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놔라, 이 성질 더러운 정령왕아! 짐을 놓거라!”
“짐은 무슨! 아, 그래. 짐이 맞기는 하구나? 가는 도중에 버려도 충분한 짐!”
“뭐라? 말 다 했느냐?”
“아니! 아직!”
이그니스가 사납게 말했다.
“네가 어떻게 멀쩡히 다시 태어난 거지? 그럴 수 없도록 우리의 힘이 깃든 아래층으로 날려 보냈을 텐데!”
“그거야 짐이 위대하니 그런 것 아니겠느냐?”
“웃기시네!”
이그니스가 코웃음을 쳤다.
“이봐, 인간. 네가 깨웠어?”
“설마요.”
유리한이 두 손을 내저었다.
“어떻게 보면 저는 피해자거든요. 불쌍한 드래곤에게 영혼이 묶인 피해자!”
“뭐?”
이그니스가 표정을 찡그렸다. 곧 그는 유리한을 살펴보고는 놀란 얼굴을 보였다.
“뭐야, 어떻게 된 일이야?”
“보다시피 니르로르와 영혼이 묶인, 뭐 그런 상태예요. 시스템이 농간을 부린 덕분이죠.”
“시스템?”
이그니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우라가 말했다.
“탑의 주인을 말하는 모양인데.”
“아하, 플레이어들한테서는 그렇게 불리고 있는 모양이군.”
그 말에 유리한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탑의 주인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탑을 오르는 내내 몇 번이고 들은 이름이라서요. 궁금하네요.”
“탑의 주인은 말 그대로, 이 탑의 주인을 일컫는 말이야.”
아우라가 상냥하게 설명해 줬다. 그 뒤를 이어 이그니스가 사납게 말했다.
“그리고 이 세계를 이곳에 정착시켜 버린 빌어먹을 새끼지. 내기만 아니었으면…….”
“내기요?”
“그래, 내기.”
이그니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곧, 그가 입을 틀어막고는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알려줄 수 없나 보네요?”
이그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말한 것처럼 시스템이 농간을 부려서 말이지. 알려줄 수가 없네.”
“괜찮아요.”
유리한이 눈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두 분께서는 물의 정령왕님을 찾으러 오신 건가요?”
“응, 아쿠아는 지금 위협을 받고 있거든.”
“어떤 미친 늙은이에게 말이지.”
이그니스가 말한 미친 늙은이는 그레이시 아서일 게 뻔했다.
“어쨌든 아쿠아를 돌봐줘서 고마워. 이곳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너희의 앞길에 바람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빌게.”
아우라가 그렇게 말하고는 유리한을 보며 싱긋 웃었다.
“너는 내 축복이 없어도 무리 없을 것 같지만.”
유리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바람의 정령왕께서는 자신이 제 힘이 담긴 정령석을 먹어치웠음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하긴, 알아차리지 못하면 정령왕의 이름이 아깝지.’
불의 정령왕도, 그리고 어린아이의 모습인 물의 정령왕도 진작 제게 있는 자신들의 힘을 알아차렸을 거다.
‘알은척하지 않는 것뿐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그니스가 아쿠아에게 말했다.
“아쿠아, 이제 그만 가자.”
“잠시만요.”
유리한이 황급히 이그니스를 붙잡았다.
“저희가 왜 이곳에 찾아왔는지 모르겠다고 했죠? 그 이유 가르쳐드릴게요.”
이그니스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한번 들어보겠다는 듯이 유리한을 쳐다봤다.
유리한은 그 시선에 웃는 낯으로 말했다.
“모든 불을 집어삼키고 가라앉힐 수 있는 신비한 보물.”
이그니스와 아우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유리한은 그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희는 그걸 얻기 위해 찾아왔어요.”
정령왕들을 찾아달라는 엘리아룸의 어린 황제의 부탁 따위 안중에도 없는 유리한이었다.
* * *
콰과광―!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불꽃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수장님, 저곳은…….”
“일부러 오염시키지 않고 남겨둔 곳이지.”
그레이시 아서가 창밖을 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웬 연기가 피어오르나 싶었는데 정령왕들께서 저곳에 계셨던 모양이군. 아님, 만물을 배신한 겁 없는 녀석이 정령왕들에게 꼬리가 밟혔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유리한 일행과 정령왕들이 맞닥뜨린 걸 테다.
‘분명, 유리한이 이곳에 올라와 있다고 했지?’
그레이시 아서가 두 눈을 내리떴다. 유리한과 맞붙는 상황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적어도 69층의 문지기를 돌파할 때까지는 그래야만 했다.
“어떻게 할까요?”
“글쎄.”
그레이시 아서가 턱을 쓸었다. 북동쪽의 숲은 모든 것이 오염된 상태였다.
그 와중에 남서쪽의 숲도 오염시키게 된다면…….
‘57층은 죽음의 땅이 된다.’
어떤 마법사도 되살릴 수 없는 땅이 되고 말 것이다.
‘멀린 님이라면 다를지도 모를 테지만.’
하지만 그는 죽음의 드래곤으로부터 세상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지 오래였다.
‘멀린 님.’
그레이시 아서의 두 눈에 그리움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뿐, 그는 곧 차갑기 그지없는 푸른 눈으로 말했다.
“대지의 정령왕은 어쩌고 있지?”
“입을 닫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레이시 아서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정령왕도 고통을 느끼는지 궁금하지 않나?”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실험을 시작하도록 해라. 대지의 정령왕이 외치는 비명을 이 땅의 모든 생명체가 들을 수 있게.”
“네, 수장님.”
그레이시 아서의 심복이 고개를 꾸벅이고는 그의 집무실을 나갔다. 그러자마자 수정구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레이시가 쯧 혀를 차고는 수정구의 연락을 받았다.
- 수장, 물의 정령왕으로부터 아이템은 얻었소?
“나 원, 안부 인사도 없이 본론이라니. 많이 급한 모양이오?”
- 그럴 수밖에 없지.
천하태평의 종주, 구천하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 수장께서 아이템을 얻어 오겠다고 말한 지 벌써 한 달이니 말이오.
그레이시 아서가 미간을 좁혔다.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나 역시 하루라도 빨리 70층에 진입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뚝, 수정구의 빛이 사라졌다. 연락이 끊긴 것이다.
그레이시 아서가 인사도 없이 끊긴 연락에 이를 으득 갈았다.
“망할 늙은이가.”
저 역시 똑같이 늙은 처지이면서 그레이시 아서는 구천하를 욕했다.
찢어질 듯한 비명이 57층을 울린 건 그때였다.
* * *
- 으아아아악!
쩌렁쩌렁한 비명에 아쿠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우라, 아우라아아.”
아쿠아가 울먹이며 품에 안겨 들자 아우라가 미소를 그리며 달래주었다.
“아쿠아, 괜찮아.”
“아니야, 괜찮지 않아.”
아쿠아가 격하게 고개를 젓고는 우는 소리를 냈다.
“테라가 아프대. 많이 아프대. 테라가 울고 있어. 엉엉 울고 있어.”
아쿠아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쿠아.”
아우라가 아이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견디기 너무 힘들다 싶으면 테라는 알아서 죽을 거야. 그리고 새로운 테라가 태어나겠지.”
‘순환하는 존재들이라더니, 죽는 것에 거침이 없군.’
57층을 찾아온 목적을 밝힌 뒤, 이그니스와 한창 대치 중이던 유리한이 비뚜름하게 웃었다. 그때, 아쿠아가 엉엉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아쿠아?”
아우라가 놀라 아이를 달랬다.
“아쿠아, 왜 울어? 뚝.”
“싫어어! 테라 죽는 거 싫어어!”
“아쿠아,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야.”
“그래도 싫어어!”
이그니스가 그 모습에 혀를 찼다.
“아쿠아, 뚝! 고귀한 물의 정령왕이 그렇게 울면 안 돼!”
“울 거야!”
아쿠아가 빼액 소리 질렀다. 이그니스는 골치 아프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그에게 유리한이 말했다.
“저기요, 불의 정령왕님. 우리 잠깐 휴전하지 않을래요?”
“뭐?”
“물의 정령왕님께서 저렇게 우시는데 저랑 계속 싸울 거예요? 아 참, 아니지.”
유리한이 픽 웃고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리며 말을 고쳤다.
“우리랑 계속 싸울 거예요?”
그녀의 뒤로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어디 한번 진심으로 싸워볼 테냐 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이그니스가 짧게 혀를 찼다.
제 앞의 여자를 비롯하여 뒤의 두 남자 모두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들이었다.
가장 뒤에 있는 마법사는 그저 그런 실력이었지만.
어쨌거나 이그니스는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플레이어 중에 이런 강자가 아직도 남아 있었나?’
이그니스는 식은땀이 흐르는 착각이 들었다. 그런 걸 흘릴 리가 없는데도.
이그니스는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잠시 휴전하지.”
그 말을 듣자마자 유리한이 아쿠아에게 다가갔다.
“아쿠아 님.”
아우라의 품에 안겨있던 아쿠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리한은 물기가 가득 맺힌 아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두 팔을 뻗었다. 아쿠아가 머뭇거리다가 유리한의 품에 쏙 안겼다.
“야, 너…….”
“이그니스.”
아우라가 유리한에게 위협적으로 굴려는 이그니스를 말렸다.
이그니스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유리한을 노려보다가 휙 고개를 돌렸다.
유리한은 아우라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고는 말했다.
“물의 정령왕님, 대지의 정령왕님이 걱정되세요?”
“응.”
“제가 구해드릴까요?”
“응?”
아쿠아가 올망졸망 두 눈을 빛내며 유리한에게 물었다.
“테라를 구해줄 수 있어?”
“네, 그런데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라서요.”
유리한이 씨익 웃었다.
“물의 정령왕님이 갖고 계신 보물을 제게 빌려주실 수 있나요?”
아쿠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그니스는 빼액 소리 질렀다.
“야! 장난해? 네가 진정으로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화르르,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온 땅을 붉게 물들이는 그 모습에 유리한이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오, 많이 화가 난 모양인데?’
조금 전, 물의 정령왕이 가지고 있는 아이템을 원한다는 그 말에 이그니스가 달려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죽을 뻔했다.
화염 저항(A)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노릇노릇 구워졌을 것이다. 그만큼 이그니스의 불꽃은 그 무엇보다 강렬했고 뜨거웠다.
“인간, 네 명을 재촉하지 말도록 해. 아쿠아의 보물은 네게 과분한 것이니.”
“네, 과분한 거 알죠. 당연히 알아요.”
유리한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러니 빌려달라는 거예요. 가지겠다는 게 아니라.”
“그게 가능할 것 같아?”
“가능할 것 같으니까 이러죠.”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에요, 아쿠아 님?”
“맞아.”
아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쿠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아직 기억이 온전하지 못해서 그런 모양인데!”
“아니야!”
아쿠아가 빼액 소리 질렀다.
“나, 아우라랑 이그니스랑 테라처럼 똑똑하지 못한 것 맞아. 하지만 보물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 아쿠아의 보물, 빌려줄 수 있어!”
‘오, 그냥 던져본 소리였는데 진짜 빌려줄 수 있었나 보네?’
유리한이 음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