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 * *
“와우, 세상에.”
51층에 들어선 유리한이 입술을 오므렸다.
“화이트 드래곤은 바람의 정령왕님의 수호 아래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유리한에게 있어서 아우라는 그 누구보다도 고결하고 깨끗한 기운을 가진 존재였다.
그런데 이렇게 탁한 공기 속에서 화이트 드래곤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니!
“그 여자가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지?”
유리한이 말한 ‘그 여자’란 리아그였다. 그러자 디에스 라고가 고개를 저었다.
“화이트 드래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드래곤이란 생명체가 살고 있는 건 맞는 것 같군.”
“그걸 어떻게 알아?”
디에스 라고는 말없이 하늘 위를 가리켰다.
“아하, 태양의 눈으로 살펴본 모양이구나?”
태양의 눈은 A급 스킬로 일대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럼, 드래곤들이 어디 있는지도 알아봤어?”
“알아보려고 했지만 그건 실패했다. 태양의 눈으로 파악이 불가능한 고차원의 마법을 펼치고 있는 것 같더군.”
“하긴, 드래곤이니까.”
드래곤은 모든 마법의 최정점에 도달한 생명체.
하지만.
“그래도 대충 감지는 했지?”
“물론.”
유리한의 말에 디에스 라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직진하면 나올 거다. 하지만 그들을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왜? 마법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감추고 있을까 봐?”
“그래.”
“그거야 문제없지.”
유리한이 그렇게 말하고는 창을 꺼내 들었다.
“마법을 펼치고 있다면 부수면 돼. 공격한다면 막으면 되고.”
그 말에 디에스 라고가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유리한이 원래의 모습을 찾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니르로르, 저 망할 녀석 때문에 이성을 잠시 잃은 것 같더니.’
니르로르 때문에 유리한이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디에스 라고는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유리에게 있어 소중한 존재가 된 거겠지.’
디에스 라고가 불만 어린 시선으로 니르로르를 노려봤다. 그 눈빛에 고요한이 니르로르를 꼭 끌어안으며 경계했다.
“왜 그러는 거지?”
“니르로르 씨는 많이 약해진 상태예요. 괴롭힐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
“약한 녀석을 괴롭힐 정도로 내가 못난 사람처럼 보이나?”
“네.”
고요한이 고민도 않고 대답했다. 디에스 라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고요한, 저 녀석은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에나 한결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다.
“자자, 다들 그만 싸워.”
“싸운 적 없다.”
“맞아요, 유리한 씨. 저희는 싸운 적 없어요.”
“네네, 그렇겠죠.”
유리한이 심드렁하게 말하는 순간. 고요한이 니르로르를 더욱 깊이 끌어안으며 말했다.
“공기의 흐름이 심상치 않아요.”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째질 듯한 비명과 함께 대지가 울렸다.
서로 다른 속성을 가진 드래곤들이 맞부딪친 거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51층 전체가 떨릴 정도였다.
“와우, 어떻게 할까요?”
유리한이 휘몰아치는 광풍에 픽 웃으며 말했다.
“이대로 있으면 싸움에 말려들 것 같은데, 잠시 자리를 피할까요? 아님.”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서로 맞부딪치고 있는 드래곤들의 싸움에 끼어들까요?”
그 말에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입을 열었다.
“유리, 네가 원하는 대로.”
“저도 유리한 씨께서 원하는 대로 따를게요. 하지만…….”
고요한의 시선이 자신의 품에서 금방에라도 죽을 듯 쌕쌕 숨을 몰아 내쉬고 있는 니르로르에게로 향했다.
유리한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고는 입을 열었다.
“니르로르를 생각하면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죠.”
자칫 잘못하면 니르로르의 상태가 지금보다 훨씬 더 나빠질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은 원하지 않는 유리한이었다.
“디에스,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을 수 있을까?”
“나도 그러고 싶다만.”
태양이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에 파묻히고 말았다.
“으음, 땅굴이라도 파야 하나?”
“그건 추천하지 않으마.”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유리한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조금 전 만났던 여성이 있었다.
리아그와 마찬가지로, 가슴 아래로 내려오는 붉은 머리칼을 하나로 땋아 내린 여성이 서 있었다.
“드래곤들은 하나같이 대지의 움직임에 민감하거든. 이상한 일이지. 대지를 관장하는 정령왕의 힘을 본받은 블랙 드래곤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없어졌는데 말이다.”
여성은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난 곳을 보며 말을 이었다.
“뭐, 새롭게 태어난 녀석이 하나 있지마는.”
유리한은 난데없이 나타난 여성을 경계했다.
“당신은 누구죠?”
유리한의 날 선 물음에 상냥한 목소리가 답했다.
“이분은 제 어머니이신 아리아텐 님이세요.”
“리아그?”
유리한이 놀란 눈을 보였다.
조금 전 만났던 그녀가 왜 여기 있는가!
놀람도 잠시, ‘아리아텐’이란 여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고요한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
“품 안의 그 드래곤.”
고요한이 니르로르를 꼭 끌어안았다. 아리아텐은 무심히 말했다.
“그 녀석 때문에 드래곤들의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라면 그만둬라. 죽도록 내버려 둬.”
“아니요.”
대답한 사람은 유리한이었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네요.”
“왜지?”
“그야, 제 소중한 동료니까요.”
“그 아이가?”
그 아이라니? 유리한은 당황한 얼굴로 여인을 쳐다봤다가 곧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네, 니르로르는 제 소중한 동료거든요. 그러니까 죽게 둘 수 없어요. 절대로요.”
단호한 목소리였다.
아리아텐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그 해츨링의 이름이 ‘니르로르’라고 했지? 니르로르는 과거, 이 땅에서 죽음의 드래곤이라고 불렸던 녀석이다.”
“오, 그래요? 탑 밖의 세상에서도 그렇게 불렸었는데.”
“그런데, 왜.”
“살리려고 하냐고요?”
유리한이 아리아텐의 말을 끊고는 싱긋 웃었다.
“말했잖아요.”
유리한이 고요한에게서 니르로르를 받아 안고선 미소를 그렸다.
“이 녀석은 제 소중한 동료예요. 그리고 암만 죽음의 드래곤이라 불렸다고 하지만 이 모습을 보세요. 하찮지 않나요?”
“뭐?”
“그러니까 죽음의 드래곤이든 뭐든 지금의 니르로르는 연약하고 어린 드래곤이라고요.”
그 말대로 유리한의 품속에 있는 그는 연약하고 어린 드래곤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드래곤은 해츨링을 무척 소중하게 여긴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때, 멀린이 흘리듯 해줬던 이야기를 떠올린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면 말고요.”
그녀는 싱긋 웃고는 니르로르를 다시 고요한에게 넘겼다.
“요한, 이 녀석 좀 다시 부탁할게요.”
“유리한 씨는 어쩌고요?”
고요한이 니르로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묻자,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저 싸움에 좀 끼어들어야겠어요. 디에스, 서포트 좀 해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디에스 라고가 창을 꺼내 들 때.
“둘 다 그만.”
아리아텐이 말했다.
“목숨 아까운 줄 안다면 저 싸움에 끼어들 생각 말고 나를 따라오도록 해라.”
“저희가 당신의 뭘 믿고 따라가죠? 제 소중한 동료를 죽도록 내버려 두라고 했던 당신을요.”
그 말에 아리아텐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보였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미다.”
“네?”
“네가 동료라고 불렀던 저 존재의 어미란 말이다. 그러니 잔말 말고 나를 따라오도록 해라.”
아리아텐이 그렇게 말하고는 휙 몸을 돌렸다.
“곧, 정신 나간 것들의 싸움이 이곳까지 미칠 테니.”
유리한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을 쳐다봤다. 그에 디에스 라고는 어깨를 으쓱였고, 고요한은.
“따라가 보도록 해요, 유리한 씨.”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내비쳤다. 물론, 유리한은 그 의견을 기꺼이 따랐다.
* * *
아리아텐을 따라 한 동굴에 도착한 유리한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 얼굴이구나, 인간아.”
“네, 정확히 봤어요.”
유리한이 기다렸다는 듯 아리아텐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니르로르를 탑의 주인에게 바쳤나요?”
“내가 바친 게 아니다.”
아리아텐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를 비롯한 모두가 바쳤지. 저 녀석은 그 당시에 너무나도 위험했거든.”
“그럼, 리아그 씨는요?”
불린 이름에 리아그가 몸을 움찔거렸다. 유리한은 못 본 척 계속 말을 이어갔다.
“리아그 씨가 당신을 어머니라고 불렀잖아요. 니르로르와 리아그 씨 모두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 아니에요?”
“잘 봤구나, 인간아.”
아리아텐이 기특하다는 듯 픽 웃고는 말했다.
“그래, 리아그도, 그 녀석도 모두 내 아이들이다. 아버지도 똑같은 형제지.”
유리한은 ‘그런데 왜, 니르로르를 이 세계에서 추방했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자신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아리아텐이 설명해 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리아텐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드래곤들은 본디 같은 속성 내에서 결합해야 하지. 하지만 다른 속성의 드래곤에게 이끌리는 멍청한 것들도 존재해서 말이다.”
그 멍청한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면서 아리아텐은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자식들은 부모의 속성 중 하나를 따라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블랙 드래곤과의 혼혈들은 달랐다.”
아리아텐의 두 눈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리아그는 나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지만 저 녀석은 그렇지 않았다. 저 녀석은 내 힘도, 아비의 힘도 모두 물려받았지.”
아리아텐은 고요한의 품에 잠들어 있는 새끼 드래곤이 ‘니르로르’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그에게로 향했다가 유리한에게로 돌려졌다.
“그렇게 섞인 힘이 얼마나 끔찍한지 아느냐?”
“아니요, 몰라요. 하지만 굉장히 강했겠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유리한이 웃는 낯으로 아리아텐에게 말했다.
“니르로르는 죽지 않기 위해 우리를 상대해야 했어요. 우리 또한 죽지 않기 위해 그를 상대해야 했고요.”
유리한이 아리아텐이 그랬던 것처럼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추방한 니르로르는 그렇게 모두의 적이 되어 홀로 살아남고자 발버둥 쳤었어요.”
아리아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이제 와서 죄책감이라도 가지라는 거냐?”
“그거야 어머니인 아리아텐 님 마음대로죠.”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그보다 아리아텐 님은 니르로르가 왜 저렇게 됐는지 아시나요?”
아리아텐이 니르로르를 흘긋거리고는 말했다.
“무리하게 힘을 사용하다 저렇게 됐겠지. 몇 번 봐서 안다.”
“안다고요?”
유리한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