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1)화 (1/115)

1화


1장 프롤로그의 정석

뜨거워, 뜨거워.

입가에 맴도는 말을 뱉지 못하고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찌를 듯한 강렬한 빛 너머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 너머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의 눈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목소리가 점점 아득해지는 게 느껴졌다. 살을 파고드는 밧줄 속에서 필사의 몸부림을 쳤지만 찾아오는 것은 고통뿐이었다.

발끝으로 화르륵 번져오는 불길이 사납다. 끔찍한 둔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까맣게 죽은 눈에서 바닷물처럼 짠 눈물만 떨굴 때였다.

탁한 잿빛 연기 너머로 섬뜩한 눈이 나타났다. 수 초도 지나지 않아 연기와 함께 흩어졌지만 그 눈은 가슴속 깊이 박힌 지 오래였다. 왜 나를 죽이는 거예요, 대체 왜, 왜……. 목청이 터져라 외치고 싶었지만 독한 연기에 호흡기가 콱콱 막혔다.

화형대 구실을 하는 나무 기둥을 가로지른 눈물이 환한 금빛으로 일렁이는 바닥에 아롱졌다.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의식 너머로 한 줄기 빛을 본 것 같기도 했다.

“헉… 헉…….”

라라는 눈을 떴다. 눈가는 푹 젖은 지 오래였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까만 방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며 숨을 크게 헐떡거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방문이 벌컥 열렸다.

“라라! 무슨 일이야!”

바로 옆방에서 자고 있던 오빠 로렌스가 비명 소리에 헐레벌떡 달려온 모습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라라는 상체를 일으켜 앉아 다가온 오빠의 품에 안겼다.

“…악몽 꿨어. 그 악몽…….”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는 여동생의 모습에 로렌스의 표정도 울적하게 변했다. 소년은 입술을 슬그머니 깨물다가 곧 미소 지었다. 그러곤 여동생을 살짝 품에서 떨어뜨리곤 손을 뻗어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

“괜찮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악몽은 현실이 아니야.”

“응…….”

“오늘은 같이 잘까?”

“나 열두 살이라구.”

“그래도 넌 나한테 애기인 걸? 귀여워.”

슥슥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오빠에게 라라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자기는 열다섯 살이면서…….” 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오빠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가슴이 절로 진정되었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눕자 로렌스는 동생의 옆에 따라 누워서 동생의 배를 도닥도닥 두들겨 주었다. 라라가 잠들 때까지.

* * *

라라 슈모르드.

1남 1녀를 둔 슈모르드 자작가의 막내딸이자 평범하지만 소소한 행복 속에서 자란 영애였다. 팔불출인 오빠와 말로 표현은 하지 않아도 늘 자상한 아버지, 그리고 우아한 어머니까지.

“머리 예쁘게 땋아줘, 모니카.”

“맡겨만 주세요.”

오늘은 라라의 열두 번째 생일이었다. 라라는 한껏 기대에 부푼 얼굴로 거울 앞에 앉아있었다. 오뚝하지 않아도 나름 귀엽게 생긴 코와 갸름하진 않아도 동그래서 귀여운 얼굴형. 아무튼 적당히 귀여운 얼굴이었다.

라라는 코랄색 머리와 잘 어울리는 연둣빛 리본을 매달고 방을 나섰다. 얼마 전 터득했던 대로 복도를 사뿐사뿐 우아하게 걸어 가문의 작은 연회장에 들어섰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생일 연회의 시작이었다.

“라라 양, 생일 축하해요.”

“이건 생일 선물이에요.”

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영애들과.

“어머나, 자작 영애는 참 선하게 생겼네요.”

“호호, 듣던 대로 아주 공부를 잘할 것같이 생겼네요.”

적당히 칭찬해 주는 귀부인들과.

“영애, 저에게 첫 파트너의 영광을 주실 순…….”

“미안하지만 오빠인 저와 먼저 추기로 약속해서요. 그렇지, 라라?”

적당히 좀 과보호해 줬으면 좋겠을 팔불출 오빠까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 날이었다. 라라는 오빠와 손을 잡고 사교춤을 추고 케이크도 맛보고 부모님에게 뺨 키스도 받으며 즐거운 생일을 마무리했다.

‘기대돼! 무슨 선물일까?’

뭐니 뭐니 해도 생일의 즐거움은 선물 개봉이었다. 라라는 분홍색의 하늘하늘한 파자마 차림을 하고 침대에 앉아 쌓아놓은 선물 상자를 풀어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선물은 부모님의 선물이었다. 저번에 갖고 싶다고 했던 드레스가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다음은 오빠의 선물로 저번에 약속한 소녀 브랜드의 목걸이와 반지였다. 라라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음 선물을 개봉했다.

‘…뭐야, 이게?’

엄청 꼼꼼히 포장을 해놔서 대단한 게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꼴랑 책 한 권 들어있었다. 실망감에 콧잔등을 일그러뜨린 라라는 상자의 윗면과 뒷면을 살펴보았다. 누가 준 건지 이름조차 적혀있지 않았다.

‘책이라니, 시시해!’

그래도 재밌는 연애 소설일지 모르니 라라는 슬쩍 책 표지를 들춰보았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무지 표지가 수상쩍다 여겼는데 그 안에 또 다른 표지가 있었다.

[로브신사X릴리카]

이게 대체 뭘 뜻하는 거지? X는 뭐람? 갸웃하다가 라라는 첫 장을 휙 넘겼다. 무려 칸이 쳐진 그림이었다.

처음엔 엎드려서 그림만 대충대충 훑던 라라는 어느새 정좌한 채 대사와 지문까지 세세하게 읽게 되었다. 이것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세계였다. 읽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숨이 가빠지고 눈이 빙빙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라라 생애 첫 동인지였다.


2장 집착남주의 정석

8년이 흘러 라라는 어느덧 스무 살이 되었다. 그동안 라라의 인생은 사건 사고 없이 평탄하게 흘러갔다. 일개 시민다운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인생이었다.

평소와 같은 하루였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밤, 오빠인 로렌스가 방에 들이닥치기 전까지만 해도.

“야, 야, 일어나 봐.”

라라는 자신의 등을 툭툭 차는 성의 없는 발길질에 눈을 떠야만 했다. 눈을 비비며 돌아보자 어두운 침실 안에 누군가가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 오빠?”

무단 침입한 괴한이 아닌가 싶었으나 아무리 봐도 자신의 오빠가 분명했다. 하지만 침대 기둥에 삐딱하게 어깨를 기대고 서있는 모습은 굉장히 낯설었다.

“혹시 밖에서 술 마셨어?”

“술?”

피식 웃는 소리를 뒤로하고 울린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신경질적이었다. 한 번도 제게 짜증을 드러내 본 적이 없는, 오히려 자신의 투정을 받아줬으면 받아줬을 상냥하고 착한 오빠였다.

이 모습은 확실히 이상했다.

“…오빠, 장난치지 말고 한밤중에 왜 그러는…….”

“잔말 말고 나와서 스파게티 끓여라.”

“스파게티……? 이 밤중에?”

라라가 혼란한 눈길을 던졌다.

“안 나와? 오빠 배고프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생각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양 로렌스는 빠르게 방문을 빠져나갔다.

그날 밤 오빠에게 스파게티를 끓여줘선 안 되었다고 라라는 생각했다. 그 뒤로 자신을 대하는 오빠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으니 말이다.

가문에 있는 사용인들을 놔두고 굳이 그녀를 시켜댔다. 뭐 가져와라, 불 꺼달라, 스파게티 끓여라, 설거지는 네가 하는 거 알지 등 자신의 몸뚱이에 손과 발이 달렸다는 인식조차 못 하는 사람 같았다.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고, 여동생을 가장 사랑하며, 세상에 다시없을 만큼 완벽해 보이던 오빠라는 인간은 하루아침에 나태한 인간쓰레기가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야 할 자작가의 업무는 내팽개친 채 종일을 소파 위에서 보냈다.

“야, 라라. 스파게티 좀 끓여 와.”

‘또 시작이네.’

라라는 저택 계단으로 올라가다가 2층 오빠 방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슬그머니 발소리를 죽여 내려갔다. 사흘간 저 지긋지긋한 명령조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얘, 라라야.”

막 탈출했다고 생각한 그때, 맞은편 복도에서 나긋나긋한 음성이 그녀를 붙잡았다. 어머니인 슈모르드 자작 부인이었다.

“네 오빠 몸 상태는 좀 나아져 보이니? 걱정이구나. 건강하던 그 애가 며칠씩이나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니…….”

“음, 저기 어머니, 제 생각에는 말이죠. 오빠는 몸이 아니라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역시 기사단 승급 시험 때문에 마음 부담이 컸던 모양이구나. 정신적으로 이렇게나 힘들어할 줄이야.”

“아뇨, 그게 아니라 미친 것 같다고요!”

답답함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 라라는 곧바로 입을 틀어막았다. 깜짝 놀란 자작 부인이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리 오빠가 최근 태도가 달라졌다고 해도 그렇지, 네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동생인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손수건을 꺼내 들어 황급히 눈가를 닦는 어머니였다. 라라는 죄송스러운 마음과 동시에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어머니에게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울고 싶은 건 저라고요.’

오빠의 예전 모습이 그리웠다. 절실하리만치. 그런 그녀의 서글픈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위층에서는 어김없이 “야, 스파게티 끓여 오라고!”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 * *

“네가 끓여 처먹으라고!”

라라는 시녀들의 치장을 받으면서 옆방에다 대고 소리쳤다.

오빠가 변한 지 일주일. 라라는 더 이상 오빠를 오빠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그것은 오빠에 대한 모욕이었기 때문에.

인간쓰레기가 오빠 행세를 한 채 이 저택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빠는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저 같잖은 인간쓰레기를 벌하고 내쫓아 줄 것이다. 현재로썬 그렇게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무도회장에 나갈 채비를 끝낸 라라는 조신한 걸음걸이로 저택을 나섰다. 2층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민 코랄빛 머리의 청년이 기다렸다는 듯이 격렬한 배웅을 해주었다.

“당장 와서 스파게티 안 끓이냐? 어! 네가 아끼는 연애 소설들이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꼴 보고 싶지?”

“모니카, 내 방문 단단히 걸어 잠가, 알겠지?”

“네, 아가씨. 조심히 다녀오세요.”

전속 시녀 모니카의 인사를 뒤로한 채 라라는 무도회장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어떤 재앙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 채.

* * *

리니엇 공작 가문에서 성대한 무도회가 개최된 것은 약 1년 만이었다. 다름 아닌 엘리나 공녀의 생일이 돌아온 것이다.

붓꽃처럼 아래로 우아하게 늘어져 환한 금빛을 터뜨리는 샹들리에가 드높은 천장을 장식했고, 그 아래에선 저마다 화려하게 꾸민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라라는 주위를 훑으며 아는 영애가 있나 찾아보았으나 하나같이 낯선 얼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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