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으윽…….”
유리한에게 멱살이 잡힌 제로 바니스타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제이가 펄쩍 뛰며 유리한의 손을 붙잡았다.
“유리한 님! 안 됩니다! 왜 그리 화가 나신 건지 모르겠지만 부디 노여움을 가라앉혀 주십시오!”
“시끄러.”
유리한이 매섭게 제이를 쳐냈다. 그 순간 제로 바니스타가 힘겹게 두 눈을 떴다.
“유리한 님?”
끔뻑끔뻑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유리한이 곧장 물었다.
“편지 어디 있어.”
“네?”
제로 바니스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보이자 유리한이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편지 어디 있냐고!”
유리한이 버럭 소리 질렀다. 제로 바니스타는 당황스러웠다.
유리한이 날 선 목소리를 내뱉으며 반말을 날려대는 모습이 무척이나 생경했기 때문이다.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편지라니요? 도대체 무슨…….”
끝을 흐리는 목소리에 유리한이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그때 제이가 다급히 그녀를 말리며 제로 바니스타를 향해 외쳤다.
“친구분께 받으신 편지 있잖습니까!”
“그걸 유리한 님이 어떻게…….”
제로 바니스타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눈가를 찡그렸다.
“제이, 네가 말한 거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유리한에게 제로 바니스타가 왜 탑을 오르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의 목숨이 위험해졌을 거다.
유리한은 진심으로 제로 바니스타의 치료를 중단할 생각이었으니.
제이의 충심을 모를 리가 없는 제로 바니스타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유리한 님, 그 편지를 왜 찾으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제게 없습니다.”
유리한이 이를 으득 갈았다.
“어딘가에 보관이라도 해뒀나 보지? 그렇다면 지금 당장 들고 와. 내 눈으로 확인할 게 있으니까.”
날 선 목소리에 제로 바니스타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요, 보관도 해두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도 전에 불타 사라지고 말았거든요.”
“뭐라고?”
유리한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제로 바니스타가 곤혹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마법이라도 걸려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트라이가 함께 있다고 했던 마법사의 짓이겠죠.”
“트라이라면 친구분의 이름이겠죠?”
유리한의 말투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제로 바니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참고로 트라이가 그 마법사와 어떻게 만났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편지에 적혀있지 않았거든요.”
유리한이 짜증스레 얼굴을 구기고는 제로 바니스타에게 물었다.
“편지가 불에 탈 때, 혹시 마법진이 나타났거나 그러지 않았나요?”
“네,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다만?”
제로 바니스타가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금빛 가루가 휘날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편지가 불타기 전에 말입니다.”
유리한이 표정을 굳혔다.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디에스 라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굳은 얼굴에 제로 바니스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리한 님? 디에스 라고 님?”
이름을 듣자 유리한이 정신을 차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죠.”
“그 말은…….”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어요. 그때 70층 공략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요.”
제로 바니스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네, 유리한 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와 탑을 오른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까?
‘뭐, 탑을 오르는 건 아니지. 어디까지나 70층 공략에만 함께할 생각이니까.’
일단은 그렇다는 거였다.
유리한이 물끄러미 제로 바니스타를 쳐다보고는 몸을 돌렸다.
* * *
유리한은 뮤즈의 아지트를 벗어나고자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에서 니르로르가 걱정스레 물었다.
- 유리한아, 괜찮으냐? 표정이 좋지 않구나.
“네가 내 걱정을 다 하다니 별일이네.”
- 짐은 언제나 너를 걱정하고 있다.
“거짓말하시네.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니르로르가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한은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그러다 튀어나온 돌부리에 그만 발이 걸려 휘청거리고 말았다.
“유리한 씨, 괜찮으세요?”
“유리, 앞을 보고 다녀야지.”
고요한과 디에스 라고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 손길에 유리한이 픽 웃고는 말했다.
“고마워요, 요한. 디에스도 고마워. 생각할 게 있어서 앞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네.”
“멀린을 생각하고 있나 보군.”
유리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디에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제로 바니스타의 이야기 말인가?”
“응, 너도 알다시피 멀린의 마력은 금빛이잖아.”
멀린 아서, 그가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세상은 금빛으로 물들고는 했다.
유리한의 말에 디에스 라고가 입을 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유리. 너도 알고 있지 않나?”
멀린 아서는 죽었다. 당장 그를 죽인 장본인이 지금 유리한의 머리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멀린의 죽음을 떠올리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이 크게 동요했다. 머리 위에 앉은 니르로르를 지금 당장 죽이라면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한은 크게 심호흡하며 거세게 울리던 심장을 고요하게 가라앉혔다.
후우, 유리한이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멀린은 죽었지, 나도 알아. 그렇다면 누굴까?”
도대체 누가 제로 바니스타의 친구에게 접근하여 백작에게 편지를 보내게 만든 걸까?
‘그것도 내가 탑에 들어온 시기와 비슷하게.’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리한은 그 일이 단순한 우연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먼저 그자가 70층 이후의 세계에 있다는 것부터 마음에 걸려.’
탑은 69층까지 공략이 된 상태였다. 70층 공략을 위해 천하태평과 만물이 손을 잡았다고 하나 지지부진하게 공략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던가?
‘북해빙궁에서 보물을 얻지 못한 탓이 크겠지.’
북해빙궁주, 설영. 그녀를 떠올린 유리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청예신 씨는 잘 지내고 계실까?’
부디 그랬으면 했다.
어쨌든 탑은 69층까지만 플레이어의 접근을 허락했다.
‘그런데 70층 이후의 세계라.’
유리한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때, 고요한이 말했다.
“유리한 씨, 일단 숙소로 돌아가요.”
“그럴까요?”
유리한이 생각을 멈추고는 방긋 웃었다.
‘그래, 지금 여기에서 머리를 굴린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는 건 아니니까.’
그 때문에 유리한은 일단 동료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숙소에 도착하자 그녀는 욕조에 물을 받아 그대로 몸을 담갔다. 머리를 조금 식히기 위해서였다.
“후우.”
유리한이 적당히 따뜻한 물로 얼굴을 적셨다.
노곤하게 몸이 풀리면서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유리한은 그렇게 한참을 욕조 속에 있다가 몸을 일으켜 욕실 밖으로 나갔다.
“유리, 드디어 나왔군.”
“뭐야,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거래?”
유리한이 가운을 여미며 놀란 눈을 보였다. 디에스 라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다.”
그녀가 픽 웃고는 디에스 라고의 앞에 앉았다. 그러기 무섭게 익숙하다는 듯 그가 두 손을 들어 유리한의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제로 바니스타와 함께 탑을 올라갈 생각인가?”
“일단은.”
유리한이 디에스 라고의 손길에 두 눈을 꼭 감고서 말했다.
“백작의 정보는 확실히 도움이 되니까. 그리고 오광 중 한 곳을 당당히 이끌고 있는 플레이어잖아? 생각보다 강할 거야, 그 인간.”
그러니까 제 발목을 붙잡거나 하지는 않을 거란 소리였다.
“그렇지만 따로 움직일 거야.”
“흐음?”
디에스 라고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유리한이 싱긋 웃고는 말했다.
“제로 바니스타가 50층에 진입한 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는 건 온 탑에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야.”
T-Network에 그의 이름만 쳐도 나오는 정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60층 이후의 세계, 그러니까 무림에 입장할 자격은 갖추고 있는 플레이어야.”
“그러니까 제로 바니스타를 먼저 무림에 보내겠다는 거군. 정보를 수집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지.”
유리한이 말했다.
“무림이란 세계가 정확히 어떤 식으로 이뤄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듣기로는 구천하 아저씨가 목줄을 꽉 쥐고 있다고 하더라고.”
“구천하라면…….”
“천하태평의 종주.”
유리한이 비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디에스, 너는 이름만 들어본 플레이어일 거야. 하지만 나는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시대에 몇 번 부딪친 적이 있거든.”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능구렁이 같은 아저씨야. 이젠 할아버지겠지만.”
30년이 지났으니 그 역시 나이를 꽤 먹었을 테다. 그래, 나이만 먹었을 터였다.
능구렁이 같은 속은 더욱 교활해지고 음험해졌으리라.
‘그러니 지한이를 이용한 실험을 방관했던 거겠지.’
유리한이 이를 으득 갈았다.
“생각해 보니 제로 바니스타를 치료해 주지 말 걸 그랬어. 아님, 요한한테 적당히 치료해 주라고 할걸.”
“왜?”
“고통받으라고.”
유리한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지한이가 실험의 고통에 몸부림쳤던 만큼 괴로워하라고 말이야.”
생각할수록 제로 바니스타가 괘씸해졌다.
“뭐, 그랬다면 이번엔 요한이 힘들어했겠지.”
고요한은 심성이 곱고 착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을 쉽게 외면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곳에서 유리한이 유일했다.
“그러고 보니 요한은?”
“니르로르와 함께 나갔다.”
“니르로르랑?”
유리한이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빌어먹을 용이 고요한에게 마력을 운용하는 법에 대해 가르쳐줄 거라고 하더군.”
“아하.”
유리한이 뒤늦게 고요한의 몸에 내재되어 있는 무한의 마력을 떠올렸다.
“괜찮을까?”
“괜찮겠지.”
디에스 라고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정 힘들면 그 녀석이 알아서 훈련을 그만둘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유리. 고요한은 어린아이가 아니야.”
“그렇기는 하지만…….”
유리한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그래, 괜찮겠지.”
유리한은 속 편하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시각.
“준비됐느냐, 하늘 머리 인간아?”
“네, 준비됐습니다.”
고요한은 니르로르와의 훈련에 돌입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