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 *
만물의 욕심 많은 여우, 그레이시 아서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수정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종주, 도대체 70층 공략은 언제 들어갈 생각이오?”
수정구에 비치고 있는 사내, 천하태평의 종주인 구천하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 위대한 대마법사께서 알고 계실지 모르겠으나, 70층의 문지기는 까다로운 상대요.
더욱이 웬만한 화염 내성으로는 버틸 수 없는 용암 지대가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섣불리 공략을 하고자 들어가면 당하는 건 플레이어들일 터.
-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오. 곧 우리와 함께 70층에 올라서게 될 테니 말이오.
그 말을 끝으로 수정구의 빛이 꺼졌다.
쾅!
그레이시 아서가 분하다는 듯이 테이블 위로 주먹을 내리쳤다.
“빌어먹을……!”
57층, 만물의 본거지인 마탑이 위치한 곳. 유리한은 어렵지 않게 이곳까지 다다를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분명 전쟁이 일어날 게 뻔했다.
그렇다 해도 그레이시 아서는 무서울 게 없었다. 그야, 상대는 유리한뿐이지 않나?
그녀 곁에 디에스 라고와 함께 또 다른 플레이어가 있다고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문제는 유리한이었다.
무한의 마력을 지녔다는 플레이어인 그녀와의 전쟁은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았다.
‘나 역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암만 구시대의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내 힘에 미치지 못할 게 분명한데.’
그레이시 아서가 미간을 좁혔다.
‘암살에 계속 실패해서 두려운 마음이라도 든 건지…….’
어쨌든, 유리한이 57층의 마탑에 도착하기 전에 70층 공략을 마쳐야 했다.
‘그리고 마탑을 옮기는 거다.’
유리한의 손이 미치지 않는, 탑의 저 위로 올라가는 상상을 하며 그레이시 아서가 웃었다.
불청객이 찾아온 건 그때였다.
“오, 이런. 우리 대마법사께서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백작께서 무슨 일이신가?”
그레이시 아서의 얼굴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제로 바니스타는 그의 방에 발을 내디디며 히죽댔다.
“저희가 굳이 볼 일이 있어야만 만날 수 있는 사이입니까? 이거 섭섭하군요.”
“그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창을 넘나들며 만날 사이도 아니지.”
그레이시 아서가 제로 바니스타를 보며 비딱하게 웃었다.
함부로 남의 창문을 대문처럼 이용한 그를 비아냥거린 것이었다.
물론, 그 비아냥거림은 제로 바니스타에게 어떠한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뮤즈의 백작은 그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실실 웃지만 말고 찾아온 목적이나 어서 밝히지 그러나? 50층에 콕 박혀 있기만 하던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57층까지 올라온 것인지…….”
말끝을 흐리자 제로 바니스타가 싱긋 웃었다.
“먼저, 위대한 마법사께 한 가지 정보를 알려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정보라니?”
“유리한.”
그레이시 아서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제로 바니스타는 그런 그를 향해 얄궂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유리한과 이야기를 나눴답니다.”
“조금 전에라면…….”
그레이시 아서가 더욱 미간을 좁혔다.
“문을 이용했나 보군.”
“제가 가진 힘을 마음대로 썼을 뿐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제로 바니스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공략되지 않은 층을 제외한 탑의 어느 곳이든 이동할 수 있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레이시 아서가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딱히 문제 될 건 없다네. 다만, 제로 바니스타.”
우웅, 그레이시 아서의 주변으로 여러 개의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그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제로 바니스타를 향해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자네가 가진 그 빌어먹을 힘을 이용하여 함부로 남의 집을 헤집고 다니지는 말게.”
“암, 그래야죠.”
제로 바니스타가 믿어달라는 듯 키득거렸다. 그레이시 아서는 짧게 혀를 찼다.
“그래서 유리한에 대해 알려줄 정보란?”
“그녀와 전쟁을 벌이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가면으로 둘러싸인 제로 바니스타의 두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니.”
그레이시 아서가 픽, 웃었다.
“기껏 찾아와서 알려준다는 정보가 참으로 형편없군.”
제로 바니스타는 정보상이었다. 그 때문에 ‘정보가 형편없다’는 말은 그에게 있어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제로 바니스타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유감입니다. 저는 진심을 담아 알려드린 정보였는데 말이죠.”
제로 바니스타가 태연하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대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손잡이를 쥔 손이 이내 그것을 돌리려고 할 때.
“아,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깜빡했군요.”
제로 바니스타가 그레이시 아서를 향해 물었다.
“70층 공략은 아직인가 봅니다? 천하태평의 종주와 손을 잡은 것 같았는데…….”
그레이시 아서의 입매가 일자로 굳었다. 제로 바니스타는 그런 그를 향해 여우처럼 웃었다.
“북해빙궁의 보물을 얻는 데 실패해서 그런가? 일에 차질을 많이 빚고 있는 모양이군요.”
그레이시 아서가 이를 으득 갈았다. 평소 그는 표정을 잘 숨기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제로 바니스타, 저 빌어먹을 백작 앞에서는 좀처럼 표정을 숨기기가 어려운 그레이시 아서였다.
그가 제로 바니스타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만 꺼지게.”
“네네, 알겠습니다. 부디 다음에 만날 때까지 몸 건강하게 계셨으면 합니다.”
제로 바니스타가 활짝 웃으며 문을 열어젖혔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건 백색의 공간이었다.
제로 바니스타는 그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레이시 아서를 향해 친절하게 말했다.
“유리한 님은 동생을 그리 만든 사람들을 쉽게 용서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으니까요.”
나지막하게 읊조린 목소리에 그레이시 아서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곧 문이 닫혔다. 그레이시 아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닫힌 문을 열어젖혔다.
제로 바니스타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여우 같은 놈.”
제로 바니스타가 들었다면, 그건 당신이라면서 웃어댔을 말이었다. 그레이시 아서는 다시 이를 으득 갈고는 소리 나게 문을 닫아버렸다.
* * *
끼익, 낡은 문이 열리면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다름 아닌 제로 바니스타.
조금 전, 57층의 마탑에서 그레이시 아서를 만났던 뮤즈의 백작이었다.
“후우, 빌어먹을 늙은이는 예나 지금이나 성격 안 좋다니까?”
빌어먹을 늙은이란 모두가 예상했듯 그레이시 아서였다.
그가 제로 바니스타의 말을 들었다면 예나 지금이나 성격 안 좋은 건 네놈이라면서 삿대질을 해댔을 거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레이시 아서는 지금, 이곳 50층에 없었다.
“그래, 70층 공략은 아직이란 말이지? 예상대로군.”
혹시 몰라 직접 얼굴을 보러 간 보람이 있었다.
“물론, 유리한 님에 대해서도 겸사겸사 알려줄 겸 찾아간 거지만.”
예상하건대 만물의 위대한 대마법사께서는 제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게 분명했다.
“아아, 몰라. 전쟁이 일어나면 나는 유리한 님의 편에 설 거야.”
“누가 서게 해준대?”
뒤에서 들려온 날 선 목소리에 제로 바니스타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 싱긋 웃음을 짓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유, 유리한 님…….”
제로 바니스타가 어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이런 우연이 다 있습니까?”
“그러게요,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혹시 이건 운명이 아닐까요?”
성큼, 순식간에 제로 바니스타의 앞에 다가온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을 그냥 죽이라는 운명.”
나지막하게 내뱉은 목소리에 제로 바니스타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유리한한테서 재빠르게 물러난 후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주 한껏 말이다.
“우리 구시대의 영웅님께서는 농담도 잘하시죠.”
“농담 아니었는데.”
유리한이 웃는 낯으로 여상하게 말했다. 제로 바니스타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왜 하필 이곳으로 문이 열려서!’
아니, 그 전에 문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자리를 떴어야 했다.
‘그랬으면 유리한과 이렇게 마주치지 않았을 텐데!’
제로 바니스타가 속으로 열심히 스스로를 책망하며 유리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이곳엔 무슨 일이십니까?”
“일행을 놓쳐서요.”
“아아, 디에스 라고 님과 고요한 님 말씀입니까?”
“아니요, 니르로르요.”
유리한이 얼굴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용이 맛있는 냄새가 난다면서 갑자기 사라져서요.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도와주죠?”
“네?”
“니르로르 찾는 거 도와달라고요. 당신, ‘정보’에 있어서는 이 탑의 제일이라고 하던데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제로 바니스타가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설마 유리한이 저를 인정해 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솔직히 인정이라기보다는 비아냥거림에 더 가깝지만.’
어쨌든 간에 제로 바니스타는 유리한을 돕기로 했다.
“30분 안으로 찾아서 유리한 님께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오, 제 숙소가 어디인지 알고 계시는가 봐요? 아무한테도 말해 준 적 없는데.”
“하하, 유리한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정보에 있어서는 이 탑의 제일이라서 말입니다.”
잘도 말한다 싶었다.
유리한은 입매를 비틀고는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잘 부탁한다는 흔한 인사조차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니르로르를 찾다가 제로 바니스타를 만난 이 상황이 굉장히 탐탁지 않았다.
‘빌어먹을 용 같으니라고!’
왜 사라져서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보다, 제로 바니스타…….’
유리한이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제로 바니스타는 벌써 사라진 뒤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전쟁 운운한 것을 보면 만물의 녀석들과 만나고 온 것 같은데.”
저와 헤어진 후의 그 짧은 시간에 만물의 마법사들을 만나고 왔다니.
“오광은 오광이라는 건가?”
유리한이 조용히 읊조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어둠이 진 골목길을 나섰을 때.
“아, 유리한 씨!”
“유리, 니르로르는 찾았나?”
흩어져서 니르로르를 찾고 있던 고요한과 디에스 라고가 그녀를 반겼다.
유리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못 찾았어.”
“니르로르 씨, 정말 어디로 사라지신 걸까요?”
고요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디에스 라고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용 새끼가 사람 참 귀찮게 하는군.”
“그러게나 말이야.”
유리한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그래도 금방 찾을 거야. 누구 찾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한테 부탁했으니까.”
“정말요?”
“네, 요한. 그러니까 니르로르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는 그 말을, 유리한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