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크흠, 화산의 3대 제자 중 한 명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장문인께서는 지금 혜연 님의 무덤을 돌보고 계실 겁니다.”
“혜연?”
“장문인께서는 화산을 잠시 떠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얻은 귀한 따님이시죠.”
“아아.”
유리한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에 의해 죽었다던 그 따님이신가 보구나? 혜연이라니, 이름 한번 예쁘네.’
유리한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렇다면 나중에 장문인을 뵙는 게 좋겠네요.”
“아니, 지금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유리한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문인, 운양이 온 것을 진작 알고 있던 유리한이 싱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화산의 3대 제자들은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너희는 잠시 자리를 비키도록 해라.”
“네, 장문인!”
화산의 3대 제자들이 빠르게 사라졌다. 유리한과 운양, 둘만이 남은 자리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내 부탁을 들어줄 생각인 것 같군. 그러지 않았다면 진작 화산을 빠져나갔을 테니.”
“에이, 화산을 어떻게 빠져나가요? 갈 곳도 없는데.”
물론, 갈 곳이야 만들면 그만인 유리한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리신인지 뭔지 하는 만물의 마법사와 그 수장이 나누던 이야기. 유리한은 그것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너무 착해도 탈이란 말이지.’
유리한이 픽 웃자 장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나를 비웃은 건가?”
“에이, 설마요!”
유리한이 웃는 낯으로 말하고는 입가에 그려져 있던 미소를 지우며 입을 열었다.
“장문인, 한 가지 여쭙고자 찾아왔습니다.”
“무엇을 묻고 싶은 거지?”
“제가, 아니, 저희가 종남을 어떻게 무너뜨려 주길 원하시나요?”
장문인이 고민도 않고 답했다.
“종남의 씨를 아주 말려줬으면 하네.”
“하지만 장문인, 다음 주에 모든 문파가 화산에 모일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를 누구에게서 들은 거지?”
아무래도 비밀이었던 모양이다. 유리한은 싱긋 웃었다.
“제 질문에 먼저 답해주셨으면 하네요.”
그러지 않으면 알려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장문인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그래, 마교와 사파를 물리치기 위해 모든 문파를 모을 생각이다. 그중에는 종남도 있지.”
“그런데 종남을 어떻게 제거해 달라는 겁니까?”
“자네들은 모든 문파가 모이는 자리에서 빠져 종남으로 향하면 된다. 화산에 모인 종남은 내가 처리할 테니.”
유리한은 입술을 오므렸다.
‘말하는 것만 보면 이 사람이 바로 마교의 주인인 것 같은데.’
하지만 마교, 즉 ‘천하태평(天下泰平)’의 주인은 구천하였다. 어쨌거나 유리한은 싱긋 웃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장문인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은혜 따윈 없었지만 유리한은 입에 발린 소리를 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화산의 장문인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 * *
드르륵, 탁!
문을 닫은 유리한이 곧장 긴 의자에 앉았다. 그러기 무섭게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다가왔다.
“유리, 어땠지?”
“어땠어요, 유리한 씨?”
그 물음에 유리한이 손을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말도 마, 완전 미친 사람이야. 뒷일 같은 건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어.”
모든 문파가 모인 자리에서 종남을 처리하겠다니, 그 뒷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몰래 처리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길 텐데.’
더욱이 외부인인 자신들에게 그 기회를 이용해 종남을 제거해 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냥 요한의 말대로 짐 싸 들고 도망갈 걸 그랬어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그 말에 유리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에요, 요한. 늦어도 한참 늦어버렸어요.”
화산을 빠져나오기 전, 빌어먹을 마법사와 그레이시 아서 간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이미 늦어버렸다.
“그래서 유리,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종남으로 가고 자시고 여기 남아 있어야지.”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만물과 천하태평이 쳐들어온다고 했어. 분명 나를 노리고 저지를 일일 텐데, 내가 빠지면 너무 섭섭하지 않을까?”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에 디에스 라고가 걱정된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유리. 너는 지금.”
“상태가 꽤 안 좋지.”
그 말대로 유리한의 안색은 창백했다.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것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유리한은 말했다.
“괜찮아, 곧 좋아질 거야.”
“유리한 씨…….”
고요한이 자괴감 어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는 유리한에게 몇 번이고 제 힘을 사용했다. 하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얽히고설킨 마력을 고요한의 뜻대로 풀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던 탓이다.
‘내가 조금 더 능력이 있었다면.’
고요한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모습에 유리한이 손을 들어 그의 머리 위에 얹었다. 흠칫, 그가 몸을 떨고는 유리한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요한,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제 마음이 아프다고요?”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고요한이 애써 미소를 그렸다.
“네, 유리한 씨.”
유리한이 울상을 짓지 말라니 웃어야지. 고요한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주위를 둘러본 유리한이 한 사람을, 아니, 한 마리의 드래곤을 찾았다.
“니르로르는?”
“잠시 바깥 공기를 쐬고 싶다면서 나갔어요. 드래곤 모습으로요.”
“네에?!”
유리한이 놀라 외쳤다.
“그 꼴로 밖을 돌아다니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안 되나?”
“당연히 안 되지!”
유리한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 세계 사람들이 드래곤을 본 적 있겠어? 장문인은 니르로르한테 영물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했지만, 본모습을 보면 분명.”
“괴물이라고 하겠죠.”
“아님, 날아다니는 도마뱀이라고 하거나.”
어느 쪽이든 좋지 않은 상황이 그려졌다.
유리한의 걱정에 고요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찾아서 데리고 올까요?”
“그래 줄래요? 부탁할게요.”
“네, 유리한 씨. 저만 믿고 쉬고 계세요.”
고요한이 웃는 낯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그가 나가자 방에는 유리한과 디에스 라고만 남게 됐다. 그렇게 적막이 내려앉았을 때, 유리한이 말했다.
“후우, 망할 드래곤 같으니라고. 사람 참 피곤하게 한다니까?”
“그러게, 그 망할 드래곤 진작 죽이자고 했잖아.”
“나도 죽이고 싶어. 속으로는 몇 번이고 죽였다고.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아졌다.
‘종속 계약’의 영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유리한은 니르로르를 원망할지언정 그를 죽이고 싶지는 않아졌다.
그렇기에 유리한은 말했다.
“하지만 니르로르를 죽이면 내가 망가질 거야. 그 망할 도마뱀이 그럴 거라고 했으니 그렇게 되겠지. 디에스, 너는 내가 그리되기를 원해?”
“설마.”
디에스 라고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그 모습에 유리한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그러니까 니르로르는 그냥…….”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솜사탕과 달고나에 환장하는 드래곤을.
유리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뭐?”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때, 세상에서 빛을 지웠던 그 일도. 멀린을 비롯한 많은 플레이어의 목숨을 앗아 간 그 일도.”
유리한이 잠시 말을 멈추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냥 다 받아들이자고.”
디에스 라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말했다.
“그래, 유리. 네가 그러자고 하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가끔은 자신의 의견에 반대되는 말도 해줬으면 하는데 디에스 라고는 그러지 않았다.
‘요한도 그렇지?’
유리한이 픽 웃고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참으로 바보 같은 남자들이었다.
한편, 니르로르를 찾아 나선 고요한은.
“무,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인간. 너는 분명 알고 있어. 유리한을 치료할 방법을.”
기둥 뒤에서 인간의 모습을 취한 니르로르와 백명의 대화를 엿듣는 중이었다.
* * *
“저, 협객님.”
“내가 협객이 아닌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마법사?”
니르로르의 대답에 고요한이 숨을 들이마셨다.
‘마법사라니!’
그럼, 백명이 지난밤의 그 마법사란 말이지 않은가!
‘그래서 디에스 씨가 백명 씨를 그런 식으로 때렸던 걸까?’
고요한은 지난날의 비무를 생각했다.
비무란, 정당하게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것. 하지만 고요한이 본 것은, 그저 디에스 라고가 백명을 인정사정없이 패는 모습뿐이었다.
어쨌거나 고요한은 최대한 인기척을 감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처음 왜 너를 유리한에게 데리고 갔다고 생각하나? 그녀를 치료해 줄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였다. 그런데 네놈은 끝까지 정체를 숨기더군.”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 모르겠습니다!”
“마법사는 드래곤을 경외한다고들 하지.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성큼, 백명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쓴 리신 앞에 다가선 니르로르가 으르렁거렸다.
“짐이 가진 힘을 직접 보여줘야겠느냐?”
리신은 꿀꺽 침을 삼켰다. 드래곤이 보이는 분노에 벌벌 다리가 떨렸다.
“유리한을 고쳐라. 기회는 이번 한 번이 마지막이다. 똑똑한 녀석 같으니 기껏 주어진 기회를 발로 차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니르로르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마자 리신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니르로르는 척척 걸어가 기둥 뒤에 숨어 있던 남자를 나지막하게 불렀다.
“고요한아.”
“네, 네?!”
“목소리 낮춰라. 짐이 마법을 펼치고 있기는 하다만, 저 녀석 꽤 실력이 좋은 편이다. 네 기척을 느낄 수도 있어.”
고요한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는 뜻이었다. 니르로르는 그 고갯짓에 만족스러워하며 걸음을 옮겼다.
고요한이 다급히 그를 따랐다.
“유리한은 돌아왔느냐?”
“네, 돌아오셨어요.”
“그럼, 가자꾸나.”
니르로르가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뿅! 소리와 함께 그가 순식간에 어려졌다.
“니, 니르로르 씨?”
“아, 힘이 다한 모양이다.”
“네?”
“유리한에게 빌려 썼던 마력이 모두 소진됐다는 뜻이니라. 그러니, 자. 고요한아.”
니르로르가 고요한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안아다오.”
고요한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얼떨결에 니르로르를 안아 들게 됐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종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무당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소림께서……!”
화산이 모든 문파를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