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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4)화 (4/115)

4화

한참을 어둠 속에서 오열했던 것 같다. 눈물길이 마르지 않은 채로 라라는 비장한 각오를 마음에 새겼다.

자신이 힘들거나 아플 때 늘 위로해 주고 도와줬던 오빠였다. 그 끔찍한 인간쓰레기로부터 구해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지 않은가. 자신이 아니면 누가 오빠를 구한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오빠를…, 저희 오빠를 구할 수 있는 거죠? 말해주세요! 뭐든, 뭐든 할 테니까요.’

<너는 내가 선택한 자다, 라라 슈모르드.>

라라의 절박한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이 자애로운 음성이었다.

<앞으로 네 손에 이 세계의 운명이 달려있을지니.>

* * *

라라는 눈을 떴다. 자면서 울었던 건지 눈가가 푹 젖어있었다. 손등으로 눈 주변을 문지르며 상체를 일으키자 낯선 방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신이 드나?”

“……?”

멀지 않은 곳에서 생소한 저음이 들려왔다. 라라가 화들짝 고개를 돌리자 긴 소파에 몸을 묻고 앉아있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자면서 오빠를 찾던데…….”

말끝을 늘어뜨리며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검자줏빛의 머리카락 아래 밤하늘에 뜬 달처럼 가느다랗게 휜 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빠가 아니어서 실망한 게 아닌가 모르겠군.”

“…아.”

농담이었다는 듯이 실없는 웃음소리가 그의 유려한 입가에 흘렀다.

“네 오빠란 자가 네가 영영 눈을 뜨지 않으면 황실 공동묘지에 묻어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더군. 자기는 급히 뭘 끓여야 된다기에 내가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먹을 걸로 장난치지 않겠다고 신께 맹세했지만 라라는 저택에 돌아가면 제일 먼저 스파게티 면으로 인간쓰레기의 목을 매달아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눈을 뜬 것을 봤으니 나는 이만 가보지. 아직 낯빛이 창백해 보이니 좀 더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군.”

낮게 펄럭인 망토 자락에서 인 가벼운 바람이 라라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이름을 물으려 해도 그는 이미 객실 문을 벗어나고 없었다.

황제를 사칭한 대담한 저 이는 과연 누구일까.

라라는 괜스레 심장 부근이 간지러웠다. 오늘 처음 본 사내인데 말이다.

턱을 괸 채 라라는 창틀 끝에 걸린 푸른 초승달을 응시했다. 왠지 방금 본 사내의 눈동자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가 객실에서 나온 라라는 엘리나 공녀가 응접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시종을 통해 전해 들었다.

자신이 쓰러지는 바람에 1년에 한 번뿐인 생일을 망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만 했다. 연회의 주인공을 볼 면목이 없을 따름이었다.

‘그 어떤 힐난도 받아들여야겠지…….’

응접실로 안내받은 라라는 조심스럽게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맞은편 소파를 볼 틈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운을 뗐다.

“여러모로 폐를 끼쳐 죄송…….”

“아뇨, 괜찮아요.”

“아뇨, 괜찮아요.”

“아뇨, 괜찮아요.”

“아뇨, 괜찮아요.”

“아뇨, 괜찮아요.”

라라는 자신의 귀가 이상해진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뒤늦게 고개를 들자 이번엔 눈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사물이 다섯 개로 늘어나 보였으니까.

‘공녀가 다섯쌍둥이였던가…….’

제각기 다른 드레스 차림의 엘리나 공녀들이 긴 소파에 일렬로 앉아있었다. 소름 끼칠 만큼 다 같은 얼굴이었으나 표정은 조금씩 다 달랐다.

<엘리나, 그녀가 바로 이 세계의 여주인공이다.>

그때 들려온 성스러운 음성에 라라는 귀에 손을 가져갔다. 귀를 살짝 막았으나 계속 들려오는 것이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닌, 제 머릿속에만 울리는 소리인 것 같았다.

‘공녀님이 여자 주인공이라고요? 아, 그러고 보니 소설 제목이…….’

<그렇다. 『엘리나의 다섯 남자들』의 세계는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느니라.>

‘…아니, 그전에 대체 누가 여주예요? 지금 제 눈에만 다섯 명으로 보이는 거 아니죠?’

<끔찍하게도, 여주는 한 명이라는 클리셰가 파괴됐느니라. 사악한 논클리셰의 짓이지.>

‘오, 미친.’

신의 앞에서 욕을 하다니 신성 모독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라라는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슬쩍 고개를 들자 열 개의 은색 눈동자가 제게로 향해져 왔다.

“왜 그러죠?”

“왜 그러죠?”

“왜 그러죠?”

“왜 그러죠?”

“왜 그러죠?”

미려한 이목구비의 여인들이 요정처럼 조막만 한 흰 얼굴들을 일제히 옆으로 까딱 기울였다. 연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은빛 머리카락이 가느다랗게 빛났다. 머리칼 사이로 둥그런 귀가 드러나고 갸름한 턱이 서서히 드러났다.

무섭다. 한 명이었으면 눈 호강할 엄청난 아름다움이었을 텐데, 곱하기 5가 되니 뭔가 아름다운 지네 인간을 보는 것 같아서 소름 끼쳤다.

라라는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자신의 그런 혼란스러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리나 공녀들은 한가롭게 대화를 나눴다.

“슈모르드 영애가 헷갈려 하는 것 같은데, 이참에 순서를 정해보자. 누가 1할래?”

“네가 1해. 난 4할래.”

“난 2! 2시켜줘!”

“3은 그럼 나인가.”

“그럼 전 5겠네요. 후훗.”

엘리나1, 엘리나2, 엘리나3, 엘리나4, 엘리나5는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제야 라라의 눈에도 그녀들의 성격이 제각기 다른 게 보였다. 목소리는 같은데 말씨나 억양도 묘하게 차이가 났다.

<리메이크할 때마다 성격이 바뀐 여주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있으니 보기 좋구나.>

‘이게 무슨 여주 정모도 아니고, 애초에 역하렘 아니었어요? 여주 다섯에 남주 다섯이라니, 그냥 단체 미팅이잖아요?!’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점잖게 말했다.

<필히 클리셰대로 흘러가야 될지니라. 너의 역할은 여주들과 남주들이 무사히 사랑에 빠질 수 있게 돕는 것이니라.>

‘이대로 계속 스토리 진행하는 거예요? 여주 상태가 말이 아닌데도……?’

<남주들보다 수적으로 불리한 것보다는 낫다고 본다만.>

‘아니, 무슨 패싸움 나가요? 사실 역하렘이 뭔지 모르시죠?!’

엑스트라의 말은 살포시 무시하고서 신은 다시금 근엄하게 운을 뗐다.

<서둘러야 한다.>

“슈모르드 양, 괜찮은가요? 아까부터 계속 말이 없어서…….”

“슈모르드 양, 멍하니 무슨 생각 하는 거예요?”

“슈모르드 양, 슬슬 돌아가 보는 게 어떤가요.”

“슈모르드 양, 갑자기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평소에 앓고 있던 지병이라도 있는 건가요?”

“슈모르드 양, 저는 신성력을 쓸 수 있어요. 괜찮다면 치료해 드릴게요.”

“호호……! 감사하지만, 저는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네요.”

<주인공들이 스스로 클리셰대로 행동하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 클리셰 보상 제도를 만들었느니라. 클리셰적인 행동을 할 때마다 속으로 바라는 것을 하나씩 얻게 될지니.>

신은 제법 자신의 아이디어에 흐뭇해하는 것 같았지만, 라라의 머릿속에는 개가 배변판 위에서 용변을 볼 때마다 간식을 하나씩 주며 유도하는 개 주인이 떠올랐다.

라라는 한숨을 쉬었다. 이에 엘리나들은 쓰러지고 난 후 건강이 더 악화된 것이 아니냐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뇨, 저 괜찮……! 주치의를 부르실 필욘……. 아니, 거기에다 신성력을 쏘시면 어떡해요!”

<…이 세계에 아직까지 클리셰라 부를 만한 것이 남아있는지 모르겠구나.>

떠들썩한 가운데, 신의 공허한 중얼거림을 라라는 듣지 못했다.

* * *

<일어나라, 선택받은 자여. 일어나야 한다. 세계는 네 손에 달렸단다. 1분 1초가 급박한 상황이다. 논클리셰의 힘이 이 세상을 삼키기까지 앞으로 시간문제다. 이대로 가다간 로맨스 판타지 세계는 파멸을 맞이할지니, 계약은 파기되고 통장도…….>

“…으으, 오늘 일요일이잖아요.”

강제 기상에 라라는 죽을 맛이었다. 이불 속에 기어들어 가 베개로 귀를 틀어막아도 소용없었다. 뒤늦게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란 걸 깨닫자 정말 죽고 싶어졌다.

신의 잔소리가 계속될수록 머릿속은 점점 선명해졌다. 잠은 멀리 달아났으나 몸과 정신은 피로하기 그지없었다. 잠이 절실했다. 좀비처럼 마지못해 비비적대며 일어난 라라는 어슴푸레한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있다가 시계를 확인했다.

“아니, 아직 새벽 4시 30분이잖아요!! 해도 안 떴어!”

<여주는 이미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있느니라.>

엘리나 공녀들은 잠도 없나, 라라는 마취총으로 쏴버리고 자신도 같이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 법이니라.>

‘일찍 일어난 벌레가 먹히는 법이죠…….’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것 또한 좋은 방법이다.>

‘즐길 수 없다면 어떻게든 피해야죠…….’

<자, 서둘러라, 선택받은 자여. 물론 난 이불 속이지만.>

따뜻한 이불 속에서 폰 게임을 하는 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썅.

라라는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옷을 갈아입었다. 가볍게 산책 나가는 정도의 단정한 원피스를 차려입고 화장대 앞에 앉아 대충 머리를 빗었다.

거울 속에는 코랄색 긴 머리를 어깨 너머로 쓸어 넘긴 소녀가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있었다.

‘…아, 죽고 싶어.’

<난 아직 너를 데려갈 생각이 없단다.>

‘일일이 받아주지 않으셔도 돼요……. 혼잣말…, 아니 혼자 생각한 거니까.’

힘없이 몸을 일으킨 라라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자고 있던 마부를 깨워 리니엇 공작 저택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적당히 공작저 주변에서 내린 라라는 저택 대문을 지키는 보초병들에게 다가가 자신이 만나러 왔음을 공녀에게 전해달라 얘기했다.

보초병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라라를 바라봤다. 리니엇 공작 가문의 무구한 역사 동안 꼭두새벽부터 찾아온 미친년은 너밖에 없다는 듯이.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당혹스런 티를 숨기며 보초병은 서둘러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는 “공녀님께서 연무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녀를 저택 연무장으로 안내해 주기 시작했다.

일은 수월하게 돌아갔다. 돔 형태의 연무장 입구에 들어선 라라는 생각보다 쾌적하고 넓은 공간에 속으로 감탄했다. 자신의 가문에도 연무장이 있기는 하지만 비교할 수준이 못 되었다.

사방이 탁 트인 구조라 그런지 공작 저택의 연회장보다도 넓어 보였다. 편편한 흙이 깔린 연무장 중앙에는 한 여인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검날을 따라 올라간 그곳에는 은빛 눈동자가 진지하게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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