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 * *
디에스 라고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청의 초대 기사단장의 위치가 확인된 지금, 최대한 빠르게 그를 처치해야만 했다.
‘시우의 기억을 건드린 이유가 뭐지?’
아이의 기억을 헤집어서 좋을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그냥 유리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던 건가? 그게 아니라면.’
디에스 라고가 잠시 생각을 멈췄다가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훗날, 시우를 편하게 이용해 먹으려고 그런 건가?’
그런 이유로 아이에게서 자신들의 기억을 지웠다면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애초에 청의 초대 기사단장은 유지한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흉 중 한 명이었다.
살려둬서 좋을 일은 없었다.
‘유리라면 이성적으로 판단한 후, 살리거나 죽이는 걸 선택했겠지만 나는 아니다.’
디에스 라고는 까드득 이를 갈며 센터에 진입했다.
단숨에 남들의 눈을 피해 센터의 최상층에 오른 그는 손쉽게 협회장의 집무실 앞에 당도했다.
‘경호 인력은 보이지 않는군.’
하물며 협회장의 일을 보좌하는 비서들 역시 보이지 않았다. 마치, 디에스 라고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하긴, 센터 내에 배치되어 있는 인력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자신이 올 줄 알았다는 듯이 구는 모습이라니.
‘유리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디에스 라고는 금방 답을 찾았다. 유리한, 그녀라면 협회장실 안에 있는 자의 기대에 부응해 주기 위해 문을 활짝 열어젖혔을 터였다.
답을 찾아낸 디에스 라고는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그렇게 열린 문.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진중하면서도 근엄한 목소리가 디에스 라고에게 들려왔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유리한.”
“미안하지만 나는 유리가 아니다.”
“흐음?”
청의 초대 기사단장, 하연청이 불청객을 확인하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그렇구려. 유리한이 갑자기 남자가 됐을 리는 없으니.”
하연청은 능글맞게 웃으며 눈앞의 남자를 아래위로 훑었다.
“유리한의 이름을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을 보니 자네는 디에스 라고인가 보지?”
“그래.”
하연청의 시선이 불쾌할 만도 한데 디에스 라고는 담담했다.
“청의 초대 기사단장께서는 나이를 꽤 먹은 것 같은데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나 보군.”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때에는 숨죽이고 살기 바빠서 말이지. 그때는 플레이어가 아니었거든.”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하연청이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파스슷―!
푸른 검기에 주변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디에스 라고는 태연했다.
그런 그를 향해 하연청이 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디에스 라고, 자네의 이름은 유리한 못지않게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네.”
하연청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구경하고 싶네만.”
“기꺼이 보여주도록 하지. 하지만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답해 줬으면 하는군.”
부탁이었으나 명령이나 다름없는 어투였다.
디에스 라고가 금안을 번뜩이며 하연청에게 물었다.
“시우에게 접근한 이유가 뭐지? 대답에 따라 너를 살려 줄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하연청이 멍하니 두 눈을 끔벅거리다가.
“하하, 하하하하! 거참, 재미있는 젊은이로군!”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자네가 나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디에스 라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란 창을 치켜들 뿐.
하연청은 그 모습에 픽 웃었다.
“그래, 호기로운 젊은이께서는 아무래도 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
그러고는 검을 고쳐 잡았다.
“이 늙은이가 주제를 좀 가르쳐주고 싶은데, 그래도 될는지?”
“얼마든지.”
그 말에 하연청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감 넘쳐서 좋군. 우리 청의 기사단에도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많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청의 기사단은 충분히 잘 굴러가고 있는 것 같더군.”
“하하! 그렇겠지! 보자, 지금 청예신이 청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겠군. 그 아이는 아주 똑 부러져서 내가 좋아했었지.”
하연청이 청예신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
“하지만 그 아이와는 다르게 유지한.”
들린 이름에 디에스 라고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것을 봤을 텐데도 하연청은 한껏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한의 동생 되는 녀석은 너무나도 유약했었지.”
까드득, 디에스 라고가 이를 갈았다.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울린 날 선 소리였으나 하연청은 계속 재잘거렸다.
“조금 전에 내게 물었지? 시우, 그래. 유시우에게 접근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왜 그랬는지 쉽게 유추 가능하지 않은가?”
하연청이 씨익 웃었다.
“당연히 유시우한테서 무한의 마력을 빼앗아 가기 위해 그랬지. 그 아비는 마력을 모두 빼앗기도 전에 죽어버렸었으니 말이다.”
“그렇군.”
디에스 라고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담담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결론이 내려졌다. 너는 죽이는 게 좋겠군.”
유지한을 위해서라도 그것이 좋을 터. 결론을 내린 디에스 라고가 하연청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연청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 낯으로 그가 다가오는 걸 지켜봤다.
그리고 디에스 라고의 창이 자신을 꿰뚫으려고 할 때.
“나를 죽일 수 있겠어?”
“……!”
하연청은 모습을 바꿨다.
디에스 라고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유리한’의 모습으로 말이다.
디에스 라고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급히 창을 거둬 들었다.
눈앞의 여자가 자신이 아는 그녀가 아님을 알고 있는데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연청이 유리한의 얼굴로 비릿하게 웃으며 발을 들었다.
“큭!”
하연청의 발길질에 디에스 라고가 바닥을 굴렀다.
쿨럭거리며 기침을 토해내는 그를 향해 어느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하연청이 싱긋 웃었다.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게나. 뭐, 나 역시 이런 모습으로 유시우에게 접근했었지만 말이지.”
하연청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곧바로 힘을 풀었지만.”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유리한의 흉내를 내는 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말이네.”
하연청이 웃는 낯으로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기가 디에스 라고의 옆구리를 향해 쇄도했다.
“어쨌거나 젊은이는 이 자리에서 죽어줬으면 좋겠군. 유리한이 아니라서 아쉽지만, 자네의 목숨을 거두는 것으로 만족하지.”
“…네가 조금 전에 물었지?”
디에스 라고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검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네 생사여탈권을 내가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느냐고. 그 대답 지금 들려주지.”
디에스 라고가 창을 들고선.
“그래, 나는 네 목숨을 내 마음에 따라서 빼앗을 수 있고 또한 놓아줄 수 있다.”
자신을 향해 쇄도하던 검기를 반으로 갈랐다. 두부를 자르듯이, 아주 부드럽게 말이다.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때, 디에스 라고는 유리한과 만나기 전까지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잘난 줄 아는 사내였다.
그런 자신에게 유지한을 괴롭혔던 청의 초대 기사단장이 감히 도발을 했다.
주제도 모르고.
“청의 초대 기사단장, 하연청.”
하연청의 공격을 가볍게 파쇄한 디에스 라고가 분노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오늘 유리를 대신해서 네 목숨을 거두겠다. 참고로 말해두지만.”
척, 디에스 라고가 창을 고쳐 쥐고는 말했다.
“네 목숨은 네가 버린 거다.”
그 말과 함께 디에스 라고가 기세 좋게 하연청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연청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검을 치켜올렸다.
창과 검이 서로 부딪쳤고.
콰과광―!
센터의 협회장실이 굉음을 내며 부서졌다.
* * *
쿠구궁―!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선 숲이 크게 흔들렸다.
“아이고, 우리 맹주님께서 꽤나 고전하고 있는 모양이네요.”
대지의 흔들림에 놀랄 만도 한데, 유리한은 태연했다. 그리고 그건 니르로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 우락부락한 인간 녀석, 꽤 강한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약했던 모양이다.
“그러게.”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제로 바니스타는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백작님.”
“네?”
“왜 그렇게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구세요?”
뭐 마려운 강아지라니!
제로 바니스타는 자신을 놀리는 목소리에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저를 이렇게 가볍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탑에서 유리한이 유일할 것이다.
어쨌거나 제로 바니스타는 그녀에게 물었다.
“유리한 님은 걱정되지도 않으십니까?”
“랴오륭 씨의 걱정이라면 하나도 안 드는데요.”
랴오륭, 그는 눈앞의 남자처럼 유지한의 죽음에 일조했던 플레이어였다.
서문기율의 성장을 위해 비록 그를 살려줬지만 말이다.
“저 역시 혈맹의 맹주께서 구천하에게 쉽게 당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럼, 뭐가 걱정인데요?”
“혈맹의 맹주가 구천하를 놓치는 것 말입니다. 제가 걱정하는 건 바로 그것입니다.”
“아하, 그러시구나아.”
유리한이 흥미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걱정이 많으면 랴오륭 씨와 함께 움직이시지 그랬어요?”
“하하, 저는 육체파가 아니라서 말이지요.”
제로 바니스타가 능글맞게 웃었다. 유리한은 짧게 혀를 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제 어깨에 앉아 있던 니르로르를 제로 바니스타에게 넘겨줬다.
- 유리한아?
“너, 백작님이랑 같이 있어.”
- 싫도다!
“싫어도 안 돼. 백작님, 니르로르 좀 부탁할게요.”
“네? 네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니르로르 님은 왜 갑자기…….”
“맡기냐고요?”
유리한이 제로 바니스타의 말을 끊어 먹으며 웃었다.
“그야 랴오륭 씨께 도움 좀 주고 오려고 그러죠. 우리 백작님께서 너무 걱정하셔서요.”
유리한이 픽 웃고는 말했다.
“금방 다녀올 테니 얌전히 니르로르나 보고 있어 주세요.”
- 유리한아! 짐은 이 수상쩍은 인간이랑 같이 있는 것이 싫도다!
‘수상쩍은 인간’으로 불린 제로 바니스타가 멋쩍게 웃었다. 유리한은 니르로르의 말은 들은 체 만 체하며 걸음을 옮겼다.
곧, 그녀는 한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드래곤 앞에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 유리한아!
니르로르가 애타게 그녀를 불렀지만 유리한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제로 바니스타가 자신의 품을 빠져나가려 하는 니르로르를 억지로 품에 끌어안았다.
‘놓치면 죽는다!’
유리한은 자신에게 니르로르를 부탁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유리한이 돌아오기 전까지 품 안의 드래곤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
그러지 않으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고 말 거다.
‘그건 안 돼.’
69층의 문지기를 공략하고자 만반의 준비를 했다.
‘트라이.’
즉,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줬던 친구를 만날 때가 머지않았다는 거다.
제로 바니스타가 친구를 떠올리며 니르로르를 꼭 끌어안았다.
니르로르는 그 품이 끔찍하다는 듯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제로 바니스타의 살갗을 꼬집어댔다.
“아야.”
유리한이었다면 몰라도 건강이 좋지 않은 제로 바니스타는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니르로르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 참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