 옳게 쫓아온 것이 맞는지 곧 거대한 수풀 너머로 무언가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왕왕!”

커다란 대형견이었다. 반가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인에게 달려든 녀석은 디체스의 어깨를 두 발로 짚고서 그의 턱 아래를 마구 핥아대기 시작했다.

“조니, 보십시오. 내게서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몸이란 걸, 그대의 몸이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좌우로 열렬히 흔들리는 꼬리를 내려다보며 디체스는 천천히 목덜미 아래를 쓰다듬어 주었다. 야릇한 손길의 끝에서 숨길 수 없는 소유욕이 묻어나왔다.

“내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까.”

“왕!”

“가소로운 생각을 했군요. 그대의 목에 걸린 이 목줄이 끊어지지 않는 한, 당신은 영원히 나의 소유입니다. 더는 내게서 달아나려 하지 마십시오. 무의미한 행위라는 걸 부디 똑똑히 깨달았기를.”

“왕!”

그렇다. 애완견 조니는 공작 저택에서 기사단까지 주인의 냄새만 맡고 뒤쫓아 온 것이었다. 멋대로 난입해 주인의 집무실에 응가를 싸고 튄 후 현재까지 정원에서 놀고 있었고 말이다.

“그대에게 어울리는 장소는 나의 집 안뿐입니다. 그곳에서 마음껏 지저귀십시오, 나의 작은 카나리아.”

자기만 한 개를 마치 손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작은 새처럼 부르며 디체스는 은밀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야 썩 만족스럽다는 듯이.

자신을 완벽히 소유하려는 주인의 품에 안긴 채 조니는 해맑게 헥헥거릴 뿐이었다.

“조니를 부탁하겠습니다.”

“단장님, 맡겨만 주십시오!”

기사에게 조니를 맡긴 디체스는 몸을 돌려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문을 지키고 있는 간수에게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감옥 밖에 등을 지고 서있는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빛이 감도는 고열사 가발 같은 은색 머리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에드가3 경.”

“아, 단장님 오셨습니까?”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목소리로 에드가3이 몸을 돌려 대답한다.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아닙니다.”

디체스는 에드가3이 감옥 안에 있는 라안이라는 신입 기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중이란 걸 알아차렸다. 자신을 빼놓고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한 건지 여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얘기 나누십시오.”

“하지만…….”

“괜찮습니다.”

부드러운 만류에 에드가3은 더 이상 고집부릴 수가 없었다. 디체스를 향해 있던 몸을 다시 돌려 철창 앞에 선 에드가3은 조용히 라안과 눈을 맞추었다.

“널 금방 거기서 꺼내줄게.”

“고마워, 에드가3……. 네가 처음부터 그렇게 항변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일이 커지진 않았을 텐데, 정말 고마워.”

“내게 고마워하지 마. 널 이렇게 힘들게 만들다니 난 친구 자격도 없어.”

에드가3은 차가운 쇠창살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평소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에 서툰 여주가 처음으로 진심을 내보인 순간이었다. 이 모습이 남주에게도 색다르게 보였는지 디체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조금만 기다려 줘.”

에드가3, 아니 엘리나3이 이마를 살짝 떼어낸 순간이었다. 옆에서 뻗어져 온 큼직한 손이 그녀의 짧은 머리칼에 닿았다. 마치 매만져 주는 듯한 부드러운 손길에 엘리나3보다 되레 라라가 놀랐다.

“가발 삐뚤어졌습니다. 좀 더 이렇게 정수리에 맞춰 쓰는 게 티가 안 날 겁니다.”

‘뭐야? 가발인 거 알아?!’

<그런 것 같구나. 드디어 로맨스가 나오려 하느니라…….>

남주만 엘리나3이 여자인 걸 모르는 줄 알았는데, 반전으로 엘리나3이 남장 중이라는 사실을 아는 모양이었다.

라라는 안도했다. 클리셰가 모두 파괴된 것은 아니구나 싶으니 조금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엘리나3의 가발을 고쳐준 디체스는 그대로 감옥을 벗어나기 위해 뒤돌아섰다.

“숨겨야 될 만큼 창피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디체스는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라라는 잠시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짓다가 곧 그 의미를 깨닫고 절규했다.

‘아니, 그거 아니라고……! 탈모 아니라고!!’

차고 딱딱한 바닥에 몇 시간 동안 누워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던 인간은 집으로 돌아갔는지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믿고 기다린 내가 잘못이지.’

하긴 엑스트라가 진짜 똥을 싸질렀는지 안 싸질렀는지를 궁금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다.

여주의 소중한 시간은 엑스트라의 누명을 벗기는 일보단 남주와의 로맨스를 위해 활용되는 것이 훨씬 이 세계에 이득일 테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떤 남주와 단둘이 오붓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몰랐다.

‘솔로인 것도 슬픈데……. 신이시여, 엑스트라에게도 짝이 있는 건가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신도 잠을 자는구나. 그래,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짙은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상황은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점점 졸리기 시작하자 라라는 자포자기 심정이 되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야겠네.’

누가 그랬던가. 포기의 다음 단계는 자기합리화라고.

‘그래, 차라리 자는 게 나아. 만약 지네라거나, 생쥐라거나, 바퀴벌레라도 나오면 혀 깨물고 죽어버릴 거야.’

혀를 깨물기도 전에 실신할 테지만 라라는 애써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삭막한 감옥에서의 하룻밤이 부디 무사히 지나가길 빌며.

밤하늘의 달이 가느다랗게 변한 깊은 밤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볼을 때리는 기분에 라라는 눈을 떴다. 눈앞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덩달아 숨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뭐지.’

꿈뻑꿈뻑 눈을 감았다 뜨는 동안 자신의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잠이 덜 깬 걸까. 라라는 몽롱하게 고개를 들기 무섭게 눈을 확 떴다.

밖이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오는 것까진 좋은데 자신의 몸은 무려 공중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사람의 키에서 두 배 정도 높은 위치에서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꺄아아악! 뭐야, 이게!!”

“쉿.”

아래에서 들려온 작은 목소리에 라라는 고개를 숙였다. 밑에서 힘차게 달리고 있는 엘리나3이 보였다.

“더 자도 괜찮아.”

‘너 같으면 더 자겠냐?!’

라라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어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무서워서 당장 내려가고만 싶었다. 차라리 나를 업고 뛰든가 이게 뭐야.

그런 라라의 불만은 얼마 가지 않아 해소될 수 있었다.

“다들 여기야!”

황실기사단의 후문과 이어져 있는 숲속에 들어서자 엘리나3과 똑 닮은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와 만나기 무섭게 라라를 운반하던 바람이 흩어지며 그녀는 조심스레 땅에 착지할 수 있었다.

“자, 어서 타! 서둘러야 돼.”

등을 떠미는 손힘이 장난 아니었다. 마차 위로 얼떨결에 오르자 곧바로 마차가 숲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한밤중의 탈출쇼에서 추격전으로 변질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어찌 됐든 지하 감옥에서 나왔으니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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