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221)화 (221/235)

221화 

* * *

마족을 따라 지하 깊숙한 곳으로 갈수록 투구를 뒤집어쓴 유리한의 낯빛은 어둡게 변해갔다.

짙은 피 냄새가 코를 자극해 대기 시작한 탓이다.

“으… 으으…….”

“어, 엄마아.”

고통에 찬 작은 목소리들도 들려오는 듯했다.

그 소리를 고요한도 제로 바니스타도 들었을 테지만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가장 분노해야 할 여자가 조용히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러지 않는 사람이, 아니, 드래곤이 한 마리 있었다.

- 유리한아, 괜찮으냐?

걱정 어린 물음에 유리한이 말했다.

“괜찮아.”

그녀의 목소리는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니르로르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유리한아, 말만 해다오.

“무슨 말?”

- 네가 이곳을 불태우라고 하면 그럴 것이고, 저 뾰족 귀를 죽이라고 하면 기꺼이 죽여주겠느니라.

앞장서서 걷고 있던 마족이 꿀꺽 침을 삼켰다.

웬 도마뱀의 말이 절대 빈말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어쨌거나 유리한은 니르로르의 제안에 대답했다.

“네가 그래 줄 필요 없어.”

- 그렇지만.

“해도 내가 해.”

그녀는 담담하게 내뱉었다.

“불태워도 내가 불태울 거고, 저 마족 놈도 내가 죽일 거야. 물론, 하는 짓 봐서 살려줄 수도 있지만.”

사지 멀쩡하게 살려주지는 않으리라.

그때, 유리한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육중한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문 안에서 고통에 겨운 신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고통스럽기에 이 철문을 뚫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까?

“저… 열겠습니다…….”

마족이 유리한의 눈치를 보며 문을 밀었다.

끼이익!

낡았는지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동시에 유리한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흐으… 그냥…….”

“그냥 이제 죽여줘.”

“아파… 아파아……!”

“차라리 그냥 죽여줘, 죽여달란 말이야!”

“으아아악!”

곳곳에서 스스로의 죽음을 바라는 신음이 들려왔다.

인간, 마족 할 것 없이 모두 몸의 절반 이상이 흐물흐물 녹아 있었다.

피 냄새는 바로 그곳에서 나고 있었다. 흘러내린 피부로 진물과 핏물이 섞여 나왔으니까.

분명, 무한의 마력에 대한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 꼴은 뭐란 말인가?

‘실험이 바뀐 건가?’

그럴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지한이도 사실 이런 상황을 겪은 건가?’

손톱이 주먹을 파고들었다.

아플 만도 하건만 유리한은 손을 풀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분노하기만 했다.

마구잡이로 날뛰지 않도록 최대한 이성의 끈을 붙잡으면서.

“거기, 누구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유리한이 고개를 들었다.

꽤 아름다운 미청년이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느긋하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니르로르, 숨어.”

- 알겠느니라.

니르로르가 감옥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유리한은 다가오는 남자를 투구 안에서 물끄러미 쳐다봤다.

병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잘 관리된 피부, 그리고 온몸을 감싸고 있는 고급 비단.

“글러트니 님!”

이 성의 주인, 글러트니였다.

유리한에게 이곳을 안내해 준 마족이 황급히 고개 숙였다. 유리한도 그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내려 인사했다.

“글러트니 님을 뵙습니다.”

“음.”

글러트니가 미간을 좁혔다.

“일개 병사들이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조금 전의 소란이 혹시 자네들 짓이었나?”

“죄송합니다, 글러트니 님.”

유리한이 눈치 좋게 대답했다.

“정말 자네들이었나 보군?”

“네.”

유리한이 곧장 변명했다.

“실험체들이 난동을 부리지 뭡니까? 제압하는 과정에서 소란이 잠깐 일었었습니다.”

“그렇군.”

글러트니가 눈웃음을 지었다.

“열심히 하는 것 같아 참으로 좋군. 역시 나의 병사야.”

“과찬이십니다.”

“그래서?”

“네?”

“그래서 이곳에 온 이유가 뭔지 물었다네. 설마 내가 여기 있을 줄 알고 온 건가?”

글러트니가 붉은 눈을 번들거리며 물었다.

충분히 위협을 받은 상황임에도 유리한은 겁먹은 기색 따위 없이 태연하게 대처했다.

“설마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사실, 저희가 이번에 새로 배정받아서 말입니다. 마크 님께 안내를 부탁하고 있었습니다.”

마크.

원래 그 이름은 유리한이 빌리고 있는 이 갑옷의 주인 되는 자의 것이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자 마족은 당황한 눈치였으나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 새로 온 녀석들인데 제가 이것저것 가르쳐 주는 중이었습니다.”

“그래?”

위협적으로 반짝이던 글러트니의 두 눈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촤아악!

피가 흩뿌려졌다.

“끄… 흡…….”

길을 안내해 주던 마족이 목을 부여잡고는 쓰러졌다.

“쿨럭!”

기침을 내뱉을 때마다 피가 한 움큼씩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유리한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마족의 목을 베어버린 건 글러트니였다.

그가 날카로워진 손톱을 원래대로 되돌아가게 만들고는, 옆에 있던 이에게서 손수건을 받았다.

“이곳은 함부로 들어서서는 안 되는 곳이거늘.”

글러트니가 짧게 혀를 찼다.

심기 불편한 목소리에 그의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가 없어 그런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죽여야지.”

글러트니가 발을 들고는 마족의 머리를 짓눌렸다. 피를 토해내고 있던 마족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너희는 내 특별히 살려주마. 수준 이하의 녀석에게 잘못 걸린 것뿐이었을 테니.”

유리한은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 숙였다.

“네, 글러트니 님. 감사합니다.”

“이왕 이곳에 온 거 구경하도록 하거라. 여기 갇혀 있는 녀석들도 너희가 감시해야 할 녀석들이니.”

언제는 함부로 들어와선 안 되는 곳이라더니.

유리한은 입술 안쪽을 꾹 깨물며 글러트니를 노려봤다. 양손 가득 낀, 번쩍거리는 금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탐욕에 눈이 먼 자라는 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때였다.

“글러트니 님, 이만 돌아가 보셔야겠습니다.”

“흠?”

“보좌관님께서 부르십니다.”

유리한이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보좌관.

멀린 아서일 게 분명한 그가 글러트니를 부르다니.

쿵, 쿠웅!

유리한은 심장이 거세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글러트니를 협박해 함께 그의 보좌관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 안 된다.

보좌관이 글러트니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의 방에 침입해 디에스 라고의 흔적을 찾아야 했다.

‘보좌관의 방을 아는 놈이 죽어버렸지만.’

다른 놈을 구하면 되니 괜찮다.

…라고 생각하던 순간.

“글러트니 님,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보좌관님을 뵙고 싶습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말했다.

유리한이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 멍청이가?!’

그렇게 발목 잡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일을 저지르는구나, 제로 바니스타!

제로 바니스타는 보좌관의 정체를 모르고 있을 거다.

그가 알고 있는 건 하나.

바로, 트라이.

자신의 친구에 대한 행방뿐.

그래서 제로 바니스타는 글러트니에게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고 있는 거였다.

보좌관이 있는 자리에는 그의 종도 나타날 거고, 그럼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그 종이 정말 자신의 친구인지 아닌지 말이다.

글러트니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제로 바니스타를 아래위로 흘긋거렸다.

그 시선이 불쾌할 만도 하건만, 제로 바니스타는 씩씩하게 말했다.

“무리한 부탁이라면 들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개 병사가 감히 글러트니 님께 부탁하는 꼴도 우습지만 말입니다.”

“내 보좌관을 보려는 이유는?”

“오래전부터 그분을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존경?”

“네, 그렇습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두 눈을 반짝거렸다.

그런다고 해도, 투구를 쓴 이상 글러트니가 그 눈을 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제로 바니스타는 재잘거렸다.

“보좌관님께서 글러트니 님의 영지에 모습을 드러낸 건, 정확히 13년 전의 일이지 않습니까?”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글러트니의 두 눈이 번뜩였다.

제로 바니스타는 목울대가 크게 움직일 만큼 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오래전부터 그분을 존경해 왔다고요.”

그래서 닥치는 대로 그분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면서 말을 이었다.

“그분은 제 은인이십니다. 병들어 죽어가던 제 어머니를 살려주셨으니까요.”

거짓말이었다.

제로 바니스타는 제 부모를 몰랐다. 그러니 어머니를 알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게 먹혔다.

“그래, 내 보좌관이 과거에 그런 봉사 활동을 했다고 들은 것 같군. 워낙 착한 놈이라서 말일세.”

유리한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제로 바니스타를 쳐다봤다. 그가 저 정보를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 안 알려줬단 말이지?’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린 순간.

“그래, 좋다.”

글러트니가 입을 열었다.

“너는 나를 따라오도록. 나머지는, 그래. 제이미.”

“네, 글러트니 님.”

옆에 있던 마족이 곧장 대답했다.

“네가 저 녀석들의 안내를 좀 해주거라. 실험장으로 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네, 알겠습니다.”

제이미는 드러나는 표정 없이 제 주인의 말을 수락했다. 글러트니는 그대로 뒤돌아 나갔다. 제로 바니스타를 데리고서.

유리한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픈 심정이었다.

‘빌어먹을 제로 바니스타.’

보좌관이 정말 멀린 아서라면 백작은 분명 죽을 것이다.

멀린은 제로 바니스타가 자신을 방해하러 왔다고 생각할 테니까.

보좌관의 종이 그의 친구인 트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터.

‘왜 모르는 거야?’

사람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생명체인 것을, 백작은 도대체 왜 모른단 말인가?

‘아아, 몰라.’

유리한은 제로 바니스타에 대한 관심을 끄기로 했다.

제 발로 지옥 불에 뛰어들겠다는데 어쩌겠는가?

더군다나 지금의 백작은 말린다고 해서 들어먹을 인간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이미 글러트니를 따라가 버리기도 했고.

‘나는 이제 모르는 일이야.’

유리한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할 때였다.

“그만 투구를 벗으시지요.”

“네?”

“투구를 벗으라 했습니다.”

제이미가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당신들, 러스트 님이 보낸 첩자들 아닙니까?”

유리한과 남은 일행들이 충격 먹을 말을 던지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