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 * *
“으윽.”
어둠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백색의 공간에서 유리한이 힘겹게 눈을 떴다.
“큭……!”
갑작스럽게 목을 옥죄는 손길에 곧바로 눈가를 찡그렸지만 말이다.
“죽어, 리한.”
살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한이 이를 악물며,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멀린, 끈질긴 남자는 별로야. 인기도 많았으면서 그것도 몰라?”
“몰라.”
얼굴의 반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남자가 비웃음을 내걸며 반문했다.
“애초에 내가 그런 걸 알아야 할 이유가 없잖아?”
“하긴, 너는 연애에 관심이라고는 없었지.”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잖아?”
멀린 아서가 키득거렸다.
“지한이와 함께 살아남는 것밖에 몰랐으면서, 새삼스레 연애에 관심 많았던 척을 하네?”
“닥쳐.”
유리한이 이를 드러내며 창을 손에 쥐었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보자.”
“하하! 바라던 바야.”
멀린 아서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된 거, 저승길 길동무로 꼭 데리고 갈게. 나만 가면 너무 억울하잖아?”
하지만 곧 그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내가 어떻게 무한의 마력을 손에 쥐었는데!”
멀린 아서는 니르로르의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목숨을 희생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제자들의 목숨을 대가로 겨우 살아남게 되었다. 그 대신 홀로 수십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지만.
‘그렇다고 해도!’
드디어 목적을 이루었는데 눈앞의 여자가 다 망쳐버렸다.
“용서 못 해.”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유리한이 미소를 그렸다.
그늘 한 점 없는 빛의 공간. 그 속에서 유리한이 그림자를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녀의 힘이 반응하지 않았다.
어둠을 지배하는 자(S)의 칭호 효과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그럴 리가!’
유리한이 미간을 좁혔다.
[STATUS]
* 플레이어: 유리한(Yu Rihan)
* 레벨: 83Lv
* 칭호: 유리한 세계를 여는 자(S), 어둠을 지배하는 자(S), 드래곤 슬레이어(A)
* 스킬: 유리한 세계(S), 오감 지배자(A), 뛰어난 암기왕(A), 냉철한 심판자(A), 망자의 아우성(B), 진실 감별(B), 뜻밖의 기연(C)
[스탯]
* 근력: 3,094
* 체력: 3,183
* 정신력: 3,032
* 속도: 3,168
* 명성: 3,672
* 마력: ?
* 종속 관계: 니르로르
모든 능력치가 그대로였다.
아니, 달라진 게 하나 존재하기는 했다.
마력.
마력이 측정 불가로 떴다.
‘어떻게 된 일이지?’
의아함도 잠시, 멀린 아서의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리한? 힘을 사용하지 못하겠어?”
유리한이 얼굴을 찌푸렸다.
“네 짓이야?”
멀린 아서는 싱긋 웃었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 있겠네. 여긴 내가 모든 힘을 쏟아 만든 곳이거든.”
애초에 죽을 작정을 하고서 만든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너는 어떠한 힘도 사용할 수 없을 거야.”
이제 그녀가 맞이할 수 있는 건 죽음뿐이다.
“그래?”
유리한이 피식 웃었다.
“나를 정말로 죽이고 싶은가 보네? 이렇게 애를 쓴 걸 보면.”
“당연하지.”
멀린 아서가 입매를 비틀었다.
“내가 말했잖아? 네가 다 망쳐버렸다고.”
유리한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온 세상을 다 가졌을 거다.
그뿐이랴?
무한의 마력을 이용해 머릿속으로만 꿈꾸던 세상을 실현했을 거다.
그래, 그랬을 거란 말이다.
“기필코 죽여버리겠어.”
“하하.”
유리한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멀린, 너는 정말로 구제 불능이구나?”
유지한이 기껏 용서한다고 했는데도 그는 변함이 없었다.
힘으로서 남을 복종시키고, 제 이상을 강요하는 자.
자기보다 강한 이가 있으면 경계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 힘을 빼앗는 자.
그렇게 자기만의 세상을 구현하고, 반대하면 가차 없이 몰살하는 자.
그게 멀린 아서였다.
‘하긴, 그러니까 지한이한테 그 짓거리를 저지른 거겠지.’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유리한은 튜토리얼을 겪으면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목숨을 믿고 맡겼던 동료를 제 손으로 죽여야 한다니.
“아까 그냥 죽지 그랬어?”
그녀가 피워낸 불꽃에서 목숨을 다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이런 괴로움은 느낄 필요가 없었을 텐데.
유리한이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는 인사 따위 하지 않을 거야.”
“바라던 바야.”
멀린 아서가 공간을 움직여 빛을 터트렸다.
“우리 어디 끝을 내보자고.”
눈부시도록 밝게 빛나는 공간 속에서 유리한이 서글프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문득, 니르로르를 죽이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던 때가 떠올랐다.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 무엇보다 환한 빛을 터트렸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고오오오오―!
환한 빛을 모조리 집어삼킬 정도의 어둠을 터트릴 차례였다.
“어떻게! 여기서 어떻게 힘을 쓰는 거지?!”
어느 순간 생겨나 빛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어둠에 멀린 아서가 경악했다.
유리한이 미소를 그렸다.
“믿었을 뿐이야.”
측정 불가로 떠 있던 마력.
유리한은 그에 모든 걸 걸고서 제 힘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을 지한이를.”
유지한은 온 탑에 존재한다. 그의 마력이 곳곳에 흩뿌려졌기에 가능한 일.
유리한은 그 사실을 믿었다.
이 공간이 암만 멀린 아서에 의해 만들어졌다 해도, 결국 탑 안에 존재하는 곳 아닌가?
유리한은 사방팔방으로 그림자를 뻗으며 애달프게 웃었다.
“안 돼! 빌어먹을, 유리한!!”
멀린 아서가 악에 받쳐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왜 너는 자꾸만 나를 뛰어넘는 거야! 왜 나보다 잘난 거냐고! 왜!!”
열등감을 한껏 쏟아내는 목소리에 유리한이 대답했다.
“멀린,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그가.
마법을 자유자재로 시전하며 많은 사람을 구하던 멀린 아서가.
“나는 네가 부러웠어.”
자신에게 어떻게든 마법을 가르쳐 주려다가 포기했던 그가 정말 부러웠었다.
증오가 뒤섞인 외침이 어둠에 먹혀 사라졌다.
유리한은 빛을 삼켜버린 어둠을 물끄러미 보다 눈을 감아버렸다.
조금 쉬고 싶었다.
* * *
유리한이 사라졌다.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은 백방으로 그녀를 찾아다녔다.
죽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녀와 종속 관계에 있는 니르로르가 너무나도 멀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유리한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그녀는 종적을 감춰버리고 말았다.
마치,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말이다.
디에스 라고도 고요한도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탑을 나왔다.
“아저씨이!”
디에스 라고가 아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는 아저씨가 아니다.”
“아저씨예요!”
또박또박 대꾸하는 목소리에 디에스 라고가 픽 웃었다.
“유시우.”
“네!”
아이는 못 본 사이에 부쩍 자라있었다.
머리 하나는 더 커진 느낌이었다.
문득, 유리한이 저 모습을 봤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떠올리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디에스 라고가 입술을 달싹거리다 아이한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도저히 그녀를 닮은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가서 네가 좋아하는 형들이랑 놀아라.”
“아저씨, 삐졌어요?”
“안 삐졌다.”
“거짓말!”
유시우가 디에스 라고의 품을 억지로 파고들며 재잘거렸다.
“형이라고 불러 줄게요! 삐지지 마요!”
“안 삐졌다니까.”
디에스 라고가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유시우가 그 손길에 배시시 웃고는 물었다.
“고모는 언제 와요?”
머리를 헝클어뜨리던 손이 멈췄다.
“형들이 다섯 밤만 자면 온다고 했는데 안 왔어요!”
“다섯 밤이 아니라 오백 밤이라고 했느니라.”
“잘생긴 형아!”
유시우가 벌떡 일어나 니르로르한테 달려갔다.
니르로르가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는 말했다.
“오백 밤을 자면 유리한이 돌아온다고 했지 않느냐?”
“아니에요! 다섯 밤이라고 했어요! 분명 그렇게 들었는데?”
“그럼 다섯 밤만 더 세거라.”
“싫어요!”
유시우가 빼액 소리 질렀다.
“고모 보고 싶어!”
“짐도 보고 싶으니라.”
니르로르가 그리움에 잠긴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 고모가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정말로 듣고 싶구나.”
“비아냥거려요? 고모가요? 누구를요? 그런데 비아냥거린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비아냥거린다는 건, 놀린다는 뜻이다. 이 짐을 말이다.”
“거짓말!”
유시우가 까르르 웃을 때였다.
“다들 여기 있었어요?”
몰라보게 수척해진 고요한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니르로르에게 안겨 있던 유시우가 이번에는 두 팔을 벌리며 고요한에게 달려갔다.
“요한 형! 다섯 밤만 자고 나면 고모가 온다고 했죠?”
“다섯 밤이 아니라 오백 밤.”
“히잉!”
아이가 입술을 삐죽였다.
“오백 밤은 너무 긴데!”
고요한은 아이의 칭얼거림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탑 밖으로 나오고서야 되찾은 웃음이었다.
마계에서 그는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미친 사람처럼 유리한을 찾아다녔으니까.
“그보다, 이제 서아 보러 갈 시간이에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디에스 라고가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하루에 한 번 유시우를 데리고 유서아를 면회하고 있었다.
원래는 행복 머니의 식구들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들은 현재 잠시 휴가를 즐기는 중이었다.
어쨌거나 그건 유시우가 가장 고대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누나 보러 가요?”
“그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심통 난 얼굴로 고모를 찾더니, 제 누나를 만나러 간다는 소리에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
“빨리 가요!”
티 없이 맑은 목소리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행복 머니 사무실을 나와 차례차례 차에 올라탈 때였다.
니르로르가 제자리에 멈춰 서서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니르로르 씨? 왜 그러세요?”
고요한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니르로르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요한의 걱정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 사람의 이름을 내뱉었다.
“유리한아.”
고요한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