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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5)화 (5/115)

5화

‘공녀가 검을 다뤄……? 아니, 것보다 누구지?’

엘리나긴 엘리나인데, 어쩐지 일이 수월하게 돌아간다 했더니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맞힐 확률은 5분의 1. 신중하게 운을 뗄 수밖에 없었다.

“이른 새벽부터 찾아와서 죄송해요. 음, 엘리나4 공녀님?”

“엘리나3이야.”

“호호……. 죄송해요.”

라라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냥 엘리나 공녀님이라고 했으면 반은 갔을 텐데. 자책하는 동안 엘리나3이 검을 내려 라라에게 걸어왔다.

다리 각선미를 드러내는 승마용 바지에, 목 단추를 살짝 풀어 내린 셔츠 차림의 엘리나3은 확실히 여자도 매료시킬 만큼 시크해 보였다.

“용무는 뭐지?”

“그게, …말이죠, 호호. 제가 왜 왔냐면…….”

<친해지고 싶다고 솔직히 말하거라.>

“뜬금없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친해지고 싶어서요.”

“이 새벽부터?”

“그런 말도 있잖아요?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난 벌레인가 봐.”

웃으며 받아줄 만도 할 텐데 엘리나3은 철벽 수비로 나왔다. 다른 엘리나들에 비해 엘리나3은 단호하고 차가운 성격인 것 같았다.

<역시 걸크러시답구나.>

“용무가 없다면 돌아가는 게 어때?”

“…호호.”

“아니면, 나와 대련해 보겠어?”

“혹시 검술 대련이요?”

최대한 우아하게 반문하고 싶었는데 약간 표정 관리가 안 된 모양이다. 뭐 그런 얼빵한 질문이 다 있냐는 듯이 엘리나3이 스윽 한쪽 눈썹을 치올렸다.

“제가 한 번도 검을 쥐어본 적이 없어서요, 호호…….”

“날 속이려 들지 마.”

‘아니, 내가 쥐어본 적이 없다는데.’

엘리나3은 검을 세웠다. 살기등등할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에 라라는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 자란 귀족 영애답게 이런 무서운 무기에는 면역이 되어있지 않았다.

“슈모르드 자작가는 한때 수많은 기사를 배출한 무가라고 알고 있어.”

어감이 조금 이상했다. 기죽었던 어깨를 활짝 편 라라는 태생이 우아한 여인처럼 천천히 입술을 뗐다.

“한때라니요? 호호, 지금도 훌륭한 기사들을 꾸준히 양성하고 있답니다.”

“가문의 명예를 낮추는 건 용서 못 한다는 거야?”

“호호, 그렇게 들렸다니 면목 없네요.”

“그 호호 소리 거슬려. 그럼 내게서 이겨보든지.”

서슬 퍼런 도발에 라라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호호 떼고 붙어보자 이건가.

<여주와 싸워보려거든 관두어라.>

라라의 생각을 읽은 신이 재빠르게 상황에 난입하였다.

<이제껏 무턱대고 여주에게 덤볐다가 깨진 철없는 엑스트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느니라. 여주의 도발에 넘어간 엑스트라들은 하나같이 개망신을 당한다는 클리셰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

‘아까는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하셨잖아요? 이건 가문의 명예가 달린 일이라고요. 비록 검 한번 잡아본 적이 없지만, 가만히 있을 순 없다고요!’

역시 철없는 엑스트라 영애다웠다. 라라는 검술 대련을 위해 그려진 직사각형의 대련선 안에 들어섰다.

엘리나3은 초보자가 쓰기에 적당한 대련용 목검을 골라 라라에게 던졌다. 허공에 던져진 목검이 라라의 손바닥에 안착하려는 순간, 쫄보 라라가 손을 다칠 것을 염려해 손을 거두었다.

‘…아! 잡아야…….’

땅에 떨어지려는 검을 어떻게든 살려야 된다는 생각에 라라는 반사적으로 왼발을 빠르게 뻗었다.

매끄러운 구두 앞코가 정확히 목검의 손잡이 아랫부분을 강타했다. 다시 높게 솟구친 검은 팽글팽글 돌다가 순식간에 엘리나3에게로 떨어졌다.

엘리나3이 재빨리 검을 들어 올렸으나, 그보다 먼저 라라의 검이 쏜살같이 엘리나3의 옆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은빛 머리칼 몇 가닥이 천사가 떨어뜨린 깃털처럼 하늘하늘 땅 위로 떨어져 내렸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전진의 손안에 착지한 배드민턴 셔틀콕처럼 엄청난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검술의 깊은 경지에 도달한 여주가 검술이 뭔지도 모르는 철없는 엑스트라에게 깨지다니…….>

“…대단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엘리나3이 숙연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검을 허리춤에 걸고 굳은살이 가득한 오른손을 펼쳐 보였다. 이제까지의 노력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박여있었다. 라라는 괜히 제 희고 말랑한 손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네?”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대련을 청할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싸우지 않아도 알겠어, 이건 완전히 내 패배야.”

“소드… 뭐요?”

“오만했던 것 같아. 너 같은 대단한 검술의 천재가 보잘것없는 자작 영애로 숨어 지내는데 나는 내 실력만 믿고 너를 도발했어.”

‘…은근히 디스하는 거지, 지금?’

“너와는 친구로 지내고 싶어.”

엘리나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라라는 그녀와 적당히 친구가 되기로 했다.

날이 밝아올 때까지 라라는 엘리나3과 대화를 나누었다. 자신은 절대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는 항변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엘리나3은 들을 생각은커녕 조금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갔다. 참으로 돌 같은 여인이었다. 쥐어 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알겠어. 소드 마스터인 걸 어떻게든 숨겨야 하는 거라면 절대 다른 이에게 얘기하지 않겠어.”

“아니, 그게 아니라요! 호호! 공녀님!!”

어떤 상황에서도 우아함을 잃지 말라는 어머니와 마가렛 부인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참을 인’자를 되새겼다. 오해를 풀기 위해 라라는 다시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했다.

“제 손을 봐도 모르시겠어요? 굳은살이 하나도 없잖아요?”

“감탄했어. 얼마나 오랫동안 검을 쥐었으면 살이 그렇게 말랑말랑해질 수 있는 건지…….”

“아니, 안 쥔 거라고요!! 호호오오옥호혹!!”

슬프면 되레 웃음이 나온다더니, 라라는 손등을 입술 옆에 비스듬히 갖다 대고는 실성한 여자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우아한 미침이었다.

그 큰 웃음소리에 연무장 주위를 순찰하던 보초병이 ‘역시 미친 여자가 확실했어.’ 하는 눈으로 입구 사이로 라라를 힐끗 훔쳐보고 갔다.

“됐어요. 맞을 거예요, 소드 마스터…….”

더 이상 얘기했다간 복장 터져 죽을 거라 확신한 라라는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엘리나3은 담담히 고갤 한번 끄덕일 뿐이었다.

“하지만 영애의 실력을 그냥 썩히기에는 아까워.”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황실기사단에 지원을 해보는 건 어때?”

“…마음대로 하세요. 예? 방금 뭐라고……?”

라라는 부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진지하게 마주해 오는 엘리나3의 눈을 보니 진담인 것 같았다.

“너만 원한다면 위장 신분은 내가 만들어 줄 수 있어. 굳이 실력을 입증하지 않아도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게 뒤를 봐줄 테니. 어때?”

‘으으……. 혈압.’

제국에 여기사라니, 들어본 적도 없고 법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았다. 황실기사단은 오로지 남자만 받으니 말이다. 하지만 라라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달리 세상은 상상을 초월하리만치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엘리나3은 이미 공녀의 신분을 숨긴 채 남장 여자로서 황실기사단에서 훈련을 받고 있느니라. 공녀이니 신분 위조는 식은 죽 먹기겠지.>

‘남장하고 기사단엘 간다구요……? 어쩜 미쳤어! 이건 미친 짓이라고요!!’

<선택받은 자여, 여주가 인도하는 대로 순순히 따라가거라.>

‘못 해요! 그건 정말 못 해요!! 아니, 좀 봐주세요. 신이시여, 부디 자비를…….’

<황실기사단에는 남자 주인공이 있나니.>

‘아니, 거기엔 인간쓰레기도 있다고!!’

* * *

황실기사단 소속, 로렌스 슈모르드.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는데 이제는 혐오스럽기만 했다. 인간쓰레기가 있는 소굴에 기어들어 가다니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이제껏 저택 안에서 매일 반경 5m 거리를 유지해 왔는데, 기사단이면 훈련도 같이 받을 것이고, 어깨동무나 대련 중에 신체 접촉을 할지도 몰랐다.

‘꺄아아아아악! 죽여버려!’

라라는 상상한 자신의 뇌에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이대로 잠이 들면 악몽을 꿀 것 같아 침대 위에서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을 비우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뱉기를 반복하던 그때,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혹시 주무시나요?”

“그래, 자고 있어.”

“일어나 계시네요.”

문을 열고 들어온 모니카가 한심한 눈빛으로 라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리니엇 공작가에서 선물 상자가 하나 도착했는데요.”

“그거 불태워 버려, 어서! 그리고 안 받았다고, 그런 거 본 적도 없다고 둘러…….”

<선택받은 자여, 황실기사단 제복이 도착했구나.>

신의 기대 어린 목소리에 라라는 합죽이가 되었다. 대신 모니카를 향해 얼굴 근육을 격렬히 꿈틀대면서 선물 상자를 가지고 당장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말로 하세요.”

모니카가 한심함을 대신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상자를 받아든 라라는 모니카에게 잠시 나가달라 한 뒤 거울 앞에서 입어보기 시작했다.

“…호, 호, 너무 딱 맞는다……. 호, 호, 호. 난 기쁘다…….”

감정 노동자를 대신해 로봇을 세워둔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자, 선택받은 자여. 여주가 기껏 선물해 줬는데 한번 써봐야 되지 않겠느냐?>

부드러운 재촉의 말투에 라라는 답은 정해져 있다는 듯이 가발망을 주섬주섬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짧은 갈색 고수머리 가발이었다.

“좀 남자 같아 보이기도……?”

왜소한 체격의 소년이 거울 속에서 기사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라라가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허리춤을 만지작대며 턱을 문지를 때였다. 벌컥, 하고 거울 바로 뒤편에 있는 방문이 열렸다.

라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울에 비친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오빠였다. 하필이면 이 꼴을 들키게 될 줄이야, 죽고 싶었다. 한밤중에 노크도 안 하고 들어온 오빠를 죽이고 따라 죽고 싶었다.

포복절도하며 문고리를 붙잡고 주저앉을 거라 여겼던 오빠는 생각보다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제 착각일 뿐이었다. 뻣뻣하게 일자를 유지하고 있던 고운 눈썹이 급작스럽게 끝만 솟아 올라갔다. 코랄빛 머리칼 사이로 험악하게 구겨진 미간이 선명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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