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3)화 (3/115)

3화

돌연 귓가에 섬뜩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라라는 반사적으로 오빠의 품을 밀어냈다. 익숙한 얼굴이 정면에서 보였다. 그것은, 더는 오빠가 아니었다. 오빠의 얼굴을 한 인간쓰레기였다.

<선택받은… 정신이…….>

작은 날벌레가 불빛 옆을 요란스레 돌듯이 귀 주변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어지러이 맴돌았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하는 것처럼 드문드문 끊겨 뭐라 하는진 몰랐으나 분명 목소리였다. 중성적인, 하지만 새벽안개처럼 뿌옇고 신비스러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선택받은 자여, 정신이 드는가.>

그 순간 라라는 번쩍하고 정신이 들었다.

<나로 말하자면 이 로맨스 판타지 세계를 관장하고 있는 신이다.>

‘정말 신이세요……?’

<그러하다. 이 세계를 창조했으니 신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정말 신이시라면, 그럼 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 제1호는 뭐죠?’

<마치 비밀번호 힌트 같은 질문이구나. 답은 이것이로다.>

까맣던 시야에 무엇인가가 흐릿하게 나타났다. 아무도 알지 못하게 비밀 장치까지 달아 만든 옷장 속 보물 창고에 고이 모셔둔 15금, 19금 동인지들이었다.

8년간 모아온 동인지들은 꽤 장르가 다양했다. 어찌 소중하지 않을까. 혈기 왕성한 성인이었다. 부모님과 오빠는 시시껄렁한 연애 소설만 읽는 줄 알지만 그런 건 열두 살에 신세계를 접한 이후로 진즉 뗐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안다는 건 정말 신이라는 소리일 테다. 스파게티로 목을 조르고 싶다고 빌었던 게 잘못이었던 걸까. 혹시나 자신을 벌하러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라라는 얼굴의 핏기가 싹 가셨다.

‘죄송해요. 다시는 먹을 걸로 장난친다고 하지 않을게요.’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흠.>

감정을 잡는 배우처럼 신은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얘기했다.

<지금 세계는 크나큰 위험에 빠졌다.>

‘위험이요?’

<그렇다. 파멸을 불러올 정도로 크나큰 위험이다.>

‘파멸?’

낯선 단어에 라라의 동공이 무참히 떨렸다.

‘파멸이라니, 그건 대체… 대전쟁인 건가요? 아니면 대기근인 건가요?’

<그런 건 로판 스토리상 잘 나오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선 대전쟁이나 대기근보다 더 끔찍한 파멸이다. 잘 안 팔리면 창조주의 통장이 파멸되느니라.>

‘…….’

<이런 복잡하고 심오한 사정을 한낱 엑스트라인 네가 알 필요까진 없다.>

진짜 알고 싶지 않다. 라라가 신의 목소리를 외면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이제까지가 짝퉁이라면 진품처럼 근엄한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세계는 하나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제가 소설의 여자 주인공이란…….’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아…….’

<너는 일개 엑스트라일 뿐이니라.>

‘그렇구나……. 별로 기대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구요……. 정말이에요.’

라라가 아무렇지 않은 듯 슬쩍 입가에 미소를 띠었지만 오히려 상황을 더 어색하게 만들 뿐이었다. 신은 못 견디겠는지 슬며시 다른 장면을 빛 속에 띄웠다.

장엄한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은 세상이었다. 물이 아래로 흐르고, 불이 위로 솟구치고, 인간의 힘으로는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자연의 순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우주 만물의 질서를 바로잡는 힘, 우리는 그것을 ‘클리셰’라 부르느니라.>

온 세상을 끌어안은 성스러운 하얀 기운이 보였다.

<클리셰란 무릇 주인공이 어떤 사건에 처할지, 또 어떤 행동을 취할지 추측을 가능케 하는 길잡이 같은 것이란다. 여주를 여주답게 만들고, 남주를 남주답게 만들지.>

하얀 기운은 태초의 여주와 남주에게 깃들었다. 여주는 순진녀, 엉뚱녀, 차도녀, 여기사, 책벌레, 마법사, 정령술사 등 다양한 형태를 띠었고, 남주도 이에 맞춰 차도남, 집착남, 기사단장, 황제, 절륜남, 대형견 등의 형태를 띠었다.

<이것을 식상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클리셰가 있기에 세계는 질서를 유지하고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니라.>

로맨스가 로맨스다울 수 있게 만드는 힘, 클리셰.

<클리셰가 없다면 소설은 현실 혹은 막장이 되고 만다. 가령, 신입 사원인 여자 주인공 같은 경우엔 클리셰대로라면 20대 후반의 젊고 세련된 미남 상사가 있는 부서에 배정을 받겠지. 하지만 현실은 배 나온 유부남 과장님만 있을 뿐…….>

배 나온 유부남 과장님이라는 말이 신의 아픈 상처를 건드린 건지 성스럽던 하얀 기운이 점차 회색으로 탁하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 세계는 중학교 2학년 때 현실에 지친 내가 만든 상상 대피소였느니라. 시스콤 오빠에, 딸바보 아빠, 그리고 여주만을 찬양하는 미남들까지. 로판은 내 삶의 유일한 활력소였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이 세계는 나로 인해 창조된 세계. 그렇기에 창조주인 나의 심리 변화에 따라 수많은 형태로 변화했었다. 그 증거로 매년마다 리메이크를 감행했는데 그때마다 여주 성격이 다 달라졌느니라.>

‘그래도 돼요……?’

<중 2 때는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여주를 최고라고 여겼느니라. 하지만 중 3이 되면서 재밌고 엉뚱 발랄한 여주에게 끌렸느니라. 고 1 때는 걸크러시가 한창 유행해서 여기사로 갈아탔노라. 고 2 때는 공부만 하는 조용하고 지적인 여주가 뭔가 멋있어 보였고, 고 3 때는 수능 때문에 심적 변화가 컸는지 뭐든 자애롭게 받아들이는 성녀 타입의 여주가 좋아졌느니라.>

‘신이 그렇게 줏대가 없어도 돼요……?’

신은 어떤 장면을 라라에게 보여주었다. 모니터 앞에 앉은 여자가 타닥타닥 타자를 치거나 전화를 받는 장면이었다. 라라는 그것이 무엇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어도 여자의 표정이 몹시 지루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밤 9시가 되자 여자는 지친 몸을 이끌고 원룸으로 돌아왔다. 아까의 사람 꼴을 하고 있던 여자는 어디 가고 생눈에 안경을 끼고 넓은 앞머리를 깐 여자가 나타났다.

대충 어제 먹다 남은 치킨을 데워 먹은 여자는 침대 위에 누웠다. 휴대폰을 하던 도중 여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새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로판출판사 로맨스 담당자 김은영입니다.]

옅게 떨리는 손끝으로 여자는 스크롤을 내렸다.

[다름이 아니라 작가님께서 로판 사이트에서 연재하셨던 『엘리나의 다섯 남자들』을 읽고 메일로 연락드려 봅니다. 마지막 연재 날짜가 2014년인 걸로 보아 연중하신 것 같지만, 혹시 『엘리나의 다섯 남자들』 출간 계획은 없으신지요?]

여자는 소리를 지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2014년의 핫한 인기작이었던 만큼 작가님과는 진지하게 출간 계약에 관해 얘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그럼 회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출간 제의가 들어왔단다.>

‘보여주신 아까 그 여자가 신의 원래 모습이라고요?! 그것도 여신?!!’

이마가 넓고 눈썹은 없고 자잘한 여드름 자국이 남은 그 누런 얼굴이 머릿속에 박힌 채 떠나가지 않았다. 라라의 속마음을 읽은 신은 라라의 인생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수치스러운 흑역사를 조용히 정면에 띄웠다.

라라가 숙연해지자 신은 그제야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이 세계는 학생 때 간간이 취미로 연재했던 작품으로, 수능 100일 전부터는 완전히 손을 떼어버렸느니라.>

신의 목소리에 점차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세계의 수명이 닳고 있다. 내 나이 2n…….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간 너무 못 볼 꼴만 봐왔느니라. 출판사에서는 클리셰 범벅인 내 소설이 잘 팔릴 거라 말했지만 이건 내가 자그마치 n년 전에 썼던 소설…….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단다.>

그렇다, 신은 이 세계의 창조주로서 감을 잃은 것이었다. 마냥 어리고 순수했던 학생 때는 여주와 남주가 이어지는 게 뻔해도 재밌고, 뻔해서 더 재밌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K-드라마나 웹 소설에서 남발하는 클리셰에 점차 질려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 나의 고뇌가 이 세계에 미친 것인지 ‘논클리셰’라는 나에게 대항하는 사악한 힘이 태어났단다.>

어디선가 생성된 탁한 검은 기운이 하얀 기운을 잡아 삼키기 시작했다. 세상은 삽시간에 변해갔다.

하얀 기운은 분노했다. 점점 세상을 삼키며 배를 불리는 검은 기운과 부딪치며 싸우기 시작했다.

<클리셰를 부수고 무질서한 세계를 만들려는 논클리셰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느니라.>

세상은 다시 어두워졌다. 암울한 목소리가 바람조차 없는 공간에 잔잔히 들려왔다.

<광활한 먼 우주 저편에 닿을 정도로 싸움은 길어졌지만 논클리셰의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늘었다.>

심각한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이 묻어났다.

<논클리셰는 종내 남주와 여주가 이어지는 것을 방해할 것이니라. 완결이 그런 식으로 끝나면 욕을 먹을 테고, 독자가 보지 않는다면 계약도 절로 파기될 것이고, 통장도 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놈의 통장. 이쯤 되면 현실주의자인지, 아니면 단순 속물인지 알 만한 것이다. 조금 하찮은 눈을 하고 있는 라라의 모습에 신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창조주의 통장은 중요하다! 이 세계 모든 만물을 탄생시킨 근원이니. 창조주의 살과 뼈, 피로 이루어진 열 손가락이 키보드를 어루만지사, 지금의 이 세계가 창조되었다. 고로 너희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저… 지금 흥분하신 거예요?’

<머지않아 이 로맨스 판타지 세계는 붕괴할 것이다. 아주 참혹하게도.>

참혹하다고 해도 스케일이 커서 그런지 별로 와닿지 않는…….

<네 오빠를 보면 알 수 있다.>

‘…저희 오빠가 그 클리셰니, 논클리셰니 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당연하다. 너의 오빠에게 사악한 논클리셰의 힘이 미친 것이니라. 클리셰적인 시스콤 설정이 소멸된 것은 그 때문이지.>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의사의 선고처럼 잔인한 말이 떨어졌다.

<그는 평범한 현실 오빠일 뿐이다…….>

‘아… 아… 안 돼! 그런 잔인한……. 그럴 리 없어.’

울컥, 하고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자신을 볼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이 애정 넘치는 눈을 하던 오빠를, 하나뿐인 오빠를 잃을 순 없었다.

밤마다 거실에 나와서 후르르 쫩쫩 하고 게걸스럽게 스파게티를 냄비째 처먹는 그것이 오빠를 지배하게 놔둘 순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