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마법사는 고민했다.
알려주지 않는다면 유리한에게 죽을 것이고, 알려준다면 동료들에게 죽을 것이다.
무엇을 선택해도 죽는 상황 속에서 마법사는 최대한 자신이 살 가능성이 높은 선택지를 고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유리한에게 정령왕들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기로 한 거다.
마법사의 말에 설원을 뒹굴고 있던 마법사들이 버럭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안톤! 우리를 배신하는 거냐?!”
“죽여버리겠어, 안톤 리오스!”
외쳐대는 목소리에 마법사가, 아니, 안톤 리오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겁에 질린 얼굴에 유리한이 따악 손가락을 튕겼다.
“읍읍!”
피어오른 그림자가 다른 마법사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안톤 리오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유, 유리한 님은 도대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에 유리한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괜히 영웅으로 불리겠어요? 저 녀석들은 당신한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하지만 마법은 입을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알죠.”
당장 입이 틀어막힌 마법사 중 몇이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유리한이 다시 한번 더 손가락을 튕겼다. 억눌린 비명과 함께 허공에 그려지고 있던 마법진들이 희미하게 사라졌다.
“자, 어때요? 저런 상태로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안톤 리오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를 위협한 마법사들은 입이 봉쇄된 것은 물론, 팔다리가 묶여 기괴하게 꺾인 상태였다.
저런 상태로는 절대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수장님이라면 몰라도.’
안톤 리오스가 꿀꺽 침을 삼키고는 말했다.
“정령왕들의 행방을 물었었죠? 일단, 정령왕들은 이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건 알아요. 하지만 황제 폐하께선 정령왕님들과의 연락이 끊겼다고 하시더군요.”
유리한이 비딱하게 웃었다.
“그분들께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은근슬쩍 던지는 물음이었다. 너희 만물이 정령왕들에게 해를 끼친 것 아니냐고 말이다.
안톤 리오스가 우물쭈물했다.
“안톤.”
유리한이 나지막하게 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 유리한 님이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조금 전에 안톤의 동료분들께서 죽이겠다니 뭐니 외쳐대면서 이름을 불렀잖아요.”
“아.”
안톤 리오스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유리한이 기가 찬다는 듯 웃으며 생각했다.
‘맹하네.’
보면 볼수록 만물의 마법사답지 않았다.
‘도대체 어쩌다 만물에 몸을 담게 된 거래?’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안톤 리오스가 만물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아니었다.
유리한이 입을 열었다.
“안톤, 정령왕들께 문제가 생긴 거죠? 당신들 만물로 인해.”
안톤 리오스가 조용히 입을 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유리한이 다시금 물었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거죠?”
무림의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정령왕들의 과제를 수행해야만 했다.
유리한의 물음에 안톤 리오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 만물의 수장님께서…….”
답하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쿠르릉―!
57층의 땅이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탓이다.
“오, 탑에서도 지진이 일어나는구나?”
유리한이 놀란 눈을 보이던 그때, 안톤 리오스가 희게 질린 얼굴로 다급하게 외쳤다.
“피해야 합니다! 대지의 정령왕이 분노했습니다!”
“네?”
갑자기 무슨 소리래? 대지의 정령왕이 분노했다니?
유리한이 안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쩌저적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와우.”
유리한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렇게 땅이 갈라지면 아래층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늘이 갈라지고 있으려나?’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할 때,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유리.”
정신 차리라는 듯 불린 이름에 유리한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싱긋 웃었다.
그때, 안톤 리오스가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다들 저를 따라오십시오!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안톤은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유리한은 어렵지 않게 뒤를 쫓으며 그에게 물었다.
“저기요, 당신 동료들은 챙기지 않아도 괜찮나요?”
“알아서 잘 살아남을 겁니다! 그보다 이제 동료 아닙니다!”
“그럼요?”
유리한이 태연하게 물었다. 안톤 리오스는 입고 있던 로브를 집어 던지고는 말했다.
“그건 유리한 님께서 정해주셔야죠! 만물을 배신한 이상 저는 이제 죽은 목숨입니다!”
“오, 그런데 저한테 정령왕들 이야기를 해준 거예요? 목숨을 걸고서? 저 감동 먹었어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그가 빼액 소리 질렀다.
“안 그러면 유리한 님께서 저를 죽였을 테니까요!”
그 말에 유리한이 질겁했다.
“설마요! 저 그렇게 잔인한 사람 아니에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안톤 리오스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심정을 꾹 눌러 담았다.
‘알려주지 않으면 죽일 듯이 굴었으면서!’
그의 기억에는 웃는 낯으로 창을 휘두르던 유리한의 모습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만약 유리한이 그 기억을 알았다면 저는 웃은 적 없다면서 억울해했겠지만.
“그나저나 안톤, 대지의 정령왕님께서 분노했다니요?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 물음에 안톤 리오스가 헉헉거리며 말했다.
“수장님께서 물의 정령왕이 가지고 있는 아이템을 빼앗으려고 출발하셨거든요!”
유리한이 얼굴을 굳혔다.
“그게 있어야, 악!”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열심히 달리던 안톤 리오스가 제 발에 걸려 휘청거렸다. 그의 앞에 땅이 갈라지며 불꽃이 튀었다.
‘죽는다!’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시야가 단번에 높아졌다.
“어?”
안톤 리오스가 놀란 얼굴로 저를 안아 든 사람을 슬쩍 쳐다봤다.
디에스 라고가 성가셔 죽겠다는 얼굴로 그를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다.
디에스 라고의 얼굴을 알아본 안톤 리오스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유리한 님과 함께 다닌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영웅에게 짐짝처럼 얹혀 가고 있는 상황이라니!
“디에스 님……!”
안톤 리오스는 감격스러워 두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짐짝처럼 옮겨지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만도 한데, 그는 감격에 젖어 있었다.
‘누가 디에스 님한테 이런 취급을 당해보겠어!’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그에게 유리한이 짜증스레 외쳤다.
“안톤, 감격할 때예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좀 알려주세요!”
그 말에 안톤 리오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손가락을 들었다.
“저, 저기 숲 쪽으로 계속 달리면 됩니다! 정령왕들은 숲을 망가뜨리지 않거든요!”
“그래서 마탑이 숲에 있는 거군요? 정령왕들이 용케 저기에 세우는 걸 허락했네.”
유리한의 비아냥거림에 안톤 리오스가 말했다.
“마탑을 세울 때만 해도 이곳에는 정령왕이 없었거든요.”
“아하.”
그러고 보니 엘리아룸의 어린 황제가 그랬었다. 정령왕들이 57층에 머물고 있는 건, 만물의 마법사들 때문이라고.
‘도대체 이곳에서 얼마나 악랄한 짓을 벌여댔으면 정령왕들이 마법사들을 감시하고자 이곳에 체류하게 된 걸까?’
유리한이 높이 솟아있는 마탑을 향해 질색하는 얼굴을 보였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숲에 도달했다.
유리한의 뒤를 따라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 역시 숲으로 몸을 숨겼다. 니르로르도 열심히 날갯짓해서 무사히 숲에 도착했다.
“후우.”
유리한이 일행이 모두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숲 바깥의 대지는 갈라지고 불꽃이 튀고 있었다. 흡사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의 상황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유리한이 입술을 오므리며 감탄하고는 안톤 리오스에게 말했다.
“만물의 수장님께서 정령왕님들 성질을 엄청 건드리고 있나 보네요?”
안톤 리오스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수장님껜 거친 면이 없지 않아 있죠.”
그래서 만물의 마법사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레이시 아서를 우러러보며 존경했다.
안톤 리오스 역시 그랬었다.
하지만 다른 마법사들보다는 존경심이 덜했다.
그 때문에 이렇게 만물을 배신할 수 있었을 거다.
그때, 한쪽 눈가를 살짝 찡그린 채 상황을 살피던 유리한이 입을 열었다.
“만물의 수장님께서는 천하태평의 종주님과 함께 69층을 공략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네, 그랬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에 돌아와서는 물의 정령왕이 가진 아이템을 빼앗아야 한다고 정예를 이끌고 나가셨습니다.”
그 아이템은 분명 제로 바니스타가 말한 걸 거다.
유리한이 비딱하게 웃었다.
“나 참, 69층에서 어련히 알아서 뒹굴고 있으면 내가 친절하게 그 아이템을 들고 올라갔을 텐데.”
“네?”
“혼잣말이에요.”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그나저나 정령왕들은 자연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찾으러 나간 건가요?”
대지의 정령왕이 분노하고 있는 걸 보면 그레이시 아서는 그들에게 도달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유리한의 질문에 안톤 리오스가 말했다.
“찾으러 나간 게 아닙니다. 그들이 모습을 보이게끔 만든 거죠.”
“어떻게요?”
안톤 리오스는 손가락을 들었다. 그의 손끝이 향하고 있는 곳은, 그들이 있는 곳과는 반대 방향의 숲이었다.
“보이십니까?”
“으음, 잠깐만요.”
유리한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안톤이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와우.”
감탄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끔찍하군.”
“그러게요.”
마찬가지로 그곳을 본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얼굴을 찌푸렸다.
반대편의 숲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푸릇푸릇한 잎은 온데간데없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가득했다.
그리고 그 가지 끝에 부패한 동물의 사체들이 매달려 있었다.
정말이지 끔찍한 광경이었다.
“정령왕들은 숲을 사랑합니다. 숲 그 자체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숲을 터전으로 삼은 생명체들도 모두 사랑하죠.”
그러니 그레이시 아서는 그것들을 파괴한 거다.
물과 불, 대지와 바람의 정령왕들이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만물의 수장님께서는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네요.”
멀린 아서가 지금 그레이시 아서가 행하고 있는 꼴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분명 그의 이름에 붙어있는 ‘아서’를 빼앗고자 그 목숨을 취하려고 들었을 테다.
‘빌어먹을.’
유리한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인 위대한 마법사를 그리워하며 으득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