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튜토리얼이 시작되면서 세상이 바뀐 후, 아니, 유리한 자신이 플레이어가 된 후 패배를 경험한 적이 있었던가?
‘없었지.’
유리한이 픽 웃었다.
“이겼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청예신이 엉망이 된 몰골로 씨익 웃었다. 유리한 역시 웃는 낯으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땅을 딛고 서 있을 만한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던 탓이다.
유리한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말했다.
“조금 전처럼 서로 합을 맞춰서 간다면 69층의 문지기 따위는 쉽게 공략할 수 있겠는데요?”
“부디 그렇게 됐으면 하네요.”
청예신이 그녀 앞에 앉았다.
“다시 탑을 오를 목표가 생겼거든요.”
그 말에 유리한이 물었다.
“청예신 씨는 왜 탑에 들어오신 거예요?”
“처음은 호기심이었어요.”
청예신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도중에 포기하고 탑 밖을 나가버릴까, 얼마나 많이 생각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 아이를 만났죠.”
유리한은 청예신이 말한 ‘아이’가 누구인지 쉽게 알아차렸다.
북해빙궁의 궁주였던 여자, 설영.
청예신은 지금 그녀를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강한 힘을 손에 넣고 싶었죠. 다행히도 제 실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청의 초대 기사단장님이요?”
“네.”
청예신이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눈으로 말을 이어갔다.
“초대 기사단장님이 사라진 후, 저는 그 자리를 이어받았어요. 그리고 곧장 딸아이를 찾아갔죠.”
하지만 설영은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예 북해빙궁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해 버렸다.
“그게 저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사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더 이상 다가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만 보냈었다.
딸아이가 무사히 생활하고 있는지, 그 안위만이라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딸아이는 죽어버렸고, 저는 목표를 잃어버렸죠.”
설영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목표.
청예신은 그것을 잃고 말았다.
“새로 목표를 정하면 되잖아요. 가령, 설영 님을 다시 부활시킨다거나 그런.”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청예신이 유리한의 말을 끊으며 웃었다.
“제가 튜토리얼의 치러지던 시대를 몰랐다면 그랬겠죠. 하지만 그 시대의 기록은 꽤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어요.”
그 때문에 청예신은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죽은 자를 부활시킨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또한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를 말이다.
“사실, 유리한 씨를 만나면 죽여버리고 싶었어요. 딸아이를 지켜주지 못했으니까요.”
웃는 얼굴로 살벌한 소리를 잘도 한다 싶었다.
‘내가 설영 님을 직접 죽였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나올까?’
청예신은 정말로 유리한을 죽이려고 들 게 뻔했다. 하지만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비밀이란 것은 언젠가 들통나기 마련이니.
“청예신 씨.”
유리한이 어렵게 입을 떼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청예신이 다시 그녀의 말을 막았다.
“듣고 싶지 않으니까요.”
유리한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청예신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그녀의 딸아이를 죽인 것을 말이다.
‘하긴, 설영 씨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느낌이었지.’
유리한의 두 눈에 음영이 드리워졌다. 무림에서 청예신을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말했었다.
‘뮤즈의 백작에게 가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하기에 이게 웬걸? 내 딸을 죽인 빌어먹을 마법사 새끼가 저들의 명령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아주 재미난 사실을 알려주지 뭐예요?’
어쨌거나 더 이상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 유리한아! 고요한의 이마가 불덩이가 되었도다!
니르로르가 호들갑을 떨며 유리한에게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 마법을 중첩으로 사용해서 몸에 무리가 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짐이 안 된다고 한 건데!
니르로르가 어서 일어나 보라면서 유리한을 닦달했다.
“일어난 거 안 보여?! 그러니까 날개로 그만 쳐!”
유리한이 짜증을 내고는 한달음에 고요한에게 다가갔다. 그의 곁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봐, 요한. 정신 차려봐라.”
“제이, 회복 포션 있지? 그것 좀 줘봐.”
“네, 백작님.”
디에스 라고가 제로 바니스타한테서 회복 포션을 빼앗아 들었다. 유리한이 그 모습에 입술을 오므렸다.
‘완전히 달라졌네.’
예전, 디에스 라고가 고요한을 몇 번이고 버리려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하지만 그에 기뻐할 여유는 없었다.
“요한.”
“…유리한 씨.”
고요한이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유리한을 쳐다봤다.
“죄송해요. 사실 유리한 씨를 제일 먼저 치료해 드리고 싶었는데, 그때는…….”
“괜찮아요.”
유리한의 고요한의 말을 멈추게 했다.
“제가 그랬잖아요. 저를 적으로 생각하고 덤비라고요. 요한은 잘해 줬어요.”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요한이 아니었다면 제가 이겼을 거예요. 그러니까 푹 쉬도록 하세요. 제 무리한 부탁 들어준다고 고생 많이 했으니까요.”
상냥한 목소리에 고요한은 희게 질린 낯으로 배시시 웃었다.
“뭐가 좋다고 웃는 거지?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유리한 씨, 디에스 씨가 아픈 사람한테 욕해요.”
“욕한 적 없다.”
디에스 라고가 짜증 난다는 얼굴로 고요한을 잠들게 했다. 그의 목 뒤를 가볍게 쳐서 기절시켜 버린 것이다.
“디에스!”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쫑알거렸을 거다.”
맞는 말이었다.
유리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한 좀 업어줘.”
“당연하지.”
디에스 라고가 고요한을 업었다.
“유리, 네가 등에 태울 수 있는 놈은 시우만으로 족하다.”
“그렇기는 하지.”
유리한이 픽 웃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저희 먼저 들어가야겠네요. 백작님, 수습을 맡겨도 될까요?”
“맡겨만 주십시오.”
제로 바니스타가 싱긋 웃었다.
“마침, 객잔의 주인이 나왔군요.”
백발의 노인이 제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것이 역력한 얼굴.
‘미안해라.’
유리한은 객잔의 주인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의 머리 위에는 니르로르가 앉아 있었다.
- 유리한아, 어서 돌아가야 한다! 안 그러면 고요한이 죽을 것이다!
“죽기는 누가 죽는다고 그래?”
유리한이 니르로르를 달래며 걸음을 옮겼다. 디에스 라고가 고요한을 등에 업은 채 그녀를 따랐다.
유리한은 그렇게 방에 돌아가기 전, 엉망이 된 연무장을 흘긋거렸다.
연무장 한가운데에서 제로 바니스타가 청예신과 함께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유리한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선 청예신을 쳐다봤다.
‘탑을 오를 목표가 생겼거든요.’
청예신이 탑에 들어온 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다 설영을 만나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게 됐다.
하지만 설영이 죽은 후, 그녀는 목표를 잃고 방황했다고 했다.
‘그런데 아까 분명 말했어.’
다시 탑을 오를 목표가 생겼다고 말이다.
그 목표가 설영을 되살리는 건 아니다.
‘청예신 씨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럼 뭐란 말인가?
“유리, 왜 그러는 거지?”
“응?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요한을 안에 눕히기나 하자.”
유리한이 디에스 라고를 향해 방긋 웃어줬다. 웃는 낯과는 다르게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청예신은 자신이 설영을 죽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제게 협력하고 있는 중.
‘비록, 나를 죽이고 싶었다고 고백하기는 했지만.’
그 마음이 정말 완전히 사라진 것이 맞을까?
유리한이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기회가 되면 스킬을 사용해 확인을 좀 해봐야겠어.’
유리한은 ‘진실 감별(B)’이란 스킬을 보유 중이었다.
청예신과는 한배를 탄 것과도 같아서, 그녀에게 스킬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마는.
‘만약을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유리한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 발목을 붙잡히고 싶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최상층에 올라 이곳을 무너뜨리는 것.
유리한은 그 목표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실현하고 싶었다.
- 디에스 라고, 이 굼벵이 같은 인간 녀석아! 어서 고요한을 안에다 눕혀라!
“누구보고 굼벵이 같다고 하는 거지?”
- 짐은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그보다 영광으로 알도록! 짐이 친히 네 이름을 불러줬으니.
“그 영광, 필요 없다.”
- 유리한아! 디에스 라고, 이 빌어먹을 자식이 짐의 영광을 거절했느니라!
시끌벅적한 소란에 유리한이 픽 웃었다.
“다들 그만. 디에스, 너는 어서 고요한을 눕혀. 니르로르, 너는 입 좀 다물고 있어. 그러다 요한이 깨면 어쩌려고 그래?”
니르로르가 불퉁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어쨌거나 유리한의 말 하나는 잘 듣는 그였다.
* * *
유리한이 고요한이 편히 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을 때.
“69층을 공략하기 전에 제 돈이 거덜 나겠군요.”
제로 바니스타는 머물고 있는 객잔의 주인에게 충분한 금전적 보상을 하고 있었다.
“탑에서 가장 부자이신 분께서 그런 소리를 하다니, 뮤즈의 재정이 생각보다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나 봅니다?”
“하하, 그럴 리가요.”
제로 바니스타가 싱긋 웃었다.
“그보다 우리 단장님께서는 생각보다 마음이 너그러우셨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잘 알지 않습니까?”
제로 바니스타가 히죽거렸다.
“그만하지, 백작.”
유리한이 패배를 선언한 후, 줄곧 조용히 있던 라이 에스페란도가 제로 바니스타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단장님을 놀릴 생각이라면 그 세 치 혀를 잘라버릴 거다.”
“라이.”
청예신이 라이 에스페란도를 진정시켰다.
“나는 괜찮아.”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이거 참, 부단장님께서 저렇게 무서우니 함부로 말할 수가 없겠군요.”
제로 바니스타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청예신에게 말했다.
“단장님, 제 말에 너무 불쾌해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하죠. 그럴 가치도 없는 말인걸요?”
청예신이 웃는 얼굴로 가시 돋친 말을 뱉었다.
“어이, 69층 공략에 관해서는 잘 이야기 나눴나? 큰 소리가 계속 나던데 말이야.”
“아아, 맹주님. 마침 잘 왔습니다.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 좀 나누시죠.”
“갑자기 왜 친한 척이야?”
랴오륭이 질색하는 얼굴로 제로 바니스타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제로 바니스타는 기어코 랴오륭을 객잔 구석으로 데리고 가는 데 성공했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제이가 청예신과 라이 에스페란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불쾌한 놈들 같으니라고.”
“너무 그러지 마, 라이.”
청예신이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들이라고 해도 지금은 같이 손을 잡은 동료니까.”
“하지만, 단장님. 어차피 69층을 공략하고 나면 다시 적으로 돌아설 사이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지.”
오광 중 두 곳이 괴멸됐다.
남은 곳은 세 곳뿐.
새롭게 맞이할 세상에서, 오광의 남은 세력들은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힘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새롭게 올라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현재에 집중하자는 거야. 미래는 너무 골치 아프니까.”
청예신이 생각하는 미래 속,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유리한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미래를 생각하는 걸 그만뒀다.
말했듯, 머리 아프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