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119)화 (119/235)

119화 

【 16. 뮤즈 】

유리한은 미간을 좁혔다. 눈앞에서 히죽거리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 불쾌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뭐지?’

지금까지 이렇게 위협을 가하면 상대는 대개 겁에 질리거나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까, 제로 바니스타와 같은 반응은 처음이었다는 거다.

제가 느끼고 있는 불쾌감은 바로 그로부터 기인한 것일 터.

유리한은 제로 바니스타를 빤히 쳐다보다가 그에게서 검을 거뒀다.

“오, 검을 거두시는 겁니까? 제 목을 그대로 쳐버릴 줄 알았습니다만.”

“그러기를 바라나 봐요?”

“설마요,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저는 목숨 아까운 줄 아주 잘 알고 있거든요.”

“그거 다행이네요. 몰랐으면 가르쳐주려고 했는데.”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그녀와는 달리 제로 바니스타의 얼굴에 걸려있던 웃음은 사라졌다. 유리한의 말이 진심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제로 바니스타는 제 목을 만지고픈 충동을 억누르고는 말했다.

“저희 아지트로 모시겠습니다.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어떻습니까?”

“좋아요.”

사실, 주변의 시선이 몰리든 말든 유리한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래, 이 자리에 그녀 혼자만 있었다면 그랬을 거라는 거다.

유리한은 제 뒤에 묵묵히 서 있는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을 살피고는 제로 바니스타를 쳐다봤다. 안내하라는 의미였다.

제로 바니스타는 웃는 낯으로 그녀와 일행들을 뮤즈의 아지트로 데리고 갔다.

제로 바니스타의 충실한 종인 제이가 지금 이 광경을 봤다면 놀라 제 목을 잡았을 거다.

뮤즈의 아지트가 어떤 곳인가! 웬만한 플레이어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곳이지 않은가!

하지만 유리한은 웬만한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그녀의 일행인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로 바니스타는 이를 잘 알고 그들을 아지트로 이끈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뮤즈의 아지트에 도착했다.

고요한은 건물에 들어선 뒤 주위를 둘러보며 입술을 오므렸다.

‘리스체가스성보다 더 화려한 것 같네.’

여느 귀족 저택 못지않게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가 인상적이었다.

디에스 라고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고요한과 똑같이 생각하는 한 생명체가 있었다.

- 화려하구나, 짐이 머물고 싶은 곳이도다.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위대한 드래곤이시여.”

- 오, 한 번 더 짐을 그렇게 불러다오.

“위대…….”

“백작님, 저 빌어먹을 용의 콧대를 세우지 말아 주세요.”

니르로르의 정체를 알고 있음에도 아부를 하고 싶은 건가? 유리한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로 바니스타는 알겠다면서 웃고는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들을 응접실로 데리고 갔다.

“배, 백작님?”

“아, 제이. 마침 잘 왔어. 차 좀 내주지 않겠어? 귀한 손님들이 오셔서 말이지.”

유리한이 아수라 가면을 덮어쓴 남자를 쳐다봤다.

‘진짜 제이인가 보네.’

제이는 당황해하면서도 백작의 말을 착실히 따랐다.

유리한은 제로 바니스타의 맞은편에 비딱한 자세로 앉았다. 고요한과 디에스 라고 역시 그랬다.

고요한은 바르게 앉았지마는.

어쨌거나 곧 그들의 앞에 찻잔이 놓였다. 제로 바니스타는 유리한에게 차를 권하며 말했다.

“먼저 사과드립니다. 유리한 님께는 그저 형식적인 사과라고 해도 말입니다.”

말이라도 못하면.

유리한이 마뜩잖다는 듯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제로 바니스타는 그 웃음이 보이지 않는 양 계속해서 입바른 소리를 해댔다.

“저희 뮤즈는 정보를 얻고자 유지한 님의 실험에 동의한 것뿐입니다. 그분께 해가 되는 일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죠.”

유리한이 제로 바니스타의 말을 가로채고는 덧붙였다.

“백작님의 말이 맞아요. 뮤즈는 가만히 앉아서 정보만 얻었을 뿐이죠. 지한이가 가지고 있는 무한의 마력에 대한 정보를 말이죠.”

그래, 그랬다.

뮤즈는 유지한의 실험에 동참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망자의 아우성(B)을 통해 엿본 주아라의 기억 속에서는 그랬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래서 당신들 잘못은 없는 줄 아나 봐?”

유지한에게 가해지는 실험을 알고도 묵인했다. 그것만으로도 죄였다.

유리한에게 있어서는 벌을 내려도 충분한 죄.

유리한이 이를 으득 갈았다. 제로 바니스타가 그린 듯한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제가 무엇을 드리면 유리한 님의 화가 풀리겠습니까?”

그 말에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제 화가 풀릴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이 죽었다가 깨어나도 줄 수 없거든요.”

“그래도 혹시 모르죠. 저는 뮤즈의 백작입니다.”

제로 바니스가 오른손을 들어 왼쪽 가슴에 얹었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면서 말이다.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유리한 님께서 저희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하나 말씀드리자면.”

“소망의 탑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유리한이 제로 바니스타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제로 바니스타가 흉내 냈던 ‘제이’가 내준 찻잔을 들며 미소를 그렸다.

“그러니 제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흐음, 유리한이 콧소리를 한 번 내고는 웃는 낯으로 물었다.

“그럼, 백작님. 죽은 제 동생을 살려서 제 앞에 데리고 올 수 있나요?”

“네?”

“못 하죠?”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제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에요. 지한이가 다시 돌아오는 것.”

아, 유리한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고는 말을 이었다.

“백작님께서 저보다 빠르게 탑을 올라 소원을 빌면 되겠네요. 유리한 님의 동생분을 되살려 주세요, 라고요.”

제로 바니스타가 입을 다물었다.

유리한은 오만하게 입을 놀렸던 백작을 향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소망의 탑이 이 세상에 나타날 때 그랬다면서요? 최상층을 공략한 플레이어에게는 어떤 소원이든 이뤄주겠다고.”

그 말은, 죽은 사람 역시 살려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백작님.”

유리한이 몸을 일으키고는 제로 바니스타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어디 한번 열심히 탑을 올라가 보도록 하세요. 그래야 제가 뮤즈를 다른 오광보다 예쁘게 봐주지 않겠어요?”

“…그렇군요. 이것 참 열심히 노력을 해봐야겠습니다. 하지만 유리한 님.”

제로 바니스타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제가 어떻게 유리한 님보다 먼저 탑을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함께 탑을 오른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오호라, 그게 목적이었군.

유리한이 비딱하게 웃었다.

왜 제게 계속 접근을 하는가 했더니 손을 잡았으면 해서 그랬던 모양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주 웃기는 자식이네?’

또한 괘씸했다.

유지한의 일에 대해서 저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며 선을 긋는 모양새라니.

‘어떻게 골려먹어야 할까?’

유리한은 먹잇감을 앞에 둔 짐승처럼 두 눈을 번뜩였다.

제로 바니스타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꼭 주먹 쥐었다.

‘알아차렸군.’

유리한이 제가 그녀에게 접근한 이유를 알아차리고 말았다.

‘내 실책이다. 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그 전에 원하는 건 뭐든 주겠다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제로 바니스타가 속으로 혀를 찰 때, 다시 자리에 앉은 유리한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뮤즈의 백작께서 저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시는지 잘 알았어요.”

“그렇습니까?”

듣던 중 다행인 소리였다.

제로 바니스타가 어색하게 웃을 때, 유리한은 한껏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만물의 사람이었다면 바로 목을 베어버렸겠지만…….”

유리한이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이고는 입매를 비틀었다.

“백작님의 말마따나 당신은 내 동생의 일에 한 발자국 떨어져 있던 건 사실이니까요.”

제로 바니스타는 그 말이 품고 있는 뜻을 알아차렸다.

‘유지한의 일을 외면했던 것을 잊지 말라는 거군.’

그녀와 앞으로 함께 움직이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그에 대해 사죄를 해야 할 거다.

유리한이 뮤즈의 사과를 받아들이든 말든 상관없이.

제로 바니스타가 유리한과의 관계에 대해 머리를 굴릴 때, 그녀는 태평하게 다시 찻잔을 들었다.

디에스 라고가 그런 그녀를 보며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로 바니스타는 어떻든 유지한과 관련이 있는 자였다.

그가 유지한의 일에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유지한이 죽을 때까지 손 놓고 제 이득만 취했다는 거다.

‘그런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생각인 건가?’

디에스 라고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유리.”

그러자 유리한이 찻잔을 내려놓고는 미소를 그렸다.

“괜찮아, 디에스.”

마치, 디에스 라고가 자신을 왜 불렀는지 알겠다는 듯이 그리 대답하면서 그녀는 제로 바니스타를 두 눈에 담으며 말했다.

“우리 백작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면 좋을지 충분히 아셨을 테니까.”

제로 바니스타가 여상하게 웃었다. 제가 얼마나 심각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지 유리한이 알아차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럼, 저희는 이만 일어나 볼게요. 차 잘 마셨어요, 백작님.”

“유리한 씨, 저분과 더 이야기를 안 나눠봐도 되는 건가요?”

“네, 요한.”

유리한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제로 바니스타를 보며 웃었다.

“백작님과는 이야기 끝났어요. 그렇죠?”

“…네, 유리한 님. 조만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유리한은 그대로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고요한 역시 고민도 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갔다.

디에스 라고는 그 뒤를 쫓으려다가 멈춰서서는 제로 바니스타를 쳐다봤다.

“이봐, 너.”

“네, 디에스 라고 님.”

“유리가 준 기회를 소중히 여기도록 해라. 허튼짓하면 유리 대신 내가 네 목숨을 거둘 테니.”

제로 바니스타가 웃었다.

“네, 디에스 라고 님.”

디에스 라고는 제로 바니스타가 보여주는 웃음이 불쾌하다는 듯 사납게 얼굴을 구기고는 유리한을 쫓아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이내 문이 닫히자 제로 바니스타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정말.”

뚝, 웃음을 멈춘 그가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한없이 고민에 잠긴 얼굴로, 그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제로 바니스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이.”

“네, 백작님.”

충실한 종이 그 옆에서 고개를 숙였다. 제로 바니스타는 미소를 그렸다.

“만물의 욕심 많은 여우를 잠깐 만나고 와야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