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하여튼 말은 잘해요.’
유리한이 주먹을 들어 올린 구천하의 모습에 픽 웃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도망치려고 한 것도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서였겠네?”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구천하가 입을 다물었다. 유리한이 그런 그를 보며 비딱하게 웃었다.
“괜찮아. 어떤 인간도 죽음 앞에서는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니까. 그러니 도망치려고 한 것에 그런 식으로 변명해도 괜찮아.”
다 이해한다는 듯이 너그러운 어투에 구천하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유리한에게 주먹을 치켜들고 달려들고 싶었다. 하지만 구천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달려들면 죽는다!’
구천하는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 유리한을 노려봤다.
“내게 원하는 것이 뭔가?”
“응?”
“내게 원하는 것이 있어 이렇게 목숨을 살려두고 있는 거겠지.”
유리한은 자신의 목숨 따위 손쉽게 거둬 갈 수 있는 플레이어였다.
그런 그녀가 저를 이렇게 살려두고 있는 건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일 거다.
구천하의 말에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역시, 아저씨.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아저씨를 좋아했어.”
“뭐?”
“아, 물론 이성적으로 좋아했던 건 아니야. 오해하지 마.”
유리한이 황급히 두 손을 내젓고는 말했다.
“아저씨는 불리하다 싶으면 도망치기 일쑤였잖아? 나랑 싸울 때도 그랬고, 몬스터와 싸울 때도 그랬었지.”
과거를 내뱉으며 유리한은 키득거렸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웃겼거든. 그래서 내가 아저씨를 좋아했어.”
구천하는 유리한이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그녀에게 있어 자신은 코미디언이나 다름없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겠지.’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구천하는 유리한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자존심에 암만 금이 갔다고 한들, 구천하는 그것 때문에 목숨을 버릴 정도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작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스린 후 말했다.
“그래서 내게 뭘 원하는 건가?”
“협조.”
유리한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협조해 준다면 목숨만은 살려줄게. 어때?”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에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 심장이라도 걸게. 그럼 됐지?”
그 말에 구천하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유리한을 노려봤다.
“왜? 못 믿겠어?”
“인간은 쉽게 말을 바꾸는 생명체이지 않나?”
“아저씨도 그 인간이면서 잘도 말하네.”
유리한이 픽 웃고는 말했다.
“뭐, 못 믿으면 됐어. 억지로라도 붙잡아서 데리고 가면 되니까. 참고로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후욱!
유리한과 구천하를 중심으로 검은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구천하가 갑작스럽게 생성된 공간에 당황하는 반면, 유리한은 태평하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저씨와 나. 둘 중 한 명이 녹다운 될 때까지 어디 한번 싸워보자고. 아저씨, 언제나 나를 이겨 먹고 싶어 했잖아?”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그녀가 보이는 웃음에 구천하가 까드득 이를 갈고는 땅을 박찼다.
“그래! 오늘로 네 잘난 콧대를 무너뜨려 주마!”
유리한은 분명 말했다.
‘뭐, 못 믿으면 됐어. 억지로라도 붙잡아서 데리고 가면 되니까. 참고로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은 즉, 구천하를 죽이지는 않겠다는 말.
그는 죽일 듯이 유리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바랐다.
유리한, 그녀를 제 손으로 죽여버리는 것을 말이다.
콰과광―!
“꺄아아악!”
“으아아악!”
센터의 최상층, 협회장실이 무너지며 건물의 파편이 이곳저곳으로 튀었다.
깊은 밤이었다고는 하나 센터에 근무 중이던 직원들이 있었다.
‘이런.’
디에스 라고가 사람들을 덮치려는 건물의 잔해를 잘게 부서뜨리며 혀를 찼다.
‘사람이 아예 없는 게 아니란 것을 잊고 말았군.’
곤란하다는 듯, 난처한 얼굴을 보이는 디에스 라고를 향해 조소 섞인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하하! 왜 그러지, 디에스 라고?! 나를 죽인다고 하지 않았었나!”
하연청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센터를 무너뜨릴 듯이 곳곳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가 기둥 하나를 파괴했을 때였다.
“혀, 협회장님!”
“음?”
“살려주십시오! 다, 다리가 끼어버려서!”
건물 잔해에 다리가 끼어버린 센터 직원이 하연청의 바지 자락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그에 하연청의 웃는 낯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버러지 같은 것이 감히 누구의 발목을 붙잡고 있느냐?”
하연청은 그 말을 끝으로 직원을 손수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광경은 도망치고 있던 센터의 직원들이 모두 보고 말았다.
“혀… 협회장님이 사람을 죽였다! 사람을 죽였어……!”
하연청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물으려고 다가오던 몇몇 직원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을 따라 남은 사람들도 혼비백산으로 뛰쳐나갔다.
“좋아, 이제 마음껏 싸울 수 있겠군. 내게 감사하도록 하게.”
“미친놈이었군.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감히 시우에게 그딴 짓을 벌일 리가 없지.”
디에스 라고의 조롱 섞인 말에 하연청이 어깨를 으쓱였다.
“플레이어가 아닌 몸으로 튜토리얼에서 살아남으려면 미쳐야 했다네. 뭐, 자네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디에스 라고가 미간을 좁히며 창을 치켜올렸다.
“더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단번에 죽여주마.”
“그것참 고맙군.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연청이 씨익 웃는 순간, 바람이 불며 누군가 나타났다.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하연청이 날 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의 등장에 디에스 라고가 미간을 좁혔다.
“실력에 자신이 없나 보군.”
“그건 아니라네.”
하연청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이 친구는 나를 협회장으로 올려준 자라네.”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녀석인가 보군.”
“하하! 그래도 이곳에서는 아주 드물게 쓸 만한 친구지.”
하연청이 싱긋 웃고는 남자에게 속삭였다.
“자네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네, 협회장님.”
남자가 꿀꺽 침을 삼킨 후.
“으아아악!”
디에스 라고를 향해 달려들었다.
디에스 라고는 그가 달려오는 것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무턱대고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남자의 모습이 꼭 코뿔소 같았다.
그러니까 디에스 라고는 얼마든지 남자를 피할 수 있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
남자를 피할 수가 없었다.
발바닥이 바닥에 붙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 녀석의 힘인가?’
뭘 믿고 저렇게 자신에게 달려오나 싶었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으럇차아!”
결국 디에스 라고는 남자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디에스 라고가 미간을 좁히고는 창을 치켜올렸다.
어쩔 수 없지만 죽여서라도 남자를 떼어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디에스 라고는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번쩍!
남자의 몸이 환하게 빛을 내기 시작한 탓이다.
“이게, 무슨!”
“흡, 흐윽.”
남자가 겁에 질린 얼굴로 흐느낀 후 고함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그와 함께 남자의 몸이 번쩍 빛을 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콰앙―!
디에스 라고가 있던 자리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하연청이 폭발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재빠르게 멀찍이 물러난 후 혀를 찼다.
“쓸 만한 놈이었는데 아쉽군.”
그보다 더욱 아쉬운 건, 디에스 라고를 제 손으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하연청은 자신의 주제를 잘 아는 사내였다.
그는 디에스 라고를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자신은 결코 눈앞의 남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그렇기에 부하를 희생시켰다.
‘원래 유리한을 처리할 때 사용하고 싶은 방법이었는데.’
하연청이 짧게 혀를 찼다.
유리한은 스스로를 희생해 튜토리얼을 끝낸 위대한 영웅이었다.
하연청은 그 영웅이 제 앞에서 당황한 채 죽어버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또한 조롱하고 싶었다.
“자신을 희생해 세상을 구한 적 있지 않냐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영웅을 놀리고 싶었거늘.”
하연청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차는 순간이었다.
“그 영웅이 유리를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
“……!”
하연청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디에스 라고는 분명 조금 전의 폭발에 휘말려 죽었을 거다. 암만 그가 강한 플레이어라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 분명 그럴 텐데!’
디에스 라고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하연청이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네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네가 알 필요 없다. 어쨌거나 네 녀석이 조금 전에 말한 영웅이 유리를 가리키는 거라면 말을 좀 바꿔야겠군.”
디에스 라고가 하연청을 향해 창을 치켜들며 목소리를 내뱉었다.
“원래 단번에 죽여버릴 생각이었지만, 네 입에서 차라리 죽여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컷 괴롭히다 죽여주마.”
살기 어린 목소리에 하연청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디에스 라고는 내뱉은 말은 꼭 지키는 남자였고, 그렇기에 그는.
“끄아아아악!”
하연청의 입에서 제발 죽여달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후드득, 튀는 피에도 어떤 표정 변화가 없는 디에스 라고의 모습에 하연청은 파들파들 떨었다.
“이… 빌어먹을……!”
유리한도 아닌 디에스 라고에게 이렇게 당하게 되다니!
하연청이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고 하지 않던가?
하연청은 디에스 라고의 빈틈을 찾아냈다.
하연청을 가지고 놀다 죽이는 것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디에스 라고가 그에게 틈을 보이고 만 것이다.
그답지 않은 실수였으나 하연청에게 있어서는 기회였다.
하연청이 디에스 라고의 얼굴을 향해 건물 파편을 내던지고는 몸을 움직였다.
지금은 도망쳐야 한다.
애초에 자신은 구천하 못지않게 모습을 숨기는 데 능했다.
‘만약 그것도 안 된다면!’
남의 모습을 빌려 사람들 틈에서 숨을 죽이고 있어야겠다.
‘굴욕적이지만 지금은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하연청은 그렇게 센터 바깥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어디를 도망가려고?”
그의 도망은 너무나도 손쉽게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