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느닷없는 말에 니르로르가 두 눈을 끔뻑였다.
- 짐이 새롭게 얻은 힘……?
“그래.”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네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나? 어둠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고 했었지.”
“니르로르 님께서 그런 부끄러운 소리를 했답니까?”
제로 바니스타가 놀라 물었다. 그에 니르로르가 버럭 외쳤다.
- 부끄러운 소리라니! 짐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말했느니라!
“아무렴요, 그렇겠지요.”
뮤즈의 백작이 니르로르의 말이 모두 맞다는 듯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니르로르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제로 바니스타한테서 신경을 끄기로 했다.
- 그래서 짐이 어떻게 해주기를 원하는 게냐, 유리한아?
“말했잖아? 네가 새롭게 얻은 힘을 마음껏 펼쳐 보라고.”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네 말대로 이 세상에 어둠이 닿지 않는 곳은 없지. 하지만 그만큼 환한 빛이 그 어둠을 눈부시게 밝히거든.”
비록, 옛날 니르로르가 탑 바깥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빛이 어둠을 밝힐 시간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니르로르는 더 이상 죽음의 드래곤도, 어둠의 드래곤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어디 한번 해봐.”
니르로르가 유리한의 눈치를 보다 우물쭈물 말했다.
- …자신 없느니라.
“정말? 천하의 니르로르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유리한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격려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니르로르의 붉은 눈이 유리한을 응시했다. 그 시선에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이곳, 무림에 달빛이 닿지 않는 곳은 없을 거야. 무림은 엘리아룸과 달리 60층부터 69층까지의 모든 층이 닿아 있는 세계니까.”
그러니까 저 하늘 위에 떠있는 달빛은 이 세계에 모두 닿고 있을 거라며 유리한이 말했다.
그 말에 자신감이라도 얻었는지 니르로르가 그녀에게 물었다.
- 달빛이 닿는 곳에서 우락부락한 인간을 찾으면 되는 것이냐?
니르로르는 새로운 격을 얻은 후, 오랫동안 깊은 잠에 빠졌었다.
자신이 새로 얻은 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말이다.
그라면 분명, 지닌 힘을 잘 이용할 수 있으리라.
유리한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입을 열었다.
“응, 그리고 안내해 줘.”
- 어디로 말이냐?
“재수 없는 늙은이 기억하지?”
- 빌어먹을 마법진을 펼쳤던 늙은 인간 말이냐?
“그 인간 말고.”
- 그럼?
니르로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걔보다 더 늙어 보이던 녀석 있잖아. 기억 안 나?”
니르로르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 기억나느니라.
분명, 웬 비렁뱅이 같은 차림을 하고선 거들먹거리던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
어쨌거나 유리한은 니르로르의 말에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그래. 랴오륭을 그 녀석한테 안내해 줘.”
- 알겠느니라.
니르로르가 고개를 끄덕인 후, 곧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은 비늘 위로 맺힌 시리도록 밝은 빛이 그를 감쌌다.
짙은 어둠과도 같은 검은 비늘과 대조적인 밝은 빛.
너무나도 이질적인 광경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다웠다.
제로 바니스타가 니르로르가 발휘하는 힘에 놀라워하면서도 걱정스럽게 물었다.
“유리한 님, 괜찮겠습니까?”
“뭐가요?”
“니르로르 님께서 무슨 일을 겪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로 바니스타라면 조금 전, 유리한과 니르로르가 나눈 대화에서 그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아차렸을 터.
그렇기에 유리한은 걱정스럽게 말끝을 흐리는 제로 바니스타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무엇보다 니르로르도 익숙해져야 하거든요.”
새롭게 얻은 힘을 다루는 것에 말이다.
“그렇군요. 하지만 이렇게 지켜만 봐도 되겠습니까?”
“지켜만 보고 있겠다고 누가 그래요?”
“네?”
제로 바니스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리한은 씨익 웃었다.
“저도 움직일 거예요.”
그 말과 함께 유리한의 주위로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그녀가 자유자재로 그것을 다루며 입을 열었다.
“니르로르한테는 어둠이니 빛이니 뭐 그런 낯 뜨거운 소리를 했지만, 구천하는 빛이 닿지 않는 깊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는 게 특기거든요.”
그러니 니르로르가 암만 달빛을 이용해 힘을 발휘한다고 해도, 구천하에게는 그 힘이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진작 유리한 님께서 힘을 발휘하셨으면 될 텐데 말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뭐, 그렇기는 하지만 부모란 원래 아이가 스스로 하게끔 도와주는 사람이거든요. 아이의 일을 몸소 처리해 주는 역할이 아니라요.”
유리한이 그렇게 말한 후 눈웃음을 지었다.
“물론, 저는 니르로르의 부모가 아니지만요.”
유리한은 그리 말하면서 그림자를 사방에 풀었다.
니르로르는 어둠을 밝히고 있는 달빛을 움직이며 랴오륭과 구천하의 행방을 열심히 쫓는 중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니르로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찾았다, 유리한아! 우락부락한 인간을 찾았느니라!
“좋아, 잘했어.”
유리한 역시 니르로르와 짜 맞춘 것처럼 구천하가 숨어 있는 곳을 발견했다.
“니르로르, 내가 말하는 쪽으로 랴오륭 씨를 안내해 주도록 해.”
- 알겠느니라.
니르로르가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가 랴오륭에게 길을 안내해 주고 있을 때, 유리한은 시선을 느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신기해서 말입니다.”
유리한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제로 바니스타가 미소를 그렸다.
“유리한 님과 니르로르 님을 처음 봤을 때도 생각한 거지만, 두 분은 정말이지 죽이 척척 맞는군요.”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네요.”
유리한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처음, 니르로르를 이 탑에서 다시 만났을 때 얼마나 그를 죽이고 싶어 했던가?
‘질긴 악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인연이 될 줄 누가 감히 생각을 했겠는가?
- 유리한아, 우락부락한 인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도다.
“그래? 다행이네.”
랴오륭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하긴, 그래도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니까 오광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거겠지. 그 머리를 좋은 곳에 썼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유리한이 생각하며 말했다.
“좋아요,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구천하가 순순히 잡힐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유리한이 목소리의 끝을 흐리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힘들겠죠? 그래도 혈맹의 맹주께서 친히 나섰는데, 잡아 오지 않을까요?”
제로 바니스타는 대답 없이 애매하게 웃었다.
“아님 말고요.”
그럼 유리한 자신이 나서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탑 바깥에도 있었으니.
“디에스 씨 혼자 보낼 수는 없어요! 저도 데리고 가주세요!”
바로 디에스 라고였다.
디에스 라고는 고요한과 함께 초대 단장의 행방을 쫓았고, 금방 그를 찾아냈다.
센터의 새로운 협회장.
그가 바로 청의 초대 기사단장이었던 거다.
그리고 디에스 라고는 지금 그의 목을 치기 위해 움직이려는 중이었다.
“고요한.”
고요한은 그런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디에스 라고가 고집이 가득한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여기 남아서 시우를 보호하도록 해라.”
저희는요?
행복 머니의 직원들이 순간 그렇게 물어볼 뻔했으나 다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유시우는 도웅의 품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고요한이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런 고요한의 어깨를 디에스 라고가 토닥거렸다.
“시우를 지킬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나?”
그러니까 저희가 있는데요.
행복 머니의 직원들이 구시렁댈 뻔했으나 이번에도 다들 눈치 좋게 입을 다물었다.
자신들의 힘이 고요한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고요한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디에스 라고에게 말했다.
“초대 단장은 만만치 않은 실력자일 거예요.”
“그렇다고 해도 유리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
고요한은 말문이 막혔다.
디에스 라고의 말대로 청의 초대 기사단장이 암만 강하다고 해도 유리한의 힘에는 못 미치리라.
‘하지만 디에스 씨는?’
디에스 라고가 유리한 못지않게 강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 역시 유리한의 힘에 비할 바는 못 됐다.
‘청의 초대 기사단장에게 애를 먹으면 어떻게 하지?’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신은 유리한을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고요한의 머리가 복잡해지던 그때, 디에스 라고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는군.”
“그래요? 그럼 맞혀보세요.”
고요한이 비딱하게 물었다. 그에 디에스 라고가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맞히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지. 그럼, 다녀오도록 하지. 금방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걱정 같은 거 안 해요.”
고요한은 결국 그를 보내주기로 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는 불퉁한 얼굴로 자리를 비켜주며 디에스 라고에게 웅얼거렸다. 그에 디에스 라고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게 그런 인사를 듣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너무 기뻐하지 마세요. 디에스 씨가 다치면 유리한 씨가 슬퍼할 테니까 하는 말이거든요.”
그 말에 디에스 라고가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다치면 네가 치료해 주면 되지 않나?”
“그렇지만 디에스 씨의 상처는 치료해 주고 싶은 마음이 별로 안 들어서요.”
고요한이 싱긋 웃었다.
“스승님이 다쳐서 돌아올 거란 생각도 들지 않고요.”
디에스 라고가 기가 찬다는 얼굴을 보였다.
이럴 때만 ‘스승님’ 소리를 하는 제자가 참 얄미웠다.
하지만 어쩌랴?
저렇게 싹수없는 고요한을 제자로 받아들여 검을 가르친 건 바로 자신이었다.
결국 디에스 라고는 픽 웃었다.
“그래. 그럼, 시우를 부탁하지.”
디에스 라고가 그 말을 끝으로 창문 바깥으로 사라졌다.
고요한이 자신도 모르게 황급히 창가로 다가갔다. 디에스 라고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디에스 씨…….”
고요한이 사라진 남자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읊조린 후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달이시여. 제발,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시기를.’
탑이었다면 태양에게 빌었을 거다. 암만 사제복을 벗어 던졌다고 해도 한때는 태양교의 사제로 있었던 몸이었으니.
하지만 이곳은 탑의 바깥.
그렇기에 고요한은 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달을 향해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