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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157)화 (157/235)

157화 

유리한은 잠시 말이 없다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부탁이라니, 무엇일까요?”

화산의 장문인, 그가 무슨 부탁을 할지는 대충 예상이 됐다.

‘마교를 없애달라거나, 사파를 제거해 달라거나 그런 거겠지.’

하지만 그 무엇도 아니었다.

“종남이라고 아나?”

“종남이요? 네, 알아요. 백명이 그쪽 사람들과 싸우고 있는 걸 우연히 목격해서요.”

“그래, 그렇게 백명과 동행하게 됐다고 했지.”

장문인인 운양이 만족스럽게 웃고는 말했다.

“내 부탁은 간단하네. 종남을 제거해 주게.”

그 말에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장문인. 지금은 종남을 제거하는 것보다 마교와 사파를 없애는 것이 급하지 않나요?”

“그들이야 알아서 자멸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네.”

유리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퍽이나 알아서 자멸하겠다.’

자멸은 무슨, 서로 손잡고 무림을 헤집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둘이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장문인이지? 장문인은 박식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눈앞의 장문인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곧 유리한은 운양이 왜 그렇게 종남에 집착하는지 알게 됐다.

“그 빌어먹을 것들은 감히 우리 화산의 것을 탐냈지. 내 딸까지도.”

“그래서 그 따님께서는?”

“종남의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겠다며 목을 그었네.”

유리한은 온몸의 솜털이 쭈뼛하게 서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장문인이 두 눈을 붉게 빛내며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리한은 오싹하게 이는 감정을 숨기며 다정하게 미소를 그려 보았다.

“하지만 장문인, 그렇다고 종남을 제거해 달라니요? 저는 그저 지나가는 협객입니다.”

“아니.”

운양이 살기를 내뿜으며 으르렁거렸다.

“화산에 들어온 이상, 자네 역시 내 사람이네.”

유리한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게 무슨 개소리야?’

안 그래도 어지럼증이 다시 도져 힘들어 죽겠는데, 이 늙은이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

‘아, 피곤해.’

유리한이 눈가를 꾹꾹 누르자 니르로르가 물었다.

“유리한아, 괜찮으냐?”

“응, 괜찮아.”

사실 괜찮지 않았다. 그때, 장문인이 니르로르를 향해 붉게 빛나는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자네, 영물이라지?”

“짐은 영물 따위보다 훨씬 더 귀한 몸이다.”

“그래, 그러니 내 부탁을 들어주게. 원하는 건 뭐든 줄 테니.”

“짐이 원하는 건 네놈이 줄 수 없는 것이다만?”

평소 운양의 성격이라면, 네까짓 게 뭔데 반말을 찍찍하냐고 화를 냈을 거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영물. 여자와는 달리 함부로 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양은 말투를 고치지 않고 부탁했다.

“내 줄 수 있을 거라네! 자네가 원하는 건 뭐든, 내 온몸을 갈아서라도 줄 테니 말해주게! 자네가 원하는 것을!”

“흐음.”

니르로르가 입꼬리를 올렸다. 남들이 보기에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유리한이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역시 죽음의 드래곤.’

한낱 날개 달린 어린 도마뱀 모습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니르로르는 청년의 외양이었다.

그것도 한눈에 봐도 이 세상 외모가 아닌 듯, 장문인과 똑같으나 다른 느낌의 붉은 눈을 지닌 미남이었다는 거다.

니르로르가 고민하듯 아래턱을 어루만지고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먼저 네 목숨.”

“뭐라?”

운양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니르로르는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무엇이든 줄 수 있을 거라고 한 건 네놈이다.”

맞는 말이었다.

“왜, 무서우냐?”

니르로르가 놀리듯이 물었다. 운양은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이내 핏발 선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알겠네!”

유리한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 인간이 미쳤나?’

그리고 유리한은 운양의 상태를 정확히 맞혔다. 그는 제 하나뿐인 딸을 잃은 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화산의 모든 무인 앞에서야 제정신인 것처럼 행동하려 했지만, 그는 언제나 종남에 대한 복수심으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운양이 니르로르를 향해 큰절이라도 올릴 것처럼 굴며 말했다.

“종남, 그 망할 것들을 모조리 죽이고만 와준다면 내 이 목숨 기꺼이 내놓겠네! 얼마든지 줄 테니, 자! 어서 종남의 작자들을 죽여주게! 내 이렇게 빌겠네!”

유리한이 기가 찬다는 얼굴을 보였다. 니르로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각했던 시나리오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면 벌벌 떨면서 부탁을 물릴 줄 알았더니.’

역시 인간은 알면 알수록 이상한 녀석들이라고 니르로르는 생각했다.

유리한은 골치가 아팠다.

‘미친 거 아니야? 종남의 사람들을 모두 죽여달라니! 우리를 어떻게 보는 거야?’

마교, 그러니까 ‘천하태평(天下泰平)’도 하지 않을 일을 시킨다며 유리한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아, 그래. 마교가 있었지.’

유리한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장문인께서 종남에 가지고 있는 분노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운양이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유리한은 그 시선에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장문인의 부탁을 들어드리기에는 힘도 실력도 많이 모자란답니다.”

“웃기는 소리 말게!”

쾅!

운양이 협탁을 내리쳤다.

“내 분명 말했을 텐데! 자네가 아래 세계에서 떨친 명성을 똑똑히 들었다고!”

유리한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생각했다.

‘망할, 도대체 엘리아룸에서 내 이야기가 어떻게 와전되고 있는 거야?’

엘리아룸에서 한 일이라고는 꼴 보기 싫은 마탑에 한 방 먹여준 일밖에 없는 유리한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운양은 피를 토해낼 것처럼 목소리를 뱉어냈다.

“자네는 종남을 부술 수 있네! 영영 9파에서 그 이름을 지울 수 있는 힘과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일세!”

“그걸 장문인께서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그저 저잣거리에 도는 말뿐일 수도 있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좋네!”

좋기는 뭐가 좋다는 걸까?

유리한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화가 안 통하네.’

마치, 벽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장문인은 어린아이보다 더한 고집불통이었다는 거였다.

‘그래, 그렇다면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고 물러나야지.’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장문인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종남이 어디에 있는 곳인지도 모르고,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 또한 아무것도 모르니 시간을 조금 주셨으면 합니다.”

“충분히 주겠네! 그리고 내 모든 걸 알려주겠네! 종남에 대한 건 그게 뭐든 간에 말일세!”

“감사합니다, 장문인.”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대화 즐거웠습니다.”

전혀 즐거운 대화가 아니었지만 유리한은 예의상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비틀, 몸이 휘청거렸다.

‘아, 쓰러진다.’

유리한이 그렇게 생각할 때 몸이 붙잡혔다. 아주 크고 단단한 팔에 말이다.

쓰러지려던 그녀를 붙잡은 니르로르가 속닥거렸다.

“유리한아, 앞을 잘 보고 다녀라. 저 버릇없는 인간이 눈이 빠질 듯이 너를 보고 있으니 말이다.”

버릇없는 인간이라니, 도대체 어떤 녀석이 한 문파의 장문인을 저렇게 칭할 수 있을까?

유리한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장문인과의 대화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주한 광경은.

“디에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디에스 라고가 화산의 제자를 곤죽으로 만든 장면이었다. 유리한이 놀라 그에게 달려갔다.

“별거 아니다, 유리. 이 녀석과 비무란 것을 해보고 싶어서 살짝 검을 맞대본 것뿐이니.”

“살짝 검을 맞대본 수준이 아니잖아!”

아예 애를 반시체로 만들어 놓았다.

유리한은 황급히 디에스 라고가 반쯤 죽여놓은 사람을 살펴봤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디에스 라고, 그와 비무를 행한 사람이 다름 아니라 백명이었기 때문이다.

유리한이 한쪽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백명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마법사를 쳐다봤다.

“으으…….”

백명이, 아니, 리신이 끄응 앓는 소리를 내고는 눈을 떴다.

“유, 유리한 님?”

“아, 정신이 들었나 보네요?”

유리한이 아쉽다는 듯 싱긋 웃었다. 리신은 꿀꺽 침을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유리한 님. 고요한 님을 불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왜요?”

“온몸이 부러진 것 같습니다. 고요한 님께서는 남을 치료하는 신묘한 힘을 부리던데 그 힘을 제게 좀 써주십사 하여…….”

“딱히 요한의 힘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유리한이 비딱하게 웃으며 말했다. 리신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유리한은 그런 그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무림에는 영약이란 것이 있다면서요? 아, 그래. 의약당도 있다고 했지. 그곳에서 치료를 받아요.”

“그,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리신은 충동적으로 튀어나올 뻔했던 말을 겨우겨우 집어삼켰다.

유리한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무인이라면 일개 협객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 그게 더 좋지 않겠어요? 그렇죠?”

그 물음에 리신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디 빨리 회복하기를 바랄게요. 디에스와의 비무인지 뭔지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으면 하고요.”

유리한이 멍한 얼굴의 마법사를 격려해 준 뒤 니르로르, 디에스 라고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리신은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일행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는 유리한을 쳐다봤다.

“알고 있어.”

아니, 알아차렸다.

“내가 마법사인걸…….”

그것도 북해빙궁에서 마주쳤던 그 마법사란 걸.

“유리한이 알고 있어.”

리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당장에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그뿐이랴?

만물에서 내려온 임무도 잊고 화산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달아나는 건 제 목숨일 게 분명하니.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젠장.”

리신이 이를 으득 갈 때, 그를 걱정한 사형과 사제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백명 사형, 괜찮습니까?”

“디에스인지 뭔지, 이름 한번 해괴한 협객께서 참 못 할 짓을 저질렀습니다.”

리신은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차마, 그들에게 ‘죽기 싫으면 그 입 닥쳐라’라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지금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건 제 목숨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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