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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6)화 (6/115)

6화

태도를 돌변한 채 제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오빠의 눈빛은 장난이 아니어 보였다. 사람 하나는 충분히 쏘아 죽일 듯이 내려다보던 적갈색 눈동자가 코앞에 다가온 순간이었다. 멱살을 콱 낚아 잡아채는 손길에 라라는 그만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너 뭐냐.”

‘뭐긴, 븅신아, 니 동생이지!’

라라는 속으로 응대했지만 입술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약간 쫄아버린 탓이었다.

‘이 자식 뭐야……. 전혀 못 알아보는 거야?’

<클리셰다. 여자가 남장 가발을 쓰거나 머리를 묶었다 풀면 다른 사람들은 절대 알아보지 못한다는 클리셰이니라. 이 세계에 아직 클리셰가 남아있다는 증거구나.>

‘이거 기뻐해야 하는 거……?’

아무튼 쪽팔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나쁘진 않았다.

목이 눌려 숨을 쉬기가 힘들었지만 온 신경은 자꾸만 다른 데로 쏠렸다. 아무래도 오빠가 다른 사람 대하듯이 자신을 대하니 기분이 요상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화를 내는 오빠의 태도도.

“지금 네가 어딜 들어온 건진 알고 있겠지? 이 새끼야…….”

여동생을 끔찍이 사랑하다 못해 이성 교제 절대 반대를 외치던 팔불출의 습성이 남아있는 걸까. 아니면 오빠가 원래대로 돌아온 것일까.

라라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로렌스를 올려다보다가 뒤늦게 숨이 모자라자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빨개져 가는 얼굴을 알아차린 로렌스가 한발 먼저 멱살을 놓았다.

“컥, 컥…….”

“…내 여동생은 지금 씻고 있는 중이냐? 대답해.”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는 라라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냉랭했다. 진심으로 화낸 모습 따위 본 적이 없으니 라라로서는 오빠의 이런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아무래도 이 심각한 상황에 사실은 자신이 남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당히 밝힐 수가 없었다. 씻고 있다고 둘러대는 게 나을 것 같아 라라가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싸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한 가지만 충고하지.”

“…….”

“한 번만 더 내 여동생에게 접근했다가는 가만두지 않는다. 아무리 여자가 없어도 그렇지……. 네 몸을 좀 더 소중히 여기라고!!”

얼마나 진심이 담긴 외침인지 싸늘히 식은 어투에서 급열기가 끓어 넘쳤다.

라라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로렌스를 올려다보았다. 이 새끼가? 쌍욕이 목구멍에서 가래침처럼 끓어오른 적은 처음이었다.

“새끼……. 뭘 얼빵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거냐.”

로렌스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라라에게로 몸을 숙였다. 어깨를 두들겨 주는 커다란 손은 단호하면서도 듬직했다.

“도망쳐라. 이번 한 번만 도와주는 거야.”

‘진심 죽여버리고 싶다.’

라라는 덤덤하게 생각했다. 마치 당연한 사실을 떠올린 듯이.

* * *

어쩌다 황실기사단까지 와버린 걸까. 라라는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혼란함에 떠내려갈 것만 같았다. 금녀 구역에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깊숙한 건물 중심부에.

현재 라라는 기사단장의 집무실 밖에서 벌서는 아이처럼 서있는 중이었다. 안에 들어간 엘리나3은 그와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좀처럼 나오질 않았다. 하긴 여주와 남주가 만났는데 어련할까.

황실기사단의 단장인 디체스 에스테반은 스물넷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장직을 꿰찬 이로 범상치 않은 스펙부터가 남주 중 한 명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라라도 잘 아는 인물이었는데, 그도 그럴 게 어젯밤 내내 신이 보여준 예지몽을 통해 그를 질리도록 보았기 때문이다.

꿈에서는 시간이 두세 달 정도 흐른 뒤인 것 같았다. 아마도 여주가 남주에게 자신이 공녀라는 사실을 들킨 뒤일 것이다.

꿈속에서 은발 기사로 남장을 한 엘리나는 기사단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기숙사 방으로 추정되는 곳에 들어서는 장면이 나온 것을 보면, 기사단장인 남주는 엘리나가 공녀인 사실을 알고도 묵인해 준 것 같았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방 안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엘리나는 저를 꿰뚫는 날카로운 시선을 알아차리고 천천히 고갤 돌렸다. 방 소파에는 깔끔한 제복 차림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단장님?’

진녹색 머리에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제국의 공작이기도 한 디체스였다. 칼날을 세워 깎은 듯한 날렵한 콧날 위로 얇은 테의 사무용 안경이 걸쳐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집무실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시간까지 누구와 있었습니까?’

디체스는 몸을 일으켰고, 엘리나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그대라는 사람은… 자신이 여자라는 자각이 있는 겁니까.’

흠잡을 데 없는 움직임으로 엘리나의 앞에 다가온 그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정중하리라 생각했던 그의 태도엔 알게 모르게 사나움이 배어있었다. 그것을 엘리나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손목을 붙잡힌 상태였다.

‘내가 한 질문에 대답 먼저 해보시겠습니까.’

벽 쪽으로 밀어붙이며 디체스가 예리한 검은 눈을 내리깔았다.

‘말했을 터입니다. 내가 아닌 그 누구에게도 몸과 마음을 허락지 말라고.’

‘…그게 무슨…….’

‘공녀라는 사실을 눈감아 준 채 계속 기사단에 있을 수 있게 해준 것은 단순히 자비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내 것인 그대를 계속 곁에서 두고 보기 위함이지.’

디체스는 오른팔로 벽을 짚어 엘리나가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엘리나의 은색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가 왼손 엄지를 들어 엘리나의 입술을 눌렀다.

‘그럼에도 내 말을 번번이 무시한다는 건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내 말이 도저히 경고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

그의 목소리가 강압적인 명령조에서 어린아이를 대하는 어른처럼 엄한 어조로 변했다.

‘다른 하나는 내게 벌을 받고 싶어 이런 앙큼한 짓만 골라 한다는 것.’

엘리나가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뜨기 무섭게 그가 고개를 숙여왔다. 작은 입술을 삼킬 듯이 내려온 그의 입술은 턱을 지나 새하얀 목에 닿았다. 입술이 벌어지더니 가볍게 엘리나의 목 옆을 물었다.

‘아!’

엘리나가 손을 들어 디체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에 디체스가 기울여진 고개를 살짝 원래대로 돌리며 그녀의 여린 피부를 놓아주었다. 발간 잇자국이 난 곳을 스쳐 고운 선이 그려진 턱을 따라 올라간 그가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어느 쪽이든 내게 희열만 주는 것뿐이군요.’

대충 이러한 꿈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야한 분위기를 연출해서 뭐가 나올 거라 기대했는데 결국 선을 넘지 않는 꿈에 라라는 약간 실망도 했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보았던 남주가 바로 이 문 너머에 있다니 궁금증이 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꿈에서만 봤지 실제로 본 적은 없으니 말이다.

‘여주에게만 집착하는 포지션인 거죠, 기사단장님은?’

<그러하다.>

‘독점욕이 장난 아니겠네요.’

<그것이 남주의 매력이지. 너에게 보여준 꿈은 그가 독점욕을 막 드러내기 시작하는 단계에 불과하다.>

‘그러면 날이 갈수록 더한다는 말이네요. 로브신사X릴리카 동인지로 보면 재밌겠지만 제 타입은 아니에요.’

<준다고도 안 했느니라.>

라라가 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달칵, 멀리서 문이 열리고 엘리나3이 걸어 나왔다. 기사단 제복 차림의 그녀는 짧은 은색 가발을 쓰고 있었는데 몸 선이 가는 미소년처럼 보였다.

라라는 속으로 떠드는 것을 멈추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제발 무슨 문제가 있기를 바라며.

“어떻게 됐어요?”

“입단 수속은 다 마쳤어. 넌 이제부터 평민 신입 기사 라안이야.”

옆에 선 엘리나3이 친절하게 귓속말로 알려주었다.

아. 기대가 허망하게 무너지자 라라의 눈 밑이 어둡게 물들어 갔다. 남장한 엘리나를 처음 본 순간 여자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는 그라면 어떻게든 알아차려 줄 거라 여겼었는데.

“들키면 어쩌죠……?”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널 끌어들였으니 그 정도 책임은 당연히 질 거야.”

“고마워요.”

두 사람은 나란히 기사단 건물 로비를 걸었다. 주위로 스쳐 지나가는 기사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흠칫대는 라라와는 달리 엘리나3은 당당하기만 했다.

“저기 있잖아요.”

“슬슬 반말 쓰지 그래. 친구 사이에 공대를 쓰는 거 이상해 보여.”

“…호호, 그래.”

“그렇게 웃는 것도 관둬.”

무덤덤한 지적에 라라는 헙 하고 웃음소리를 삼켰다. 엘리나3은 걸으면서 매무시를 한번 가다듬었다. 라라의 옆얼굴로 눈길이 전해져 온 것은 그 뒤였다.

“내 가명은 에드가3이야. 앞으론 그렇게 불러.”

“아니, 굳이 3을 붙일 필요가 있어……? 혹시 다른 엘리나들도 여깄는 거야?”

“그건 아냐. 검을 쓸 수 있는 건 나밖에 없거든.”

“그럼 3은 왜…….”

“마음에 들거든, 3이라는 숫자가.”

뭔가 엄청 감명 깊은 명대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이것이 여자 주인공의 영향력이란 걸까. 라라는 시답지 않은 생각에 잠긴 채 엘리나3을 따라 연무장에 들어섰다.

문을 연 순간 공기가 확 달라졌다.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연무장 안에선 굵직한 남성들의 구호 섞인 외침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돌아가고 싶은 크나큰 내적 갈등을 느꼈으나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후였다.

엘리나3은 제집 안방에 들어온 것처럼 익숙하게 활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옆에 딱 달라붙어 라라는 주위만 슬쩍슬쩍 훑어보았다.

그러다 그만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야 말았다. 대열을 유지한 채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 사이에 있던 오빠를 발견한 제 눈을 뽑고 싶었다. 상의 탈의한 오빠의 반라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역시 이곳만큼 제게 끔찍한 곳도 없었다. 라라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돌아가려는 그 순간 기가 막히게도 중대장이라는 자가 나타났다.

“이 녀석인가. 팔도 가늘고 비리비리한 게 쓸 만해 보이진 않는데? 뭐, 에드가3 네가 마른 편인데도 강한 걸 보면 뭔가 있을 것도 같고?”

“제 친구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맡겨만 줘라. 이 녀석은 내가 잘 훈련시킬 테니 넌 가서 훈련해.”

머리를 바짝 밀어 두피가 비치는 중대장은 기본기가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해야겠다며 라라를 무작정 연무장 구석으로 데려갔다.

첫날부터 군기를 빡세게 잡아놓아야 된다느니, 앞으론 눈여겨보겠다느니 하는 말을 침 튀기면서 하는데 차마 돌아가 보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라라가 속으로 눈물을 흘릴 때 중대장이 그녀에게 목검을 내밀었다. 전에 리니엇 공작가에서 쥐었을 때보다도 훨씬 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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