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 * *
“하하, 망했네.”
백명, 아니, 그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리신이 사형과 사제들에게 둘러싸여 허탈하게 웃고 있을 때.
“유리한 씨, 백명 씨를 치료해 주지 않아도 될까요?”
“누구요?”
“백명 씨요.”
고요한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디에스 씨께 엄청 두드려 맞았는데 말이에요. 어디 한 곳 부러졌을 수도 있어요.”
고요한이 계속해서 떠나 온 자리를 흘긋거렸다.
유리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요,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으니까요. 어디 부러진 곳도 없는 것 같았고요.”
대신, 죽도록 아플 거다.
디에스 라고는 어떻게, 어떤 식으로 사람을 때려야 고통에 몸부림치는지 아주 잘 아는 플레이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알아차렸으려나?’
자신이 백명,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유리한의 입꼬리가 비딱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뭐, 경고밖에 할 수 없는 게 아쉽네.’
평소라면 기회를 봐서 죽여버렸을 거다.
죽이기만 할까? 그 전에 무림에서 활동 중인 만물에 대한 정보를 모두 토해내게끔 만들었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너무 좋지 않았다.
유리한이 주위를 둘러봤다. 느껴지는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오감을 전부 활용해도 마찬가지.
유리한은 주변에 자신들을 제외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말했다.
“다들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화산을 탈출하게 짐을 꾸리도록 해.”
꾸릴 짐이라고 해도 몇 없겠지만 말이다. 유리한의 말에 디에스 라고가 미간을 좁혔다.
“장문인이 너한테 헛소리를 지껄였나 보군.”
“응, 종남을 없애달라니 뭐니 아주 맛이 갔던데?”
“하하,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것 같긴 했어요.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요.”
고요한이 유리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 말을 디에스 라고가 고쳤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지도 않았다. 대뜸 반말해 대며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는 꼴이라니. 인사를 나눌 가치도 없는 녀석이었다고 생각했다만, 유리 네게 그런 헛소리를 했을 줄이야.”
그럴 줄 알았으면 화산의 높은 분께 주먹이라도 날렸을 법한 얼굴이었다.
유리한은 웃었다.
“어쨌든, 오늘 밤 당장 화산을 탈출하도록 하자고.”
화산의 무인들을 눈을 피하는 건 쉬웠다. 유리한에게는 ‘어둠을 지배하는 자(S)’가 있었으니 말이다.
칭호의 효과를 사용하는 순간 화산과는 영영 작별이었다.
‘아쉽네, 마교랑 사파에 대한 정보 좀 얻으려고 했더니.’
정보는 개뿔, 자신을 이용하려고 들다니.
‘몸 상태만 좋았다면 한 방 크게 먹였을 텐데.’
유리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의 컨디션은 여전히 최악이었다. 쓰러질 때보다야 낫기는 하지만, 여전히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도 칭호의 힘을 사용하는 데는 무리가 없어서 다행이네.’
유리한은 그것으로 만족해하며 어둠 속에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 니르로르와 함께 화산을 빠져나갈 때였다.
“큰일 났습니다, 수장님!”
듣기 싫은 칭호가 들려왔다.
유리한이 자리에 멈춰 섰다. 뒤를 따르던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도 걸음을 멈췄다.
당연히 니르로르도 긴 머리칼을 바람에 흩날리게 내버려 두며 제자리에 섰다.
유리한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백명이, 아니…….
마법사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로브를 입은 웬 남자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연락을 한 것이냐, 리신.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유리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유지한이 갇혀 있던 지하실, 햇빛이라고는 들지 않던 그곳에서 끊임없이 동생을 앞에 두고 나불대던 목소리와 똑같았던 탓이다.
‘그레이시 아서.’
유리한이 주먹을 꽉 쥐었다. 감히 ‘아서’의 이름을 달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빌어처먹을 마법사.
유리한이 들끓는 감정을 잠재우고자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는 사이 리신은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나불댔다.
“유리한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습니다! 이대로는 화산이고 뭐고 어떤 문파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그 전에 제가 죽고 말 겁니다!”
유리한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화산에서 얻지 못한 정보를 지금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리한 씨.”
“쉿.”
유리한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부르는 고요한의 입을 막고는 이름 모를 마법사를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저 녀석이 분명 그 마법사겠지.’
백명의 모습을 취하고, 북해빙궁에서는 죽은 이들을 인형처럼 움직이며 자신을 농락했던 녀석.
그리고.
‘설영을 괴롭혔던 녀석.’
유리한이 으득 이를 갈았다.
괴롭히기만 했을까? 사실상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나 다름없는 녀석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검을 들어 저 목을 쳐버리고 싶었다.
“유리.”
디에스 라고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에 반응했다. 유리한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아, 디에스.”
유리한이 빠르게 살기를 갈무리했다. 화산을 빠져나온 것만큼이나 중요한 순간.
‘만물과 천하태평(天下泰平)에 대한 정보를 얻을 기회야.’
유리한은 순간 눈앞이 어지러운 걸 느꼈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빌어먹을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다행히도 리신은 유리한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계속해서 나불댔다.
“장문인 또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주 내로 모든 문파의 사람을 모을 거라는데……!”
- 그럼, 그때 너는 장문인을 처리하도록 해라.
“수장님!”
- 임무는 계속된다. 유리한은 화산에 있다고 했지?
“네?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정체가 들킨 것 아니겠냐면서 마법사가 우는소리를 냈다.
“그리고 디에스 라고, 그 자식한테도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고요! 분명 그 자식도 제 정체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해요! 저는 죽을 거예요, 여기서 죽고 말 거라고요!”
징징거리는 목소리에 그레이시 아서가 부드럽게 제자를 달랬다.
- 너무 그러지 말거라, 리신. 유리한은 쉽게 너를 죽이지 않을 거다.
“엄청 쉽게 죽일 것 같던데요? 저한테 대놓고 경고했다고요!”
유리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언제?’
행동거지 조심하라는 뜻을 내비치기는 했지만, 대놓고 죽일 거란 경고 따위 한 적 없는 그녀였다.
- 어쨌든, 리신. 너는 화산의 장문인이 모든 문파를 불러오는 날을 정하면 내게 다시 연락하도록 해라.
“일을 계속 진행할 생각이십니까? 유리한이 있는데도요?”
- 유리한이 있으니까 더더욱 그래야지.
“네?!”
리신이 놀라 물었다. 그 물음에 환하게 빛나는 수정구로부터 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그녀는 약한 자를 외면하지 못한다. 우리 만물과 천하태평의 머저리들이 무인들을 해칠 때, 그녀는 필시 나설 터.
그 말에 유리한이 입매를 비틀었다.
‘저 빌어먹을 새끼가?’
유리한, 그녀가 약한 자들에게 약하고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자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이용하려고 들 줄이야.’
유리한이 주먹을 꽉 쥐었을 때, 만물의 수장은 말했다.
- 그때, 우리는 유리한이 가지고 있는 보물을 강탈한다.
“물의 정령왕이 유리한에게 줬다는 보물 말씀이십니까?”
- 그래, 그게 있어야만 69층의 문지기를 격파할 수 있다.
유리한은 그 말에 안도했다.
만물과 천하태평(天下泰平)이 69층을 먼저 격파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듯했다.
하지만.
“어떻게 할까?”
유리한이 물었다. 질문의 대상은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 두 사람이었다.
“짐은 저자의 목을 지금 따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만.”
물론, 니르로르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리한은 그 말에 픽 웃었다.
“저 녀석은 지금 만물의 수장과 연락 중이야. 그런 연락이 갑자기 끊겨 봐. 만물에 아주 비상이 걸릴걸?”
그것도 매우 중요한 임무를 받은 것 같은데 말이다.
“이대로 그냥 화산을 벗어나는 건 안 될까요?”
고요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리한은 그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한 자들에게 한없이 약한 사람, 그건 고요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저런 말을 하다니.
반대로 디에스 라고는 고요한의 말에 반대했다.
“화산으로 다시 돌아가 때를 기다리도록 하지.”
“때라면 무슨 때?”
“당연히 만물과 천하태평 녀석들이 쳐들어오는 때이지 않겠나?”
디에스 라고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 마법사 녀석이 다음 주에 모든 문파 사람을 화산에 모을 거라 하지 않았나. 바로 그날, 화산의 장문인이 종남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라고 명령할 게 분명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꽤 좋은 날이지 않은가? 화산에 모든 사람이 모였을 때, 자신들은 빈집 털이를 할 수 있다니.
“하지만 빈집 털이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그리고 그 자리에서 종남의 사람들은 또 어떻게 죽여?”
가만히 들어보니 화산의 장문인은 모든 문파의 사람들을 모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겉으로 내린 명령은 그런 듯했다. 그런 자리에서 이름 모를 협객이 칼부림을 벌이기 시작한다?
‘무림의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리기 딱 좋지.’
유리한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무림의 적은 마교와 사파, 그러니까 천하태평과 만물이라 불리는 자들만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유리. 너는 어떻게 하고 싶지? 나는 네 뜻에 따르겠다.”
“저도요.”
니르로르는 대답 없이 그저 유리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 대답이야 뻔하잖아.”
유리한이 씨익 웃었다.
화산이 모든 문파를 불러 모았을 때, 만물과 천하태평이 그 자리에 나타나 무인들을 유린하면서 그녀까지 노릴 생각인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유리한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 * *
화산의 날이 밝았다.
건물 곳곳을 청소하고 있던 3대 제자들이 모여 수군거렸다.
“야, 그거 들었어? 장문인께서 모든 문파의 사람들을 불러 모을 거래!”
“언제?”
“다음 주에!”
그 말에 누군가 말했다.
“그게 가능해? 종남이라면 몰라도, 다른 곳은 여기까지 오는데 족히 사나흘은 걸릴 텐데?”
“그러니까 다음 주로 잡은 거지! 빠르든 느리든 그때는 모두 도착할 때니까!”
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백명 사형은 괜찮으시대? 웬 협객한테 아주 두들겨 맞았다는데?”
“야, 말조심해. 그건 신성한 비무였다고.”
“내 눈에는 전혀 신성한 비무로 보이지 않았는데?”
그렇게 왁자지껄 3대 제자들이 떠들어대고 있을 때였다.
“저기요.”
듣기 좋은 발랄한 목소리가 그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어깨 아래로 찰랑거리고 있는 검은 머리칼, 무림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가벼운 정장 차림의 여자가 그들에게 물었다.
“장문인을 뵙고자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요? 분명, 어제 만난 곳에 계시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싱긋, 웃음을 짓는 그녀를 본 3대 제자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유리한, 그녀는 대답이 들려오기를 기다리며 미소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