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곧, 사라진 줄 알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그렇습니다. 그때는 부모 중 한 명이 희생을 하면 됐을 겁니다.
즉, 니르로르 대신 ‘죽음의 드래곤’이란 이름을 짊어졌으면 됐을 거란 말씀.
아리아텐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이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머니!”
리아그가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아리아텐의 두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그럼,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자연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목소리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리아텐은 허망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런 그녀에게 유리한이 다가가 말했다.
“아리아텐 님, 어차피 지나간 일이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이 몸을 희생할 거다.”
“하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죠.”
아리아텐이 입술을 꾹 깨물자 유리한이 손을 건넸다.
“그러니까 우리 기도해요. 이 녀석이 새롭게 받은 격을 잘 견뎌낼 수 있기를요.”
아리아텐이 파르르 입술을 떨다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래, 지금은 겨우 만난 아들의 회복을 돕는 것이 먼저였다. 그리고, 또한.
우르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부딪치고 있는 드래곤들을 말려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엘리아룸 전체에 영향이 갈 게 분명할 터.
유리한은 지금 이 상황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좋담?’
일단, 싸움을 말리는 데는 대화가 최고라고 하지만.
‘드래곤들이 우리 말을 들을 것 같지가 않은데.’
시드니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블루 드래곤의 장로는 다를 것 같았다.
그때였다.
“유리한.”
아리아텐이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며 다가왔다. 그에 유리한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아리아텐 님. 제 이름을 불러주시는 거 처음인 것 같은데 제 착각이겠죠?”
능청스러운 말에 아리아텐이 픽 웃었다. 유리한 역시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보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알겠어요. 장로님들 싸움 좀 멈춰달라는 거죠?”
“잠깐만요, 그건!”
자신이 말려야 할 싸움이라고, 에이런이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에이런.”
유리한이 저를 붙잡은 여인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당신은 여기서 에덴을 지켜야죠. 그러다 싸움에 휘말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블루 드래곤과 화이트 드래곤, 두 장로 모두 제대로 이성을 잃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상황.
유리한이 척, 창을 꺼내 들더니,
“금방 돌아올게요. 그리고 보여주도록 해요.”
에이런을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에이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무엇을요?”
그 물음에 유리한이 에이런의 품에서 칭얼거리고 있는 에덴을 가리켰다.
“아…….”
에이런이 얼빠진 목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좋아요! 자, 그럼.”
유리한이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니르로르를 아리아텐에게 억지로 안겨줬다.
“여기, 아드님 안으세요.”
얼떨결에 니르로르를 안게 된 아리아텐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니르로르라면 저 하늘 머리 인간에게.”
“요한은 이번에 같이 데리고 갈 거예요.”
그 말에 고요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에도 유리한이 자신을 니르로르의 곁에 두고 갈 줄 알았기 때문이다.
유리한은 그런 그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고는 아리아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렇게 치고받으면서 싸우고 있으니 다친 드래곤들이 많겠죠? 우리 요한이 힐(Heal)을 기가 막히게 잘 사용하거든요.”
“그래서?”
“부상자를 치료해 주면서 신뢰도 좀 얻으려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식은 부모 품을 더 좋아하잖아요? 그러니까 부탁 좀 할게요. 알겠죠?”
그 말에 아리아텐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유리한은 그대로 고요한과 디에스 라고와 함께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아리아텐은 그들이 사라진 곳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곧, 여린 어깨가 흔들렸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그래, 괜찮다.”
내뱉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곧, 아리아텐은 자신의 딸에게 니르로르를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리아그, 네 오라버니란다.”
“네, 이렇게 뵙네요.”
리아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오라버니? 부디 좋은 꿈 꾸고 있기를 바랄게요.”
그 소리를 들었는지, 니르로르는 고른 숨을 내뱉으며 옅게 미소를 그렸다.
* * *
쾅, 콰광―!
하늘이 울리고 대지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유리한은 태평했다. 물론, 그녀 옆의 디에스 라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리, 생각해 둔 작전은?”
“내가 언제 그런 거 세우는 거 본 적 있어?”
“본 적 있는데요?”
고요한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유리한은 벅벅 머리를 긁적였다.
“그거야, 작전을 세울 시간이 있어서 그랬던 거죠.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답이 없어요. 유일한 해결책이라면, 어디 보자…….”
유리한이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는 엘리아데스와 시드니를 보곤 말했다.
“저 덩치 큰 드래곤들을 필사적으로 말릴 수밖엔 없겠는데요? 물론, 주먹으로요.”
유리한이 짓궂게 웃으며 한 손을 꽉 주먹 쥐어 보였다. 그에 고요한이 걱정된다는 얼굴을 보였다.
“저희가 과연 저분들을 말릴 수 있을까요?”
엘리아데스와 시드니는 일족을 이끄는 장로답게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고요한의 걱정에 유리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네, 말릴 수 있어요.”
유리한의 손엔 어느새 창이 들려 있었다.
“요한은 쓰러져 있는 드래곤들의 상처를 살펴봐 주세요. 그들이 해치려고 하면 속박 마법을 거세요. 아마, 요한의 실력이 더 뛰어날 테니까요.”
“네? 제 실력이 드래곤보다 더 뛰어날 거라고요?”
고요한이 놀라 물었다. 유리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요한.”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요한은 무한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가끔 잊는 것 같아요.”
“아…….”
고요한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드래곤이 암만 ‘마법’에 있어서 최강의 생명체라고 불린다지만, 그들 역시 마력을 이용해 마법을 부리는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고요한은 그들보다 더욱 뛰어난 마력을 지닌 플레이어였다.
“네, 믿고 맡겨만 주세요.”
고요한이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디에스, 너는.”
“너와 함께 저 늙은 드래곤들을 말린다.”
디에스 라고가 유리한의 말을 끊으며 그렇게 말했다. 유리한은 두 눈을 깜빡이다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야지.”
사실, 마음 같아서는 디에스 라고를 고요한의 곁에 붙여두고 싶었다.
고요한이 암만 드래곤을 뛰어넘는 무한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나, 아직 경험 면에서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유리한이 고요한을 흘긋거렸다. 그는 최우선으로 치료할 환자를 찾는 모양인지, 빠르게 두 눈을 굴리고 있었다.
‘믿어보자.’
함께 탑을 오르며 가장 많이 성장한 사람은 바로 고요한이었다.
그렇기에 유리한은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자, 그럼. 저 늙은 드래곤들을 말리러 가보자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두 분.”
고요한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유리한은 방긋 웃었다. 디에스 라고는 못 들은 척, 무심한 표정을 짓고는 창을 꺼내 들었다.
곧, 두 사람은 빠르게 화이트 드래곤과 블루 드래곤의 장로가 맞부딪치고 있는 전투 현장으로 달려갔다.
콰과광―!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던 엘리아데스와 시드니가 갑자기 정반대의 방향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 크으윽……!
골이 울리자 엘리아데스는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소리 질렀다.
- 누구냐! 감히 어떤 녀석이 겁도 없이 이 신성한 싸움에 끼어든 것이냐!
“신성한 싸움이요?”
엘리아데스를 가볍게 발로 차 땅에 처박아 버린 유리한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암만 봐도 개판 5분 전인 싸움이었는데요?”
그녀 주위로는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떠다니고 있었다. 유리한은 그것을 밟고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엘리아데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인간?
“네, 인간이에요.”
단조로운 대답에 그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 하, 하하! 재앙이 될 어린 새끼를 데리고 도망쳤던 인간이군! 죽고 싶어서 돌아왔나 보지?!
유리한은 말없이 싱긋 미소를 그렸다. 그때, 엘리아데스와 마찬가지로 땅에 박혔던 시드니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 내 딸은…….
“무사하다.”
그녀 앞을 디에스 라고가 막아서며 말했다.
“그리고 네 손주 역시 무사하다.”
- 뭐?
묻는 말에 디에스 라고가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정체불명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나 보군. 니르로르 때는, 온 세상에 그 목소리가 울렸다던데.”
- 목소리?
의문을 품은 얼굴도 잠시, 시드니가 곧장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는 디에스 라고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었다.
“내 손주에게 떨어졌을 이름이, 니르로르 그 녀석한테 넘겨졌다는 말이냐!”
“그래. 네 손주는 이제 화이트 드래곤이다. 변종이 아니야.”
디에스 라고가 시드니의 손을 매섭게 쳐내고는 말했다.
“아… 아아…….”
시드니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벌벌 떨었다. 곧, 그녀는 울 듯 웃으며 엘리아데스를 향해 말했다.
“엘리아데스, 싸움은 끝이다. 내 손주가 재앙이 될 이유는 더 이상 없다.”
- 그 말을 믿을 것 같으냐?! 그리고 설사, 시드니. 네 말이 맞다고 해도.
엘리아데스가 까드득 이를 갈고는 몸을 일으켰다.
- 나는 이 인간을 살려둘 마음이 전혀 없다.
감히 블루 드래곤을 이끌고 있는 자신을 짐짝처럼 내던지다니!
- 용서하지 못한다, 인간.
“네네, 어련하시겠죠.”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 겁을 상실한 모양이군!
“글쎄요.”
유리한은 웃는 낯으로 엘리아데스를 향해 창을 치켜들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돕고자 하는 디에스 라고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나서지 말라는 뜻이었다.
디에스 라고는 불만 어린 얼굴로 그녀의 뜻에 따랐다.
유리한은 고맙다는 듯, 그를 향해 미소를 그려주고는 엘리아데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건, 블루 드래곤의 장로님께서 판단해 보시죠?”
그러면서 그녀는 비아냥거렸다.
“어디 한번 와보세요. 제가 한낱 ‘인간’ 따위가 얼마나 강한지 가르쳐드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