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리신 또한 속으로 한껏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아니, 울상을 짓고 있었다.
‘니르로르 님께서 도대체 무슨 부탁이 있어 그러시나 했더니!’
유리한이 쓰러진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야, 정신을 잃은 그녀와 함께 화산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드래곤의 부탁이라고 덥석 문 내가 등신이지!’
리신이 속으로 한껏 저를 욕하며 유리한을 향해 물었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으십니까?”
유리한은 순간, 이곳이 병원인가 싶었다.
‘의사인 줄 알았네.’
그것도 동네 병원 의사.
암만 화산 무인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알맹이는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유리한은 픽 웃고는 말했다.
“안 좋은 곳은 없어요.”
“거짓말하지 말거라, 유리한아. 아직 몸이 뜨겁지 않으냐.”
“아니야, 안 뜨거워.”
“뜨겁다.”
리신은 아웅다웅 다투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순간 생각했다.
‘자리, 비켜줄까?’
그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유리한과 니르로르였다.
그렇게 리신이 슬쩍 걸음을 뒤로 물리려고 할 때.
“인간, 어서 이 녀석을 진찰해라. 인간은 이마가 뜨거우면 뇌가 녹는다고 들었다. 그러기 전에 어서 유리한을 진찰해.”
“야, 니르로르! 죽고 싶어?!”
니르로르가 유리한을 제압했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다.
하지만 유리한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고, 그녀로부터 마력을 얻은 니르로르의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리신은 쭈뼛대며 두 사람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드래곤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니르로르가 암만 죽음의 드래곤이니, 세상을 멸망시킬 뻔한 원흉이니 뭐니 떠들어대도 리신에게는 아니었다.
리신뿐만 아니라 모든 마법사들에게 그럴 것이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드래곤은 환상의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야, 마법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존재이지 않은가?
‘누가 멀린 아서 님과 드래곤을 비교했다가 수장님께 목이 잘려 나갔었던 일이 있었지.’
어쨌든 간에 드래곤은 선망의 대상. 그러니 리신은 기꺼이 니르로르의 말을 따라주기로 했다.
성큼, 가까이 다가온 리신을 향해 유리한이 으르렁거렸다.
“저는 괜찮아요.”
“하하, 그렇게 보이지만 말입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 편안하게 제게 몸을 맡겨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유리한은 묻고 싶었다.
‘너라면 맡기겠냐?’
그녀는 북해빙궁에서의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후, 그들을 인형처럼 부렸던 빌어먹을 마법사.
그가 바로 제 앞에 있는데 믿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니르로르에 의해 온몸이 꽁꽁 묶이고 말았다. 그가 뒤에서 유리한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꼭 끌어안아 버렸기 때문이다.
크흠, 리신이 헛기침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자, 그럼 한번 살펴봐 드리겠습니다. 원래 이건 의약당의 무인들이 하는 일이지만, 현재 의약당은 바빠서 말입니다.”
그러니 양해 부탁드린다면서 리신이 유리한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뜨겁군.’
니르로르의 말대로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리신은 마력을 흘려보내 유리한의 몸을 살폈다.
마력이든 내공이든 한 끗 차이라,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라면 그 차이점을 알지 못했다.
문제라면, 유리한은 바로 그 ‘고수’라는 점이었다.
‘이 새끼, 자신이 그 마법사란 걸 숨길 생각 따위 없는 건가?’
아님,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걸 수도 있었다. 유리한은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을 입술을 꾹 깨물어 막았다.
그러는 동안, 유리한의 몸을 살핀 리신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곧 그가 붙잡고 있던 유리한의 손목을 놓아줬다.
“끝났습니다.”
“유리한은 어떠하냐? 온몸이 아주 불덩이니라.”
“그건 열 때문에 그렇습니다. 몸살이라고 하지요. 아무래도 최근 일이 많아 몸에 피로가 쌓여서 그런 것 같으니 약을 지어드리겠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물론, 유리한은 지금 몸살로 끙끙 앓고 있기는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랬다는 거다.
‘마력이 엉망진창으로 흐르고 있어. 꼬여 있다고!’
플레이어에게 있어서 마력은 곧 심장이나 다름없었다. 마법사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또 다른 심장이나 다름없었고.
그런 심장이 지금 망가져 있는 상태였다.
‘이길 수 있다.’
분명 회복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테였다.
‘저건 고요한이라는 작자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거다.’
리신이 속으로 한껏 비웃음을 내보였다. 물론, 얼굴에 띤 건 선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그럼, 바로 약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고맙구나.”
유리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신 역시 놀란 눈이었다. 천하의 드래곤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다니!
어쨌거나 리신은 빠르게 놀란 심정을 갈무리한 후 고개를 꾸벅거렸다.
그렇게 탁, 문이 닫히고.
“야, 니르로르! 너 미쳤어?!”
“크흑!”
유리한이 자신의 머리를 이용해 니르로르의 턱을 후려쳤다. 니르로르가 아래턱을 감싸 쥐며 그녀를 놓아줬다.
유리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거렸다.
“왜 하필 저 새끼를 데리고 온 거야?!”
“손이 남는 인간이 저자뿐이라 그랬다! 그리고 가장 실력이 있는 자이기에 그랬고!”
니르로르가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유리한은 어지러운 머리를 감싸 쥐며 말했다.
“저 녀석, 마법사야.”
“뭐라?”
“마법사라고, 마법사! 우리를 지금까지 진득하게도 괴롭혔던 빌어먹을 마법사 새끼라고!”
유리한의 외침에 니르로르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그게 정말이냐, 유리한아?”
“그럼, 거짓말이겠냐?!”
유리한이 빼액 소리 질렀다.
‘아, 어지러워.’
유리한은 결국 침대에 털썩 드러눕기로 했다. 어지러워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단순 몸살이라니, 웃기는 소리를 다 하네.’
이름 모를 마법사의 불쾌한 마력이 제 온몸을 꼼꼼하게 살피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표정이 꽤 어두웠었지.’
단순 몸살이라면 그런 얼굴 따위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빌어먹을, 니르로르에게 마력을 빌려주면서 뭔가 이상이 생긴 게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의 몸 상태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정말로 자신이 몸살로 끙끙 앓고 있는 거였다면 고요한이 진작 치료를 해줬을 테니까.
“야, 니르로르.”
니르로르는 자신이 마법사를 데리고 왔다는 것에, 아니, 눈앞에서 리신이 마법사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에 충격을 먹은 얼굴이었다.
“니르로르, 야!!”
“무, 무슨 일이냐, 유리한아! 왜 그렇게 짐을 부르는 것이냐?!”
놀라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며 호들갑을 떠는 그에게 유리한이 손을 내밀었다.
니르로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 손을 꼭 끌어 잡았다.
“손잡지 말고 내 마력 좀 살펴봐 달라고. 너도 할 수 있잖아?”
“아하, 그런 거였군.”
니르로르가 맞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곧장 유리한의 몸을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했다.
“이상하구나.”
“뭐가.”
“꼬일 대로 꼬였다.”
역시나, 그 빌어먹을 마법사가 자신의 상태를 숨기려고 든 모양이었나 보다.
“어떻게, 어떤 식으로 얼마나 꼬였는데? 풀 수 있어?”
“실타래 같구나. 그것도 엄청 엉킨 실타래. 그것들이 네 온몸을 갉아먹고 있는 중이니라.”
“표현하고는.”
유리한이 쯧 혀를 찼다.
“네가 어떻게 풀어줄 수는 있어? 명색이 드래곤이잖아.”
“지금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내 마력을 그렇게 가져가 놓고?”
유리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니르로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짐이 가져간 네 마력은 아주 조금뿐이었느니라.”
“장난해? 지금 내 마력 수치가 얼마나 낮아졌는지 알아?”
반토막이면 다행이지, 유리한의 마력 수치는 지금 100 이하를 기록 중이었다.
니르로르는 머쓱하게 웃었다.
“어쨌든 차츰 나아질 것이다, 유리한아. 걱정하지 말거라.”
“걱정이 안 되게 생겼어? 엉킨 마력이 내 온몸을 갉아먹고 있는 중이라면서? 이거 괜찮은 거야?”
“아마도.”
아마도라니!
유리한은 저 빌어먹을 드래곤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너무 화를 낸 탓일까?
“아으…….”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유리한은 니르로르를 향해 화내는 대신 두 눈을 꼭 감고 있기로 했다.
“유리한아, 괜찮으냐?”
“괜찮아 보여?”
“아니.”
“그럼, 왜 물어본 거야.”
유리한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더 이상 말 시키지 마. 어지러워 죽겠으니까.”
“알겠느니라.”
니르로르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뿐.
“유리한아.”
“내가 말 시키지 말랬지?”
날 선 목소리가 니르로르를 찌르는 찰나, 유리한의 이마 위로 커다란 손이 얹어졌다.
‘시원해.’
유리한은 순간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드래곤은 본디 인간보다 체온이 높다.
하지만 그들은 ‘도마뱀’이라는 별칭답게 마음대로 체온을 조절할 수 있었다.
그래, 지금처럼 말이다.
“시원하느냐?”
“으응…….”
유리한이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그 손에 얼굴을 부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니르로르는 그런 유리한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픽 웃었다.
“네가 이렇게 풀어진 모습이라니. 정말 믿기지 않는구나.”
놀리는 목소리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유리한은 그대로 잠에 빠졌다.
니르로르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고, 연약한 인간.
그런 인간이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저를 죽이기 위해 온몸을 날렸다.
“참 웃기지 않느냐, 유리한아?”
그런데 이제는 ‘종속 계약’이라는 이름 앞에 서로의 존재가 묶이게 되었다.
유리한은 묻는 말에 쌕쌕 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니르로르는 픽 웃고는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 줬다. 다른 인간이었다면 어림도 없을 따뜻한 손길이었다.
“뭐 하는 거지, 도마뱀?”
디에스 라고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그는 긴 다리를 쭉쭉 뻗어 니르로르 앞에 서서는 유리한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손을 거칠게 잡았다.
잡기만 했을까? 부러뜨려 버리겠다는 듯 힘을 줬다. 하지만 니르로르에게 있어서는 미약한 힘이란 게 문제였다.
니르로르가 픽 웃었다.
“질투하는 것이냐, 음흉한 인간아?”
“시끄러.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도마뱀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그래?”
“그렇다면 유리한이 잠에서 깰 텐데?”
디에스 라고가 미간을 좁혔다. 좀처럼 풀어진 모습으로 잔 적이 없던 유리한이 곱디곱게 잠들어 있었다.
디에스 라고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결국 니르로르한테서 유리한을 빼앗아 오는 대신, 그녀의 옆에 앉아 있기로 했다.
“고요한은 어쨌느냐?”
“영양제 만드느라 정신없어서 그냥 안 데리고 왔다만?”
“데리고 올 생각은 있었던 모양이구나?”
“시끄럽다, 망할 도마뱀.”
디에스 라고가 이를 드러냈다. 니르로르는 픽 웃었다.
그러고는.
“백명이라는 인간 말이다.”
“백명?”
“왜, 있지 않느냐, 어린 인간들을 가장 앞장서서 이끈 녀석. 그리고 장문인이란 자에게 너희를 소개해 준 녀석 말이다.”
“아아, 그 녀석이 왜.”
“마법사라고 하더구나.”
디에스 라고에게 폭탄이나 다름없는 말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