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자, 맘껏 휘둘러 봐라.”
팔짱을 낀 중대장은 지켜보겠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 힘을 주어 떴다. 부담스러워 죽을 것 같았지만 라라는 하라는 대로 따랐다. 붕, 붕 소리가 나게 허공에다 몇 번 검을 흔들어 대다가 슬쩍 중대장을 돌아보았다.
한눈판 사이 메두사에게 묻지 마 공격을 당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그의 얼굴은 석화 직전에 놓여있었다. 바위처럼 딱딱한 표정은 팔등 위로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웠다.
“이 새끼가, 애새끼가 장난삼아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야!! 내가 우습냐? 어!!”
“히익…….”
“그렇게 말고, 이렇게, 이렇게 휘두르란 말이야!!”
결국 보다 못한 중대장이 다가와 검을 쥐고 있는 라라의 양팔에 손을 얹었다. 팔에 손이 닿기 무섭게 중대장의 눈빛이 풍랑을 만난 나룻배처럼 마구 흔들렸다.
“너… 혹시 여자……?”
‘아니, 팔만 잡았는데 어떻게 아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들키다니, 라라도 이렇게 허무하게 들킬지 몰라 당황한 채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때 지나가던 기사와 팔꿈치가 실수로 부딪쳤는데 일순 기사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 설마 여자냐……?”
‘아니, 팔꿈치 닿은 걸로 어떻게 아냐고!’
라라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보통 가슴이라거나, 가슴에서 들키지 않나? 설마 팔로 남녀를 구별하는 초능력자 단체인 건가.
“이봐요, 중대장. 신입 너무 잡지 마요.”
멀리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뿌리며 기사 하나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신을 도와주러 온 사람에게 하기엔 조금 미안했지만 라라는 실수인 척 슬쩍 그의 발을 밟았다.
발등을 조금 밟았을 뿐인데 라라를 돌아본 기사의 눈동자 초점이 떨리기 시작했다.
“너… 여자인 거야……?”
‘이젠 놀랍지도 않아. 그래, 다 알아라.’
<이것은 논클리셰의…….>
심각한 중얼거림이 들려오자 라라는 그제야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대강 이해가 되었다. 일단 이 장소를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아 발을 떼려던 순간, 뒤에서 저를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잠깐, 너… 어제 봤던?”
라라는 여기서 걸릴 순 없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입구를 향해 달렸으나 현직 기사를 따돌릴 순 없었다. 뒤에서 팔을 낚아채는 강한 손아귀에 라라는 강제로 몸이 돌아갔다.
흠칫하고 붙잡은 팔에서 손을 뗀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오빠의 눈길은 흔들리고 있었다.
‘너도냐.’
“너… 설마 여자? 여자가 어떻게 기사단에…….”
‘아니, 여잔 거 알면 네 여동생이란 것도 좀 눈치채 달라고!’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를 보거나 만져야만 그제야 여자임을 깨닫는다는 클리셰가 파괴됐느니라. 처참하도다…….>
말을 잇지 못하는 신의 참담한 심정을 라라는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상황이 거지같이 돌아갔으니 말이다.
입단한 지 하루 만에 기사단의 3분의 1이 라라가 여자인 걸 알아버렸다. 그녀는 어차피 조연이니 그렇다 쳐도 문제는 여주인 엘리나3이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 모여앉은 자리에서 라라는 슬며시 엘리나3을 돌아보았다. 훈련 얘기를 하며 자연스레 끼어있는 모습이 정말 소년 같았지만 혹시 또 몰랐다.
자유롭게 떠들어도 되는 식당 분위기를 틈타 라라는 “에드가3은 영애들에게 인기 많죠?” 하고 슬쩍 떠봤다. 그러자 열에 아홉은 오묘한 미소를 띠며 시선을 피하거나 피식거렸다. 알고 있는 자의 여유 같았다.
역시나 기사 동료들은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편한 동료처럼 대하는 것을 보면 아직 그녀가 공녀라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절망적이라 할 수 있었다.
<여주가 남장을 하면 남주를 제외한 주위 사람들은 여자임을 알지 못한다는 클리셰마저 사라진 듯하구나.>
‘기사단장은 엘리나3이 여자, 아니 공녀라는 걸 알긴 할까요?’
<나도 모르느니라. 사악한 논클리셰의 힘이 어디까지 퍼진 건지…….>
‘그럼 큰일이잖아요. 당장 확인해 봐야겠어요!’
라라는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났다. 식당을 벗어나 걷고 있는데 뒤에서 웬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엘리나3이 식사를 하다 말고 쫓아온 건가 싶어 돌아보니 그곳엔 생각하기도 싫은 오빠가 머뭇거리며 서있었다.
“네가 여자인지도 모르고 그런 오해를 해서 미안해. 한밤중에 여동생 방에 있길래 당연히 그런 불쌍한 놈인 줄 알았어.”
‘…그런 불쌍한 놈이 대체 뭔데?’
라라는 부들거리는 주먹을 억누르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바빠서 가볼게요.”
“저기 잠깐!”
“이거 놔요!”
손목을 붙잡는 오빠의 손을 차갑게 내치며 라라는 핏발이 서도록 눈을 부라렸다. 로렌스는 거둔 손을 목덜미로 가져가 어색하게 문질렀다.
“네가 그렇게 과민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돼.”
“알면 좀 가주세요.”
“후……. 난 너랑 잘 지내보고 싶은데. 앞으로 연락해도 될까?”
매섭게 치뜬 눈을 약간 누그러뜨린 라라는 곧 더러운 것을 보듯이 휘둥그렇게 떴다. 오빠의 귓불에 떠오른 저것은, 저 연한 빛은, 분명 홍조였다.
“왜 사람들이 그러잖아. 사람은 자기와 닮은 이성에게 끌린다고. …흠, 처음 봤을 때도 생각한 거지만 넌 뭔가 나랑 닮은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거야 같은 배에서 나왔으니까, 븅신아!’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차서 라라는 근처 돌기둥에다 머리라도 박고 싶었다. 오, 신이시여. 저 답 없는 새끼를 구해주소서.
<너의 오빠를 구하기 위해선 하루빨리 남주와 여주를 잇는 수밖에 없느니라.>
다시금 목적의식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화장실이 급해서! 이만 실례할게요.”
“그쪽 방향은 단장님 집무실인데……?”
잠깐, 저기, 하고 저를 붙잡는 목소리가 두 차례나 들려왔지만 라라는 무시하고 레이디 축지법을 사용했다. 소중했던 오빠와의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니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똑똑.
단정한 노크 소리가 집무실 안을 울리자 점심시간에도 어김없이 서류를 훑고 있던 디체스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냐고 묻지 않아도 문 너머로 먼저 중성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입 기사 라안이에요. 단장님을 뵐 수 있을까요?”
“들어오십시오.”
디체스는 잠시 손에서 서류를 내려두고서 문에 시선을 주었다. 분명 라안이라면 오늘 들어온 신입 기사일 터였다.
“무슨 용무라도 있습니까?”
“제 친구에 대해 뭐 좀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말해보십시오.”
“며칠 동안 에드가3이 배가 자꾸 아프다고 하는데요. 훈련 중에도 많이 아파 보이거든요. 체한 건 아닌 것 같고 단순한 복통도 아닌 것 같고… 혹시 왜 그런지 뭐 알고 계신 게 없으신가 해서요.”
“지병이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은 없습니다만.”
짚이는 게 없는지 디체스는 생각에 잠긴 투로 말하였다. 그동안 라라의 눈에서는 나노 초 레이저보다도 고정밀도한 눈길이 쏘아져 그의 안면을 꼼꼼히 훑어대었다.
‘…아무리 봐도 여자인 걸 모르는 것 같죠?’
<생리통을 모를 린 없을 텐데 에드가3과 생리통이 매치가 안 된다는 건… 확실히 모르는 것 같구나.>
‘좀 더 세게 나가볼까요?’
신의 동의를 얻은 라라는 수위를 높였다.
“아까 에드가3과 훈련을 하다가 그만 넘어져서 흙바닥 위에서 같이 뒹굴었는데요. 샤워실에 같이 들어가자니까 에드가3이 어떻게든 혼자 샤워하겠다고 우기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억지로 샤워실에 밀어 넣고 제가 막 옷을 벗겼는데요.”
“…….”
순간 디체스의 안색이 싸늘할 정도로 딱딱하게 변하였다.
“왜 그런 얘기를 내 앞에서 꺼내는 것입니까.”
<…집착하는 것 같으니라.>
‘제 생각에도 그런 것 같아요. 완전 여자인 걸 아는 눈치인데요?’
라라가 그렇게 확신하며 기뻐할 때다. 돌연 디체스가 업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살벌한 기류가 감돌자 라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머리 위에 위치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림자가 진 얼굴은 한층 음영이 뚜렷해져 있었다. 살벌함도 한층 더 짙어져 있었는데, 라라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국의 검으로 불리는 남자 주인공을 대놓고 도발하다니 생각이 짧았다. 하필 평민 기사로 남장 중이라 이대로 가다간 썰릴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대는 오늘부로 완전히 나의 휘하에 들어왔습니다.”
“…그, 그게… 정말 경솔했던 것 같아요. 부디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그런데 기사단에 들어오자마자 다른 이의 옷에 터치를 하는 겁니까. 이 내게는 터치 한번 해주지 않고선.”
단단한 손이 라라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채었다. 그러곤 그의 벌어진 정장 앞자락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내 옷도 마구 벗기려 해보십시오. 자― 어서 해보십시오.”
“꺅!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손 놔요!”
“그리고 나와도 같이 샤워실에 가서 샤워를 하는 겁니다. 그전에 같이 훈련을 하며 흙 위에서 뒹구는 것도, 모두 나와 함께하는 겁니다.”
라라는 손바닥 아래 만져지는 남성의 탄탄한 맨가슴에 질겁했다. 불끈하고 움직이는 가슴 근육이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그때였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은. 누군지는 몰라도 자신을 이 상황으로부터 구원해 줄 거란 생각에 라라는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2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기사가 공손히 고개부터 숙인 채 들어섰다.
“지금 막 다녀왔습니……. 아, 죄송합니다.”
얼굴을 들기 무섭게 기사의 안색이 흙빛으로 굳어갔다. 단장과 그 단장의 벌어진 셔츠 사이로 손을 넣고 있는 웬 소년 기사. 떼어내려는 건지, 못 떼게 막는 건지 소년 기사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단장의 손. 아무튼 오해의 소지가 분명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단장님, 중요한 얘기 중이시라면 그,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아닙니다. 들어와 앉으십시오.”
‘아니, 내 손을 좀 빼달라고!’
라라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디체스는 그대로 소파에 앉았다. 라라가 그 옆에 덩달아 강제 착석하자 기사도 뻣뻣하게 맞은편 소파에 착석했다.
눈을 못 마주치는 기사를 향해 디체스는 조금 부드러운 시선을 던졌다.
“신혼여행은 잘하고 왔습니까?”
“네, 이제 막 다녀온 참입니다.”
“호위 기사에게 들었습니다. 여행은 어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