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 지금 답답하게 뭘 고민하고 있느냐? 그냥 쳐들어가면 될 것이지, 너답지 않느니라.
길어지는 대화 속에서 당이 떨어진 니르로르가 잔뜩 심통이 난 목소리를 내뱉었다.
유리한은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다.
“뭐라고?”
- 삼삼오오 모인 김에 그냥 쳐들어가면 될 것을,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느냐고 했다.
“그걸 말이라고 한 거야?”
- 그래.
니르로르가 그럼 말이지, 뭐겠냐는 눈빛으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 강시인지 뭔지 하는 것들은 저놈과 그 떨거지들이 맡아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떨거지들이라니!
랴오륭이 자신의 부하들을 감히 그런 식으로 말한 니르로르를 향해 울컥 감정을 쏟아낼 뻔했지만.
‘참아요.’
유리한이 보낸 시선에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 상대는 니르로르였다.
암만 새끼 드래곤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고 해도 세상을 멸망시킬 뻔했던 죽음의 드래곤.
‘이제 죽음의 드래곤이 아니라고 했던가?’
어쨌거나 유리한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대란 말씀.
‘약자의 비애가 이렇군.’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에 랴오륭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니르로르는 그의 기분 따위 전혀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 저 허약한 인간의 말을 정리하자면 결국, 적은 하나. 그리고 그 적을 상대하는 숫자는…….
니르로르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 총 다섯이군.
“왜 다섯밖에 안 돼?”
유리한의 물음에 니르로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 저 허약한 인간과 그 똘마니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하니까.
제로 바니스타는 그 말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쨌거나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제이는 실력자인데.’
하지만 그라면 69층의 공략에 합류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안전을 챙기는 것을 우선으로 여길 터.
유리한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니르로르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69층의 문지기는 나와 디에스, 그리고 요한이랑 청예신 씨, 라이 에스페란도 씨가 상대하면 된다는 거구나?”
- 척하면 척이구나.
니르로르가 대견하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 참고로 짐도 함께한다. 다만 짐은 인간이 아니기에 숫자에 포함하지 않았느니라.
“네네, 그러시겠죠.”
유리한이 픽 웃으며 그렇게 말할 때였다.
“잠깐만요.”
서문기율이 손을 들었다.
“저는 왜 빼십니까?”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에 랴오륭이 얼굴을 찌푸렸다.
“너는 당연히 우리와 함께 움직여야지!”
“저는 혈맹이 아닙니다.”
“어쨌든 우리의 보호 아래에 있잖아! 그리고, 너!”
랴오륭이 서문기율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네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방해만 안 되도 다행이지!”
그 말에 서문기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호기롭게 손을 들었지만, 랴오륭의 말에 틀린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자신이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이렇게 뼈저리게 느끼게 될 줄이야.
‘49층에서도 이런 무력감은 느낀 적이 없는데.’
애초에 랴오륭과 함께 다니면서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던 서문기율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자만이었다.
자신은 여전히 약했다. 69층의 공략을 코앞에 두고 아무런 도움도 안 될 정도로 말이다.
서문기율이 그렇게 자책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순간.
“서문기율 씨.”
유리한이 다정하게 그를 불렀다.
“서문기율 씨는 충분히 강해졌어요. 그리고 계속 성장해 나갈 거고요.”
서문기율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패배감 짙은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유리한 씨와 함께 싸우지 못하잖습니까?”
그 말에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죠. 지금은 아니라고 해도요. 그러니까 자신감 가지세요.”
유리한이 서문기율을 격려하면서 싱긋 웃었다.
“문지기 주위에 포진해 있는 몬스터들을 처치해서 길을 뚫어주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니까요.”
“그래, 인마! 자신감을 가져! 우리 혈맹과 함께 싸울 수 있는 영광이 쉽게 오는 줄 알아?!”
랴오륭이 서문기율의 등을 세게 두드리면서 말했다.
“좋아, 그럼 대충 이야기는 다 끝났지?”
“지금 제대로 이야기가 된 사안이 있나?”
라이 에스페란도의 질문에 랴오륭이 말했다.
“떨거지는 우리 몫, 나머지는 너희 몫. 이렇게 이야기된 거 아니야? 그렇지, 백작?”
“그런 식으로 정리를 할 수는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들었지?”
랴오륭이 씨익 웃었다.
“서문기율, 우리는 이만 일어나도록 하지.”
“그래도 됩니까?”
“나머지는 쟤들 몫이란 거 못 들었어? 우리는 다른 녀석들이랑 같이 떨거지들을 어떻게 처치할지 이야기나 나누고 있자고.”
서문기율이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서문기율이 예의 바르게 모두에게 인사한 후 랴오륭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드르륵, 탁!
문이 닫히자마자 청예신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뭔가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고 간 기분이네요.”
그 말에 유리한이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 짐이 뭘 했다고 그러느냐!
니르로르가 우는 소리를 내고는 고요한에게로 몸을 피했다. 니르로르가 고요한의 품속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말했다.
- 짐은 사실을 말한 것뿐이니라!
“말이라도 못 하면!”
유리한이 찌푸린 얼굴을 풀었다.
니르로르에게 화를 낼 시간에 69층의 문지기를 공략하기 위한 전략을 세워야만 했다.
‘그런데 저 망할 드래곤은!’
도움은 못 될망정, 유리한의 성질을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답지 않게 너무 예민하게 굴고 있는 걸 수도 있지.’
왜인지 모르게 초조한 마음이 계속 드는 유리한이었다.
그때였다.
“유리한 님, 어쨌거나 니르로르 님은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하셨습니다.”
“백작님, 너무 그렇게 띄워주지 마세요.”
“유리의 말이 맞다, 제로 바니스타. 저 드래곤은 안하무인이라 어떤 칭찬이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거든.”
- 지금 짐을 욕한 것이냐, 음흉한 인간 녀석아?
“마음대로 생각해라.”
디에스 라고가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저 도마뱀 녀석이 69층의 문지기를 공략할 수 있는 기가 막힌 방법을 알려줬군.”
“방법은 무슨 방법?”
유리한이 미간을 좁힐 때였다.
“아, 디에스 씨가 무슨 말씀을 하실 건지 예상이 가네요.”
청예신이 따악, 손가락을 튕기고는 말했다.
“쪽수 앞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있죠.”
청예신의 말에 디에스 라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암만 강한 녀석이라고 해도 어중간한 녀석 여럿이 뭉치면 아주 잠깐 밀리기 마련이지.”
“그런가?”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요한 역시 유리한과 같은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유리한 씨 앞에서는 숫자가 무의미할 것 같은데요.”
“그거야 그렇지.”
디에스 라고가 고개를 끄덕였고.
“유리한 씨는 예외로 쳐야죠.”
청예신이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하지만 유리한 씨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이야기일 거예요.”
그리고 그건 69층의 문지기 역시 마찬가지일 터.
“와우, 그러니까 복잡한 전략 따위 세우지 않고 그냥 다구리를 날리자는 말이죠?”
“뭐, 속되게 표현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청예신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진심이신가?’
아님, 자신이 너무 진지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건가?
유리한이 심각한 얼굴로 고민할 때였다.
“유리.”
디에스 라고가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며 말했다.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때를 생각해라. 우리가 어떤 식으로 싸웠는지를.”
디에스 라고의 말에 유리한이 살짝 입술을 벌렸다.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때.
하루살이 인생이나 다름없던 그 시절 자신은 어떻게 몬스터를 처치해 나갔었는가?
‘무턱대고 앞만 봤지.’
등은 동료들에게 맡기며, 그렇게 앞장서서 몬스터를 처치했었다.
‘그래. 그때도 전략이니 전술이니 그런 것 따윈 없었어.’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화마 속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앞뒤 재지도 않고 그를 구하고자 달려드는 자.
그 사람이 바로 유리한이었다.
디에스 라고는 그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고마워라.’
디에스 라고가 아니었다면 시간 아깝게 두 눈을 데굴 굴리고 있을 뻔했다.
들이닥친 상황 속에서 정답이란 것을 한 번 내보겠다고 말이다.
‘정답을 어떻게 구하겠다고.’
답이 정해진 시험지도 아닌데, 정답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생각을 끝마친 유리한이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한번 쪽수로 밀어붙여 보자고요.”
어중간한 실력자 여럿이 뭉쳐도 강한 놈한테서 시간을 벌 수 있는 판국에, 이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손에 꼽히는 강자들이었다.
“69층의 문지기는 충분히 격파할 수 있을 겁니다.”
제로 바니스타의 말에 유리한이 피식 웃었다.
“구천하한테서 알아내지 못한 정보가 있다면 살짝 곤란해지겠지만 말이에요.”
“하하, 그렇기는 하겠죠.”
제로 바니스타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남몰래 진땀을 뺐다.
만약, 유리한의 말대로 된다면 후폭풍이 얼마나 심할까?
상상만으로도 두려운 제로 바니스타였다.
어쨌거나 유리한은 말했다.
“자, 69층의 공략을 어떻게 진행할지 결정했으니 서로 합을 한번 맞춰볼까요?”
“어떻게요?”
청예신의 물음에 유리한이 방긋 웃었다.
“저를 69층의 문지기로 생각하고 다 함께 덤벼보세요. 아, 뮤즈의 분들은 빠져도 돼요.”
그 말에 고요한이 빼액 소리를 내질렀다.
“유리한 씨, 다치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제가 다치면 요한이 어련히 알아서 치료해 주겠죠.”
“그렇기는 하지만…….”
고요한이 우물쭈물했다. 유리한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저 못 믿어요?”
그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니르로르였다.
- 못 믿는가 보다, 유리한아.
“아니에요!”
고요한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내뱉고는 결국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유리한이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좋아요. 자, 그럼.”
유리한이 무기를 꺼내 들고는 사악하게 미소를 그렸다.
“어디 한번 와봐요.”
자신감 하나는 기가 막힌 유리한이었지만.
“괜찮겠나, 유리?”
“저희는 진심을 다해서 갈 거예요, 유리한 씨.”
“단장님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녀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