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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2)화 (2/115)

2화

입장한 지 30분이 훌쩍 넘었지만 한자리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짝을 이루고 있는 남녀들을 부러운 눈길로 훑어대는 라라는 마치 처음 클럽에 입장해 딱딱하게 주위만 스캔하는 클럽 초보 같았다.

“혹시 혼자이신지요?”

그때였다. 운명처럼 들려온 낮은 코맹맹이 소리에 라라는 심장이 쿵 떨어졌다. 낯선 남자가 제게 말을 건 것은 성인이 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라라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마침 어머니도 안 계시고 훼방 놓을 오빠도 없었다. 과연 어떤 남자일까. 당황하지 않은 척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코를 부여잡은 인간쓰레기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스파게티 끓이고 가랬지?”

음성 변조술에 기함할 듯이 놀라는 것도 잠시, 그 끈질김과 집요함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스파게티 끓여달라고 연미복까지 빼입고서 쫓아오다니, 당해낼 수 없는 미친놈이었다.

“오빠 배고프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처먹으려면 혼자 끓여 처먹으라고! 꺼져, 제발! 내 인생을 방해하지 마!”

라라는 자신의 팔을 잡아끌려는 인간쓰레기의 손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상처받기는커녕 표독스럽게 눈을 부라리는 인간쓰레기를 두고 냅다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엄격한 예법과 기품을 항시 갖춰야 하는 명문가의 여식은 어떤 상황에서든 서두르는 방정맞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발목을 덮는 풍성한 드레스 자락 속에서 작은 발이 둥그런 포물선을 그리며 소리 없이 슈슉슉 뻗어졌다.

복도를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라라는 혼자 시간을 거스르는 것처럼 2.5배속으로 걷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겉으로 보기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며 그저 두 손을 뒷짐 지고 있는 미동 없는 자세라는 거였다.

바로 레이디 축지법이었다.

『남자들은 모르는 여성의 비밀―비밀이기에 더욱 아름답다―』의 저자 마가렛 클리슈거가 호수에서 우아하게 물살을 가르며 노니는 백조를 보고 고안해 낸 걸음걸이로, 신속하게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레이디 축지법을 쓴 걸까. 연회장의 끝인지 기둥이 보였다. 라라가 차가운 기둥을 짚고 숨을 고를 때였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기, 혼자이신 건가요?”

“네가 끓여 처먹으라고!”

“아, 저도 혼자라서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끝내주는 미남이었다. 라라는 아랫입술을 누른 앞니에 힘을 주어 안쪽으로 말았다. 쪽팔려서 죽고 싶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이제까지 사교계에서 익혀온 처세술은 빛을 발하는 법이었다.

라라는 두 손을 가지런히 단전에 모으며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쏟아져 오는 빛이 얼마나 눈부신지 잠시 눈앞이 아찔했지만 점차 익숙해졌다. 동시에 루비처럼 새빨갛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죄송해요, 호호. 모르는 분께 말실수를……. 처음이라 너무 긴장했나 봐요.”

살짝 말머리를 숙인 공손한 목소리가 라라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아뇨, 괜찮습니다.”

긴 흑발을 허리 아래로 늘어뜨린 미남자는 단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라라가 보기엔 전혀 단정치 못했다. 빨간 눈 때문인지 살짝 눈매를 휘었을 뿐인데도 퇴폐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뒤늦게 그가 벨벳 장갑에 싸인 한 손을 내밀었다. 홀린 듯이 몽롱한 기분을 떨쳐낸 라라는 마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라라 슈모르드라고 해요. 자작 영애구요.”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전 페레우스 슈란 엑사이오스라고 합니다.”

“외국분이신가요?”

“네, 보시다시피 마계 출신입니다.”

라라는 겉으론 대수롭지 않은 척 우아한 미소를 지었지만 입꼬리가 자꾸만 어색하게 내려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왕을 했었습니다. 지금은 잠시 여행 중이고요.”

“호호……. 그렇군요.”

라라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명백히 그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스스로를 마왕이라 여기며 한평생 지하실에서만 살았는지 그는 눈치 없이 계속 말을 걸어왔다.

“인간 세계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어색하고 긴장되네요. 지상이라 그런지 약간 쌀쌀해서 피부가 건조하게 변한 것 같아요. 죄송한데, 핸드크림 가지고 계신가요?”

‘왜 다른 데로 안 가는 거지? 혹시 내가 만만해 보이나!’

라라는 이럴 때일수록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일주일 동안 인간쓰레기에게 시달리면서 터득한 것이었다.

“저기요.”

“편하게 페레우스라고 불러주세요.”

“도 같은 거 안 믿어요. 야곱은 야채 곱창밖에 모르고요.”

“네……?”

“흑마술이나 사이비 집단 같은 거에는 관심 없다고요.”

“아,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저 그런 거 전파하고 다니는 그런 마족 아닙니다. 하하, 사이비도 아니고요.”

“그래서 진짜 마왕이시라고요?”

“네, 못 믿으시겠다면 포트폴리오라도 보여드릴까요? 천 년간 마왕직에 있으면서 제가 만든 건데…….”

“호호! 아뇨, 관심 없어요.”

“네……. 귀찮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쓱쓱 목덜미를 문지르며 페레우스는 시무룩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라라는 고고하게 팔짱을 끼고 기둥 앞에 섰다. 다시 돌아오면 이번에야말로 차갑게 무시해 줄 생각으로 말이다.

저벅저벅, 역시나 얼마 가지 않아 가직한 곳에서 정갈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바로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

“관심 없다고요!”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는 대화를 나눠보면 알겠지.”

허스키하면서도 감미로운 저음이었다. 라라가 수줍게 고개를 돌리자 다른 미남자가 세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장실을 찾고 있다만, 혹시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호호, 소리쳐서 죄송해요. 다른 사람과 착각했어요. 저, 근데 누구시죠?”

“정말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상체만 보아도 균형 잡혔다는 게 느껴지는 장건한 체격과 굵지만 아름다운 선으로 된 얼굴 위로 묘한 호기심이 어렸다. 라라는 평생 동안 이런 기품이 흐르는 얼굴을 본 기억이 없었다.

잔잔한 광채가 도는 검자줏빛 머리와 화려한 금장식이 달린 복식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귀한 신분이란 것만은 알 것 같았다. 그동안 길어진 침묵에 남자는 재밌군, 하고 입술을 휘어 올렸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낮은 가문의 여식이라면 내 얼굴을 모를 수도 있겠군. 이 나라의 황제 카를라히 킹저 이올느 페르티리오다.”

“호호……. 그렇군요.”

라라는 지친 눈빛을 드러낸 채 입술만 최대한 우아하게 휘었다.

‘무슨 로판도 아니고, 마왕과 황제를 음식물쓰레기 버리러 나올 때마다 마주치는 옆집 아저씨처럼 만난담!’

차라리 음식물 봉지라도 들고 있었다면 제 곁에 다가오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매끄러운 황금빛 바닥에 사뿐히 구두 밑창이 닿는 순간이었다. 별안간 띵, 하고 머리가 울렸다. 어질어질 주위 사물이 마구 돌기 시작하자 라라는 걸음을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작은 두 발이 제자리에서 나아가질 못하고 주춤거렸다. 곧이어 몸이 크게 휘청거렸으나 마땅히 지탱할 것이 없어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형태를 유지하려는 드레스 치마 때문에 엉덩이를 붙여 앉지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속절없이 무릎만 꿇을 때였다.

번쩍. 라라의 고개가 들어졌다. 동시에 눈앞에서 아찔할 만큼 찬란한 광휘가 쏟아져 내렸다.

천장의 샹들리에로부터 퍼져 나온 빛이 아니었다. 시야를 강하게 찔러오는 그 성스러운 빛은 어쩌면 제 눈에만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금방이라도 감미로운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천사의 깃털이 흩날릴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라라… 슈모르드…….>

부연 안개처럼 신비로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아까의 그 겉돌던 이명이 단순 환청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듯이 선명한 음성이었다.

<…신의 목소리를 듣는 소녀여……. 너는 선택받은…….>

머릿속의 모든 상념을 걷어내며 오로지 그 목소리만이 가득 머리를 메우는 기분이었다. 으으, 하는 신음이 절로 입 안에서 터져 나왔다.

<네게… 명하노니, 짊어질 사명… 그것은…….>

“아으윽, 목소리가……!”

<…아아, 삐이이이익― 마이크테스트. 하나, 둘.>

“너무… 커…….”

뇌에다가 직접 최대 음량의 이어폰을 꽂아놓은 것만 같았다.

실수로 음량 키우기 버튼을 꾹 눌러서 ‘오랫동안 큰 소리로 음악을 들으면 청각이 손상될 수 있습니다. 안전 범위보다 더 위로 음량을 높일까요?’ 하고 친절한 안내 문구가 떠오를 때의 그 고통. 21세기 현대인이 겪는다는 그 끔찍한 고통을 라라는 혈혈단신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아…….”

그러나 여인 혼자서 감당키에는 너무나도 버겁고 참혹한 고통이었다. 바닥에 떨어져 이지러진 꽃잎처럼 라라의 몸이 곧 허물어졌다.

“이봐! 영애, 정신 차려라!”

누군가의 품이 자신을 받아주는 게 느껴졌으나 라라는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너무나도 시끄러웠다. 그때 실낱처럼 희미한 목소리가 수많은 소음을 뚫고 들려왔다. 그녀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야, 라라! 죽은 거 아니지? 앞으로 누구보고 끓이라고!”

‘오, 신이시여. 만약 계시다면 스파게티 면으로 저 자식 목을 조르고 가게 해주세요.’

라라의 기도에 놀랍게도 신이 응답했다.

* * *

꿈을 꾸었다. 아주 아득하고도 그리운 꿈. 그것이 오빠와의 어린 시절 추억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라라, 많이 아파?”

“으아아앙.”

“미안해. 내가 바로 뛰어가서 잡아줬어야 하는데…….”

계단을 내려오다 맨 마지막 칸에서 발이 걸려 넘어져 펑펑 울었던 날일 것이다.

까진 무릎에선 피가 배어 나왔다. 제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오빠는 눈물을 글썽였다. 마치 자신이 더 아프다는 듯이. 그러곤 동그랗게 모은 입술을 상처 앞에 가져가 호호, 하고 바람을 불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괜찮아. 오빠가 호 해줬으니까.”

오빠의 어깨를 끌어안아 주자 짧은 코랄빛 머리가 흠칫 흔들렸다. 라라는 오빠의 품이 좋았다. 늘 따스하고,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야, 스파게티 끓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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