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 * *
쿠구구궁―!
땅이 거세게 흔들렸다.
- 으아아악! 이 버러지 같은 녀석들! 기필코 죽여버리겠다!
주철야가 고함을 내지르며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준 플레이어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아이고, 화났나 보네.”
유리한이 짧게 혀를 차며 주철야의 공격을 피했다.
- 이 쥐새끼 같은 년이!
“년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주철야를 놀렸다. 주철야가 유리한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리스트레인(restrain).”
마법에 의해 가로막혔다.
고요한이 주철야의 움직임을 봉쇄한 것이다.
사슬에 온몸이 결박된 주철야가 까드득 이를 갈았다.
- 이런 같잖은 재주로 나를 묶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 마라!
구구구구!
주철야가 사슬을 힘으로 풀기 시작했다.
“요한! 마법을 풀어요!”
유리한이 소리 질렀다.
저대로면 요한의 마법은 얼마 가지 못하고 부서지리라.
그리고 그 충격은 고요한이 고스란히 받게 되겠지.
유리한의 다급한 목소리에 고요한이 황급히 마법을 해제했다.
파스슥!
마법이 해제되자마자 주철야가 곧장 땅을 박찼다.
“요한!”
노리는 사람은 고요한.
그리고.
“엘레나!”
청의 기사단의 유일한 마법사, 엘레나 리본이었다.
유리한과 라이 에스페란도가 황급이 주철야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주철야의 얼굴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마법사란 존재가 얼마나 귀찮고 성가신 존재들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야, 만물의 마법사들이 천하태평의 플레이어들과 함께 몇 번이고 그를 공략하려 들었으니 말이다.
주철야는 그때의 기억을 모두 간직하고 있었다.
- 진작 죽일 것을!
주철야가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어딜 가려고.”
그 앞을 디에스 라고가 막았다.
디에스 라고가 주철야에게 한 말은, 마치 ‘감히 누구를 노리려고 하느냐’라고 꾸짖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끼기긱―!
날붙이끼리 맞붙으며 불쾌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주철야가 충혈된 눈을 번뜩였다.
- 네까짓 놈이 주제도 모르고 나를 막으려 드느냐!
“주제를 모르는 건 네놈 같다만?”
휘익!
디에스 라고가 창을 크게 휘두르며 주철야의 검을 튕겨냈다.
주철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놀란 것은 아주 잠시뿐. 주철야는 곧 디에스 라고를 향해 길게 뻗은 손톱을 휘둘렀다.
“누구한테 상처를 입히려고요?”
그것을 유리한이 모두 부서뜨려 버렸다. 주철야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 이 빌어먹을 년이……!
“하하, 칭찬 고마워요.”
유리한이 디에스 라고와 함께 주철야로부터 떨어지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주철야가 이를 드러냈다.
- 오냐, 웃을 수 있을 때 웃어두도록 해라. 내가 곧 네년의 입을 갈가리 찢어놓을 테니.
“와우, 무서워라.”
유리한이 과장된 몸짓으로 부르르 떨고는 키득거렸다.
“그 말 꼭 지킬 수 있기를 바랄게요?”
유리한이 창을 집어넣고는 검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저한테만 너무 정신 팔려 있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주철야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기운의 주인은 청예신이었다.
- 크윽!
간발의 차이로 청예신의 공격을 막아낸 주철야가 으르렁거렸다.
- 그래, 네년도 있었지!
“잊고 계셨다니 실망이군요.”
청예신이 자신의 검을 막아내고 있는 주철야의 단단한 팔을 가볍게 걷어찼다.
연약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다리였지만, 주철야의 팔이 볼품없이 꺾여버렸다.
- 크아아악!
청예신이 사뿐히 바닥을 딛고는 주철야한테서 떨어졌다. 유리한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주철야를 향해 달려들었다.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던 주철야는 그녀의 기척을 놓치고 말았다.
푹!
유리한이 주철야의 가슴팍에 검을 찔러 넣었다.
- 크으윽!
뒤늦게 고통을 느낀 주철야가 제게 검을 찔러넣은 유리한을 떼어내고자 했다.
하지만 적은 유리한만 있는 게 아니었다.
디에스 라고가 주철야의 뒤로 나타나서는 그의 어깨 부근에 창을 찔러 넣었다.
- 크아아악!
주철야가 비명을 내질렀다.
유리한은 재빠르게 그에게서 물러나며 눈가를 찌푸렸다.
‘이 정도면 쓰러질 때도 됐는데.’
몸이 무슨 강철로 되어 있는지,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로 잡아 으깨버리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기감이 도대체 얼마나 발달해 있는 건지, 그림자를 사용하려고 하면 주철야가 광인처럼 날뛰기 시작하는 탓이었다.
‘아니지, 그냥 광인이지.’
유리한이 씩씩거리고 있는 주철야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이제 끝내야겠어.’
미친 사람은 자고로 날뛰게 두면 안 된다. 평범한 사람이야 알아서 진정하겠지만, 광인은 그럴수록 더욱 물 만난 고기처럼 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스스슷―!
유리한의 주위로 그림자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유리.”
디에스 라고가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길을 만들어주도록 하지.”
그의 말에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그 인사는 저 녀석을 쓰러뜨린 다음에 해줬으면 하는군.”
디에스 라고가 창을 고쳐 잡고는 말했다.
“뭐, 곧 그 인사를 들을 것 같지만 말이다.”
그가 땅을 박찼다. 유리한 역시 그의 속도에 맞춰 내달렸다.
청예신과 라이 에스페란도도 움직였다.
고요한 역시 마찬가지.
엘레나 리본은 그들에게 방어 마법을 걸어줬다.
그렇게 동과 서, 남과 북.
각각 다른 곳에서 플레이어들이 주철야를 향해 달려들었다.
주철야는 크게 당황했다.
사방에서 쇄도하는 기운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
…으로 보였다.
타앗!
그가 공중으로 높이 도약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플레이어들은 서로 부딪칠 뻔한 불상사를 가까스로 피했다. 청예신의 검을 아찔하게 피한 유리한이 하늘을 향해 소리 질렀다.
“나보고 쥐새끼 같은 년이니 뭐니 지랄하더니 자기가 더 쥐새끼 같네!”
물론, 그 소리는 주철야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유리한에게 오감이 뺏긴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적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만큼 좋은 건 없다면서 유리한이 촉각은 돌려줬지마는.
어쨌거나 하늘로 도망친 주철야는 허공에 발을 딛고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 어디 한번 나를 죽이러 와보거라― 이 버러지 같은 녀석들아.
“그렇게 말하면 못 갈 줄 알고?”
유리한이 비딱하게 웃었다.
어느새 주철야에게 말을 놓아버린 그녀였다.
“다들 공중에서 싸울 줄 알죠?”
모른다.
몰랐지만 모두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유리한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가보죠.”
그렇게 그녀는 땅을 박찼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 우오오오오!
웬 강시 떼들이 습격해 오지만 않았으면 그랬을 거다.
“우왓?!”
주철야에게 집중하느라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못한 유리한이 크게 당황했다.
“유리한 씨!”
“유리!”
그렇다고 해도 유리한이 강시들에게 당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고요한과 디에스 라고는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보다 먼저 그녀에게 도착한 자가 있었으니.
“어이, 영웅님. 설마 이딴 놈들한테 겁을 먹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랴오륭과.
“랴오륭 씨! 유리한 씨에게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의 어깨에 타고 있던 서문기율이었다.
두 남자가 유리한을 향해 달려들던 강시들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유리한이 얼떨떨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반겼다.
“랴오륭 씨? 서문기율 씨? 두 사람이 여기는 왜……!”
“우리도 오고 싶지 않았어.”
랴오륭이 유리한의 말을 끊으며 구시렁거렸다.
“그런데 이 망할 녀석들이 갑자기 도망치기 시작하잖아. 영웅님께서 계신 쪽으로.”
그래서 이렇게 왔다며 랴오륭이 말을 이어나갔다.
“강시들은 나랑 서문기율이 상대할 테니 영웅님께서는 저 녀석한테 집중해.”
유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 인사는.”
“69층을 공략하고 하라고요?”
“잘 아네.”
랴오륭이 픽 웃었다. 유리한 역시 웃는 낯으로 말했다.
“랴오륭 씨 전에 그 말을 한 사람이 있거든요.”
“오, 그래? 누구인데?”
“디에스요.”
“뭐야, 나 그럼 영웅님이랑 똑같은 말을 한 거야? 이거 영광이네.”
랴오륭이 전혀 영광스럽지 않다는 얼굴로 강시들의 머리를 차례차례 터트리기 시작했다.
하늘로 도망친 주철야가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으르렁거렸다.
- 빌어먹을 녀석들이 또 추가됐군!
“덕분에요.”
- ……!
주철야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동시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슬아슬하게 무언가가 그의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주르륵, 상처에서 난 피가 주철야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에게 상처입힌 것은 다름 아닌 창이었다.
유리한이 가지고 있던 창.
그림자에 둘러싸여 있던 그것이 주철야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주철야가 이를 드러냈다.
- 그래, 내가 하찮은 것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지.
주철야가 말한 ‘하찮은 것들’이란 강시들이었다. 그 말에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언제는 신경 쓴 것처럼 말하네? 입은 살아가지고.”
- 그 입 닥쳐라.
주철야가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목소리를 내뱉었다.
- 네년의 입을 갈가리 찢어버리기 전에.
“하하!”
분노 어린 목소리에 유리한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겁을 먹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말, 벌써 두 번째인 거 알아?”
주철야가 너무 같잖아서.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으며 재잘거렸다.
“너 같은 놈을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지?”
주철야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유리한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입만 산 놈이라고 해.”
주철야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 죽여주마.
그가 스산한 목소리를 내었다.
- 기필코 네년은 죽여버리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년만은 저승길 동무로 내가 데려가겠다!
온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흉포한 기세였는데 유리한은 무덤덤했다.
그뿐이랴?
“그렇게 해봐.”
웃으며 그를 도발하기까지 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 같았으나 이 자리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모두 알았다.
유리한은 주철야의 위협 따위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또한.
“참고로 말해두는데, 나는 이번 공격으로 너를 죽여버릴 거야.”
유리한은 자신이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