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 * *
제로 바니스타가 그리드의 뒤통수를 치고 러스트의 성으로 향하고 있을 때.
“이봐, 그 인간 녀석 못 봤어?”
“누구?”
“밑에서 올라온 녀석 있잖아. 하늘색 머리카락.”
“아아, 그 인간? 지금 방에서 쉬고 있을 텐데?”
“방에 없던데?”
“뭐?!”
고요한은 호시탐탐 슬로스의 성 밖으로 나갈 기회를 노리는 중이었다.
고요한이 자신을 찾으러 떠나는 병사들을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몰래 방에서 나온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성을 탈출하는 거였지.
‘어쩌면 좋지?’
마법을 이용하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저렇게 정교한 결계라니.’
슬로스의 성에는 마법을 이용해 안에서 밖으로 탈출하는 걸 막는 결계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었다.
암만 무한의 마력을 가지고 있는 그라고 해도 파훼하기가 불가능한 아주 정교한 마법이었다.
‘유리한 씨가 기다리고 계실 텐데.’
고요한이 유리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어제 저녁이었다.
이 성의 주인인 슬로스와 가졌던 만찬.
그 자리에서 그녀는 말했다.
‘고요한아, 너와 똑같이 밑에서 올라온 녀석이 지금 러스트의 성에 있다는구나.’
‘러스트 님의 성에요?’
‘그 빌어먹을 녀석한테 ‘님’이란 소리 붙이지 말거라.’
‘네, 슬로스 님.’
고요한은 슬로스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면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었다.
밑에서 올라온 녀석.
유리한과 디에스 라고, 그리고 제로 바니스타에 관한 이야기일 거다.
마계 도착 후,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어서 얼마나 당황했던가! 무슨 문제라도 생겨 저 혼자 70층에 올라온 줄 알았더니만.
‘역시 다른 분들도 함께 올라오신 거였어!’
그저 서로 떨어진 것뿐이었다.
‘어쨌든 고요한아. 러스트의 성에 있는 인간도 참 재미난 녀석이라고 하더구나.’
‘그런가요?’
‘그래. 웬 도마뱀을 애완동물처럼 데리고 다니는 계집이라고 하던데…….’
유리한이다.
고요한은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슬로스에게 물었다.
‘러스트 님, 아니, 러스트의 성은 이곳에서 먼가요?’
‘음? 그 인간 녀석에게 흥미가 생긴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제 동료인 것 같아서요.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그래, 그렇구나.’
슬로스는 길게 하품하고는 고요한에게 말했었다.
‘러스트의 성은 이곳에서 가깝단다. 하지만 네가 그 녀석의 성에 찾아가는 건 불허한다.’
‘네?’
고요한이 경악할 만한 말이었다.
‘고요한, 너는 오늘부터 근신하도록 해라.’
‘그런……!’
그렇게 고요한은 이유도 모르고 방에서 근신하게 됐다.
그리고 지금은 방에서 탈출해 성에서 나갈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중이다.
‘큰일이야.’
붙잡히기 전에 이 성을 탈출해야 하는데!
고요한이 입술을 깨물 때였다.
“이 빌어먹을 인간 녀석!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혼자서 열심히 복도를 뛰어다니고 있는 기사가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 무장한 채 말이다.
머리에 푹 눌러쓴 투구는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저거다!’
고요한이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기사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컥……!”
그를 덮쳐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고요한은 기사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줬다.
기사가 열심히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곧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요한은 속으로 열심히 기사에게 사죄하고는 그를 기둥 뒤로 끌고 왔다.
그러고는 그의 무장을 해제했다.
고요한은 투구를 자신의 머리 위에 푹 눌러쓰고는 낑낑거리며 갑옷을 입었다.
“거기, 누구냐?!”
날 선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고요한이 꿀꺽 침을 삼키고는 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부른 기사가 픽 웃었다.
“뭐야, 너였어? 여기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아, 음. 인간 녀석이 이런 곳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까?”
상관인가 보다!
고요한이 황급히 말을 고쳤다.
“찾아봤습니다.”
“그렇군.”
기사가 고개를 끄덕인 후 고요한에게 말했다.
“성에는 없는 것 같다.”
“탈출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보다 너, 목소리를 왜 그렇게 까냐?”
고요한이 크흠 헛기침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조금 전에 기침을 많이 해서 목이 많이 쉬었습니다.”
“그래? 그럼 너는 성에 남아라.”
“네?”
“아무래도 성안에 없는 것 같아서 인원을 추려 밖으로 보내려고 했거든.”
고요한이 번쩍 손을 들었다.
“괜찮습니다! 나가게 해주십시오!”
“됐어. 아픈 녀석 밖으로 보내는 취미 없다.”
“아프지 않습니다!”
고요한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목에 뭐가 걸려서 기침을 많이 했던 것뿐입니다! 꼭 나가게 해주십시오!”
“그, 그러냐?”
고요한의 기세에 기사가 말을 더듬었다.
“알겠어. 그럼 입구로 가라.”
“넵!”
고요한이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몸을 돌렸다. 물론, 기사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사에게 하는 인사야 경례였기에 따라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기사는 멀어지는 고요한의 뒷모습을 보다 중얼거렸다.
“원래 저렇게 의욕이 넘치는 녀석이었던가?”
이상하네, 거참.
기사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슬로스에게 보고를 올리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고요한이 슬로스의 성을 탈출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유리한은.
“오, 이거 향이 좋네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취향에 안 맞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단다.”
유리한은 러스트와 단둘이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니르로르는 엘렌티아에게 맡겨 놓고 말이다.
어쨌든 간에 유리한은 러스트의 걱정에 웃었다.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답니다, 러스트 님.”
“흐음?”
“저는 못 먹는 음식이 없거든요.”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때, 몬스터를 잡아 구워 먹기도 했던 몸이었다.
“그래?”
러스트가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 영지의 특산물을 맛보여 주고 싶구나.”
“특산물이라고 하면?”
“웨어울프의 혓바닥 요리.”
유리한이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혓바닥 요리라니?’
숱하게 몬스터를 잡아먹은 유리한이었지만 혓바닥은 먹어본 적 없었다.
러스트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돈다는 듯 굴었다.
“그 위에 헤스실라의 뿌리를 갈아서 뿌리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지.”
“헤스실라라고 하면……?”
“아, 네게는 생소한 녀석이겠구나. 저기에 있는 꽃이란다.”
유리한이 러스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눈알 달린 꽃이 있었다.
유리한이 질색했다.
“후후, 맛보고 싶은가 보구나?”
“그렇게 보이나요?”
유리한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러스트가 그에 키득거리며 웃고는 말했다.
“언제 한번 저녁 식사 자리에 올리도록 하마.”
“아니요, 괜찮습니다.”
유리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런, 사양하니 아쉽구나.”
러스트가 전혀 아쉽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보다 러스트 님. 이제 슬슬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이야기라고 하면?”
“시치미 떼지 마세요.”
유리한이 찻잔을 들며 웃었다.
“설마 저와 그냥 하하 호호 시답잖은 이야기나 나누려고 하시는 건 아니죠?”
러스트가 미소를 그렸다.
“정말이지, 너는 재미없는 인간이란다.”
“칭찬 고마워요.”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러스트는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물끄러미 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리한.”
“네, 러스트 님.”
“네가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지금 전쟁 중이란다.”
우리라고 하면 일곱의 고위 마족을 가리키는 것일 터.
유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전쟁이 왜 일어난 건지도 알고 있느냐?”
“글러트니 님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분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다고요.”
“그래.”
러스트가 작게 숨을 내쉬고는 목소리를 뱉어냈다.
“글러트니는 원래 천성이 착한 녀석이었단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지.”
러스트는 말했다.
갑자기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인간, 마족 할 것 없이 병사로 키우기 시작했다고.
“그리고 전쟁을 일으켰지.”
러스트의 두 눈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가장 먼저 침략한 곳이 바로 엔비의 성이었단다.”
“그랬군요.”
유리한이 찻물을 한 모금 삼키고는 물었다.
“제가 러스트 님의 힘이 되어드리기를 바라시나요?”
그 말에 러스트가 웃었다.
“내가 나의 힘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면 그리해 줄 것이냐?”
“생각해 보고요.”
“생각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러스트의 입꼬리가 비딱하게 올라갔다.
“나는 너 같은 녀석을 아주 잘 안단다.”
러스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헤스실라가 활짝 핀 꽃밭으로 다가가 말을 이어 갔다.
“약자는 진심을 다해 도우나, 강자는 스스로 앞길을 헤쳐 나가게끔 하지.”
헤스실라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그녀가 유리한을 바라보았다.
“너는 그런 인간이지 않으냐?”
유리한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러스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웃음을 멈췄다.
“유리한.”
그러고는 나지막하게 유리한의 이름을 불렀다.
“힘을 빌려다오.”
유리한이 입술을 오므렸다가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러스트 님이 말하지 않으셨나요? 저란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서요.”
“그래. 그런데도 네 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거다.”
러스트가 담담하게 말했다.
“전쟁에 참가하란 소리는 하지 않으마. 어차피 지금은 모두가 휴전 상태다. 우리가 먼저 이 평화를 깨뜨릴 필요는 없지.”
“그런데 제 힘을 빌려달라고 하시는 건가요?”
“그래.”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유리한을 향해 입을 열었다.
“글러트니는 지금 조종당하고 있다. 그 녀석의 옆에 붙어 있는 인간에 의해서.”
유리한이 놀란 눈을 보였다.
고위 마족이 한낱 인간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다니?
‘러스트 님만 하더라도 심상치 않은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녀와 똑같은 고위 마족이 지금 조종을 당하고 있단 소리야?
믿을 수가 없었다.
특히 러스트가 말한 인간은 분명 이곳, 마계의 주민일 게 뻔하다.
마족의 힘을 아는 인간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마계의 주민이 아니라 다른 녀석일 수도 있잖아.’
유리한은 69층의 문지기인 주철야의 기억에서 ‘그 녀석’을 봤었다.
유리한의 낯빛이 어두워지려던 찰나.
“유리한, 그 빌어먹을 인간 녀석을 처치해 다오.”
러스트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