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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168)화 (168/235)

168화 

평소라면 유리한은 제로 바니스타를 향해 비아냥거렸을 거다.

혹여 다칠까 싶어 그대로 달아난 줄 알았더니 아직도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힘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니요?”

“말 그대로입니다.”

뮤즈의 백작이 말했다.

“니르로르 님께서는 구시대와 다르게 격이 떨어진 상태라죠.”

“그걸 어떻게…….”

그 중얼거림에 제로 바니스타가 싱긋 웃었다.

“저는 뮤즈의 백작, 이 탑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제 손 위에 있답니다.”

그것참 잘났다면서 한 소리 해주고 싶었지만 유리한은 참았다.

대신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나요? 힘을 너무 많이 썼다는 건, 결국 마력을 많이 썼다는 말이죠? 제 마력을 나눠주면 되나요? 아님.”

고요한의 마력을 나눠주면 되겠냐는 그 말을, 유리한은 가까스로 집어삼켰다.

‘내가 미쳤지!’

빌어먹을 드래곤을 위해 고요한을 끌어들이려 했다니!

유리한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제야 복잡했던 머리를 말끔하게 비우고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백작,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주세요.”

“일단, 당신의 마력을 니르로르 님께 나눠주는 건 안 됩니다.”

“왜죠? 저는 이미 니르로르한테 마력을 나눠준 적이 있어요.”

그 덕분에 몇 날 며칠을 고생했지만 말이다.

그에 제로 바니스타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였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니르로르를 흘긋거리고는 말했다.

“니르로르 님께서는 격을 잃어버렸음에도 너무 많은 힘을 사용했습니다. 그 힘을, 저희 같은 한낱 인간이 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하냐고!”

유리한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쓰러졌을 때, 니르로르도 이런 기분을 느꼈던 걸까?

그 순간, 빌어먹을 드래곤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 하지만 감당할 수 있겠느냐? 짐의 죽음으로 느끼게 될 허탈감과 박탈감, 공허감. 그 모든 감정을 말이다.

당연히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죽은 것도 아니고, 단순히 쓰러진 것만으로도 이렇게 감정을 다스리기가 벅찼다.

“미안해요, 백작. 제가, 지금, 감정을 다스리는 게 힘들어서.”

“괜찮습니다. 원래 인간은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우는 생물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해한다며 제로 바니스타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니르로르 님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아래 세계로 내려가야 합니다. 이 무림에서 누가 마법을 사용할 줄 알겠습니까?”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엘레나 리본이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그에 제로 바니스타가 말을 덧붙였다.

“한낱 인간인 저희가 사용하는 마법이 아니라, 드래곤의 마법 말입니다.”

“하지만 백작, 나는 엘리아룸에서 드래곤 따위 본 적 없는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혈맹이야 이곳저곳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저희 청의 기사단은 다르잖아요?”

청의 기사단은 엘리아룸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그들 역시 혈맹과 다를 바 없이 아래층 곳곳에 자신들의 사람을 지배자로 내세우고 있었지마는.

어쨌든 랴오륭과 청예신의 말에 뮤즈의 백작이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두 분. 엘리아룸에 드래곤들은 멀쩡히 있답니다. 단지, 시끄러운 걸 싫어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유리한이 파르르 입술을 떨며 제로 바니스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그것들을, 아니, 드래곤들을 만날 수 있죠? 말해줘요, 백작.”

유리한은 제로 바니스타가 무슨 말을 하든 모두 들을 기세였다.

그들을 죽이라면 죽이고, 무수한 마력이 담긴 심장이 필요하다면 꺼내 올 것처럼 말이다.

진작 이성을 잃어버린 듯한 그 모습에 제로 바니스타가 다정하게 타일렀다.

“일단 진정하십시오, 유리한 님.”

유리한은 버럭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 같으면 소중한 사람이 이렇게 쓰러졌는데 진정이 되겠냐고 말이다.

‘소중한 사람이라고?’

문득 든 생각에 유리한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애초에 니르로르는 사람도 아니었거니와 소중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이 들다니.

‘종속 계약은 무슨, 결국 저주였잖아.’

유리한의 얼굴이 일그러지려던 찰나, 제로 바니스타가 말했다.

“엘리아룸의 정령왕들을 찾아가십시오.”

그러자 청예신과 랴오륭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백작, 그게 정말 방법인가요? 정령왕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아요. 당신도 알잖아요?”

“맞아, 네가 암만 정령왕들한테 ‘백작’이란 작위를 받았어도 그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잖아?”

“그렇기는 하죠.”

청예신과 랴오륭의 말에 제로 바니스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유리한 님은 다르답니다. 그렇죠?”

유리한이 대답했다.

“맞아요, 저희는 정령왕들을 직접 만났어요.”

“정말입니까?”

“와우! 영웅님, 멋지잖아?”

청예신과 랴오륭이 동시에 감탄했다. 하지만 유리한의 낯빛은 여전히 어두웠다.

“정령왕들은 만물을 감시하고자 53층에 있었죠. 여전히 그곳에 있나요, 백작?”

“아니요, 그들은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엘리아룸에 있습니다만.”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제로 바니스타도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말했다.

“다만, 유리한 님.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알지 않습니까? 보이진 않으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을 말입니다.”

“아.”

유리한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정령왕들과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아도 소통이 가능한 곳.

그곳이라면 유리한이 알고 있었다. 아니, 이곳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 거다.

엘리아룸의 황궁, 그곳 깊숙이 자리한 정령왕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신전 같은 방.

“좋아요.”

그곳을 떠올린 유리한이 고요한한테서 니르로르를 받아 들고는 말했다.

“까짓것, 정령왕들을 만나러 내려가 보죠. 그분들한테 드래곤들의 행방을 물으면 되겠죠?”

“네, 맞습니다. 그중에서도 레드 드래곤이나 화이트 드래곤의 행방을 알려달라고 하십시오.”

“왜 하필 레드 드래곤과 화이트 드래곤이죠?”

“레드 드래곤은 니르로르 님과 가장 비슷한 계열의 힘을 가지고 있고, 화이트 드래곤은 가장 반대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니르로르가 겪고 있는 이 상황에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부디, 제 정보가 니르로르 님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군요.”

“충분히 도움이 됐어요.”

유리한이 그제야 이성을 찾은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괜찮겠습니까?”

“뭐가요?”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로 바니스타는 잔잔하게 가라앉은 두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만물이 무너지고, 천하태평 역시 와해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무림입니다.”

유리한은 조용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뮤즈의 백작은 유리한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다음 세계로 넘어갈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잖습니까?”

물의 정령왕한테서 받은 아이템.

제로 바니스타는 그것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에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도대체 이 망할 백작께서 모르는 게 뭘까?’

아마 없을 거다.

그러니 제로 바니스타는 자신에게 일말의 거짓도 없이 답을 알려준 것이리라.

니르로르를 살릴 방법을, 그를 치료할 방법을 말이다.

그렇기에 유리한은 말했다.

“괜찮아요. 다음 세상으로 가는 문이 열리기를 바라는 여러분께는 미안하지만, 저는 니르로르를 살리는 게 먼저거든요.”

물의 정령왕한테 받은 아이템을 타인에게 넘길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유리한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물의 정령왕은 아이나 다름없었지.’

아이들은 자신이 선물해 준 것을 타인에게 넘겨버리면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그 아이템을 타인에게 주는 건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혹시라도 정령왕이 화를 내면서 드래곤들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으면 곤란하니 말이다.

“디에스, 요한.”

유리한이 함께 탑을 올라온 두 동료를 향해 물었다.

“함께 내려가 줄 수 있을까?”

“당연하지.”

“물론이죠, 유리한 씨.”

도대체 이 남자들은 거절이란 말을 모르는 걸까?

고민도 않고 대답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울컥, 감정이 차오른 유리한은 애써 웃었다.

“고마워.”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듯, 두 남자가 나란히 웃었다. 유리한 역시 그들을 향해 웃어주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청예신 단장님, 그리고 랴오륭 씨. 오늘 감사했습니다.”

“저야말로 감사했습니다, 유리한 씨. 덕분에 딸아이의 복수를 할 수 있었어요.”

“나야, 뭐. 저 빌어먹을 녀석 때문에 온 거니까 그런 인사는 필요 없다고.”

랴오륭은 감사 인사를 들은 것이 처음인 양 머리를 벅벅 긁적였다.

유리한은 픽 웃고는 물었다.

“나중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네, 기꺼이요.”

청예신의 말에 유리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함께 자진하자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그럴 분이 아니란 걸 아니까 말씀드리는 거예요.”

청예신이 눈웃음을 지었다.

“이미 잃었다가 다시 얻은 목숨을 함부로 포기할 분이 아닌 것 같아서요.”

유리한이 금붕어처럼 입술을 뻐금거리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네, 맞아요.”

유서아, 자신의 조카가 스스로를 희생하며 불러온 목숨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유리한이 씁쓸하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69층의 문지기를 격파할 때.”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 힘을 빌려주세요.”

오광의 두 곳이 힘을 합쳤으나 전전긍긍하며 결국 격파하지 못한 곳.

유리한의 말에 청예신이 미소를 그렸다.

“얼마든지요.”

랴오륭은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새로 펼쳐질 세상에 우리 혈맹이 없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기꺼이 힘을 빌려주도록 하지.”

“어쩔 수 없이 힘을 빌려주는 게 아니고요?”

그렇게 말한 사람은 서문기율이었다. 그 말에 랴오륭이 빼액 소리 질렀다.

“너는 나한테 태클을 안 걸면 죽는 병에라도 걸렸냐?!”

“그건 아닙니다만, 랴오륭 씨는 저희한테 저지른 죄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 모두 청산할 때까지 이럴 겁니다.”

“아오, 죽일 수도 없고!”

랴오륭이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 펄쩍 뛰었다.

유리한은 픽 웃고는 말했다.

“그럼, 저희는 엘리아룸에 내려가 보겠습니다. 무림은 여러분께 맡겨도 되겠죠?”

“네, 맡겨주세요.”

청예신이 씨익 웃었다.

“천하태평과 만물은 이곳에서 마교와 사파로 불리고 있다죠? 그 녀석들을 한번 소탕해 보죠.”

“그래서 한몫 단단히 챙기겠다? 우리 단장님 혼자 맛난 걸 먹게 둘 수는 없지.”

랴오륭이 비딱하게 웃었다.

경쟁이 되든 뭐가 되든 무림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을 것이다.

유리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고요한과 디에스 라고가 그녀의 곁에 섰다. 마치, 호위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자리를 떠나려던 찰나, 유리한이 제로 바니스타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저를 도와준 이유가 뭐죠?”

웃고 있던 제로 바니스타의 얼굴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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