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네, 단장님의 배려 덕분에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호위 기사도 붙여주시고, 빌려주신 별장도 감사합니다. 이건 그에 대한 자그마한 보답입니다.”
대화의 물꼬가 트니 기사의 안색도 차츰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기사는 미리 준비한 선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디체스가 라라의 손을 쥐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선물 상자를 쥐자 곧바로 다음 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복귀를 알려드리려고 찾아온 겁니다. 시키실 일이 있으시다면 맡겨만 주십시오. 기숙사는 천천히 빼도록 하겠습니다.”
신혼 생활 시작과 동시에 다시 기사단으로 복귀한 기사에게 디체스는 마뜩잖은 눈빛을 드러냈다.
“그럼 앞으로는 기숙사에서 지내지 않는 겁니까?”
“네, 하하. 신혼집에서 출퇴근해야지요.”
“어째서입니까.”
디체스는 선물 상자의 검푸른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차갑게 물었다. 푸른 리본이 이별의 상징이라 했던가. 깊이 침전된 눈은 심해처럼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이 내가 있는데 어떻게 다른 곳에서 생활하겠다는 겁니까?”
“네?”
“기숙사를 하나 더 내줄 테니 아내와 함께 이곳에서 사십시오. 단순히 자비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내 것인 그대를 계속 곁에서 두고 보기 위함이지.”
‘뭐야… 이 집착남 같은 대사는?’
라라는 슬슬 이 새끼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두뇌는 빠르게 돌아갔는데 왠지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집착의 방향이 한곳이 아니라 여러 군데로 향하고 있었다. 이것은 ‘여주에게만 집착한다’는 클리셰가 부서졌다는 걸 의미할 테다.
여주 한정으로 독점욕을 드러내던 그는 만인을 공평하게 독점하려는 마성의 박애주의자로 거듭난 것이다.
<사악한 논클리셰의 힘이 남주 중 하나인 디체스에게까지 미쳤을 줄이야……. 근데 좀 매력 있는데? 어떤 여주랑 이어져도 괜찮고. 음, 괜찮아. 역시 내가 만든 남주라 그런지 각이 살아있느니라.>
‘당신은 남주가 똥을 싸도 박수 칠 신이야.’
3장 대형견남주의 정석
라라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곧바로 의무실을 찾은 그녀는 자신의 손을 깨끗하게 소독해 달라 부탁했다.
소독약으로 인해 알싸한 냄새를 풍기는 손을 근처 수도관에서 물로 헹구고 한번 털어낼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하얀 손수건 하나가 내밀어져 왔다.
“괜찮다면 이거 쓸래, 라안?”
‘또 너냐.’
오빠가 신사적으로 제게 손수건을 내밀며 웃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서있는 모습이 추억 속의 상냥한 오빠를 떠올리게 했다. 라라가 잠시 멍하니 서있을 때 눈앞까지 내밀어진 손수건을 로렌스가 위로 홱 들어 올렸다.
“대신 이걸 쓰기 위한 조건이 있어. 네 이름이 가명이란 거 알고 있어. 진짜 이름이 뭔지 알려줘.”
‘아직도 눈치 못 챘냐…….’
라라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밀어내고는 연무장 쪽으로 도망쳤다.
“잠깐, 기다려. 에드가3이 찾던데?”
뒤따라온 목소리에 라라는 고개만 한번 끄덕일 뿐이었다. 연무장에 들어서자 선배 기사와 대련 중인 에드가3이 보였다. 남자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실력과 빠른 스피드로 선배 기사와 막상막하로 겨루고 있었다.
챙, 하고 무겁게 부딪치는 쇳소리를 뒤로하고 선배 기사가 몸을 숙여왔다. 갑작스레 찔러 들어오는 공격에 에드가3은 차분하게 검을 모로 눕혀 막아내었다. 다시금 챙, 챙, 소리가 이어지더니 이번엔 에드가3이 빠르게 몸을 날려 공격에 들어갔다. 수평으로 날아간 검 끝이 정확히 선배 기사의 옆 목에서 멈췄다.
숨 들이켜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입회인이 에드가3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대련 감사합니다.”
에드가3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온 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담담한 눈길이었다.
“정말 대단하다, 에드가3.”
“그렇게 추어줄 필요 없어.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나 진짜 아무것도 아닌데.”
라라의 진심 어린 고백에도 에드가3은 무반응이었다. 이미 단단히 굳어진 오해는 진실의 자리를 꿰찬 지 오래였다.
“넌 정말 대단해. 내가 믿지 않을 거란 걸 뻔히 알면서 그렇게 겸손한 대답만 내놓고 말이야.”
“아니, 진짜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아니라고! 좀 믿어줄 수 없을까? 응?!”
“넌 대단해.”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검도 못 다루고 너처럼 그렇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다닐 수도 없다고!”
“거기 신입! 자기 비하 그만하고 여기 와서 이것 좀 치워라.”
훈련 시작을 알리는 호된 호통 소리가 들려오자 라라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그리로 향해야만 했다.
기사들이 사용한 땀에 전 방어구와 무기들을 정리하고 있던 중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라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연무장 중앙에 멈춰 서서 중후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장년의 기사가 보였다.
“오늘 단장님 집무실에 출입한 놈, 즉각 튀어나와라.”
라라는 뜨끔해서 하마터면 들고 있던 견갑을 땅에 떨어뜨릴 뻔했다. 주위에서는 또 한 번 크나큰 웅성거림이 울렸다. 나가야 될지 말아야 될지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 에드가3이 먼저 당당히 앞으로 나갔다.
양심적이게 행동하는 친구를 보니 라라도 마냥 시치미를 뗄 수가 없었다. 슬그머니 앞으로 나가 에드가3의 옆에 멈춰 섰다.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서있는 장년 기사의 이글거리는 시선에 라라는 안면이 꿰뚫릴 것 같았다. 뒤늦게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와 제 옆에 섰는데 그는 아까 집무실에서 봤던 그 기사였다.
에드가3과 라라, 그리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기사. 이렇게 세 명이 나온 상황이었다.
장년 기사의 눈이 흡사 바늘처럼 가늘어지더니 찌를 듯이 강렬한 눈빛을 돌아가며 쏘았다. 분위기로 보나 그의 태도로 보나, 어떤 사건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만일 도난 사건이라면 일이 복잡해질 게 뻔했다. 라라와 엘리나3은 진짜 신분을 숨기고 남장 중이니 말이다.
‘만일 이곳에서 몸수색이라도 당한다면…….’
안 좋은 예감일수록 잘 들어맞는다는 클리셰가 이번만큼은 깨지기를 빌 때다. 장년 기사가 이 공간을 장악하는 묵직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누가 단장님의 책상 아래에 응가를 싸고 튀었다.”
“…그런, 맙소사…….”
“세상에…….”
“…어쩌다가 그런 일이…….”
소식을 접한 기사들의 경악스럽고 분노 어린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 나올 때 오직 라라만이 떨떠름한 반응을 내놓았다.
‘이게 그렇게 경악할 일인가……? 물론 다른 의미로 놀랍지만, 사건 자체가 너무 구리잖아!’
라라는 고작 이런 일 때문에 그렇게 분위기란 분위기는 다 잡았냐는 생각이 들었다. 진지함 속에 피어난 우스꽝스러움에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였다.
그런 라라의 표정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장년 기사가 예리한 빛을 눈가에 띠었다.
“에드가3 너는 그럴 애가 아니니 들어가고. 룩 경도 마찬가지다. 그럼 남은 것은 너냐.”
‘내가 응가 싸고 튈 인물이라는 거야?!’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있군.”
배변 테러의 용의자로 지목된 라라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서 자기가 싸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것도 좀 웃겼는데 때마침 에드가3이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로 변호에 들어갔다.
“라안은 그런 곳에서 배변할 만큼 어리석은 친구가 아니에요. 화장실과 집무실 정도는 구분한단 말입니다.”
‘차라리 지능형 안티라고 해줘…….’
이딴 걸 친구로 둔 자신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미안하지만 에드가3 경, 이 사건은 실수가 아닌 고의라고 말하고 싶군. 평소 단장님께 좋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던 자가 단장님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해 부러 저지른 일, 즉 원한에 의한 사건이라고 나는 보지.”
장년 기사는 왕년의 추리 실력을 발휘해 사건을 좀 더 자세히 파고들기 시작했다.
“사건 현장에서 응가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네. 이 말은 범인은 편안한 상태로 용변을 봤다는 말이지.”
“그렇다는 말은…….”
“범인이 응가를 싸는 동안 밖에서 망을 보며 도와준 공범이 있다는 말이지.”
수사망은 점점 더 커져가고만 있었다. 라라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듣고 있자니 어딘가의 잘 자란 개 풀 뜯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한 기사가 조용히 손을 들며 앞으로 나왔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가 봤습니다. 로렌스가 저 신입 기사와 함께 수도관에 서있는 모습을요. 분명 로렌스는 휴지를 건네고 있었습니다.”
“그게 사실인가, 로렌스?”
장년 기사는 물론 모든 이의 시선이 로렌스를 향해 옮겨졌다. 라라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가만히 지켜보았다.
“억울합니다! 제가 내민 것은 손수건이었습니다. 같은 하얀색이니 멀리서 보면 휴지로 보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 품속에 있는 이 흰 손수건이 제 말이 진실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렇담 너는 왜 이 자식에게 손수건을 내민 것이지?”
“그것은… 라안이 손을 씻고 있어서 물기를 닦으라고 전해준 것입니다.”
“하긴 볼일을 봤으면 손을 씻어야겠지……. 빼도 박도 못할 증언이 나왔군그래? 어디 변명이라도 들어나 볼까, 응가 테러범?”
“저는 절대 푸훕… 응가푸흐르륵!”
처음으로 라라의 입에서 항변의 말이 터져 나왔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이런 걸로 진지할 수 있다니 골 때리는 집단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일로 몰려봐라, 웃고 싶지 않아도 어이없어서 웃길 것이다.
배를 접고 끅끅대는 라라와는 달리 주변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모든 범행을 들켜 재밌어하는 사이코를 목도한 사람들 같았다.
“…위험한 자식이군그래. 이 자식을 당장 고문실로 끌고 가!”
“넵!”
“아니, 저푸르릅 아니, 풋 아닌데 푸흐으흡. 잠깐만, 푸합.”
라라는 눈물을 터뜨렸다. 너무 웃겨서.
주위에서 강제로 저를 끌고 나가는 기사들과 그런 기사들의 앞을 막아서는 유일한 등, 에드가3……. 한 편의 희곡이 따로 없어서 라라는 차디찬 지하 고문실에 도착할 때까지 울 수밖에 없었다. 너무 웃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