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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가 되기 위한 손쉬운 방법 (102)화 (102/235)

102화 

라펠은 기꺼이 유리한의 안내자가 됐다. 그녀는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문기율과 어떻게 만났는지, 그가 얼마나 강한지 등등. 라펠은 서문기율에 대해 한없이 떠들어댔다.

그렇게 걸어가다 도착한 곳.

라펠이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기율 씨, 유리한 님을 모셔 왔는데…….”

와장창!

방문 안쪽에서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문기율 씨!”

라펠이 황급히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기 무섭게 그녀는 안쪽에서 튀어나오는 생명체에 부딪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야야!”

“라펠 씨, 괜찮으세요?”

“네? 네, 괜찮아요.”

라펠이 유리한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러는 사이, 라펠과 부딪친 생명체는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네쥬?”

라펠이 네쥬의 뒷모습을 알아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율 씨! 괜찮으세요?”

“…라펠.”

라펠은 엉망이 된 방에 황급히 뛰어 들어갔다.

창문 아래 내동댕이쳐졌던 서문기율이 라펠의 부축에 괜찮다고 손짓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유리한 씨.”

“아니에요. 요한, 서문기율 씨 좀 치료해 줄 수 있나요?”

“물론이죠.”

고요한이 서문기율에게 다가가 깨진 창문에 긁힌 얼굴을 치료해 주었다.

곧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유리한은 고운 얼굴에 상처가 난 것을 속상해하며 서문기율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래요? 네쥬가 저렇게 화를 내다니.”

“별일은 아닙니다. 그저 당신께 인사를 드리라고 했더니 저렇게 화를 내지 뭡니까?”

“아이고야.”

유리한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제가 네쥬를 두고 내기를 한 것에 화가 많이 난 모양이네요.”

“그건 유리한 씨의 잘못이 아니었잖습니까?”

“그렇다고 해도요.”

어찌 됐든 유리한은 ‘침입자’였다.

그리고 내기를 한 상대는 좋게 말하면 49층의 지배자, 나쁘게 말하면 침입자의 우두머리였던 랴오륭이었다.

“네쥬에게 억지로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라느니 뭐니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저라도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서문기율은 미안하다는 듯 찡그린 얼굴이었다.

‘안 되겠네.’

유리한은 황급히 서문기율의 관심을 네쥬한테서 돌리기로 했다.

“있잖아요, 서문기율 씨. 다친 와중에 죄송하지만 저는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아, 원래는 네쥬와 함께 유리한 씨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만.”

서문기율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다시피 네쥬는 도망쳤기에 저 혼자 인사드리겠습니다. 수인족분들의 편에 서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유리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인사할 필요 없어요. 그 자리에 있어서 아시겠지만 저는 단지 가르쳐준 것뿐이거든요.”

랴오륭, 그 비열한 혈맹의 남자에게 말이다.

그 말에 서문기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맹주에게 무엇을 가르쳐줬단 말입니까?”

“약육강식의 법칙이요.”

랴오륭은 말했다.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잡아먹히는 것, 그게 바로 이 세상의 법칙이라고.

유리한은 그 법칙을 랴오륭에게 똑똑히 보여준 것뿐이었다.

네가 내세운 그 법칙에 어디 한번 잡아먹혀 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제게 그런 감사 인사는 하실 필요 없어요.”

“그렇다고 해도 할 겁니다. 또한, 약속드리겠습니다.”

서문기율이 오른쪽 손을 왼손 가슴 위에 올리며 말을 이었다.

“유리한 씨, 훗날 당신께 큰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네?”

유리한이 당황하여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문기율은 우물쭈물 부끄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유리한 씨와 비교하면 저는 한낱 하룻강아지와 다름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유리한 씨께 보답하고 싶습니다.”

꼭이요.

덧붙인 말에 유리한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래서 훗날 제 힘이 되어주겠다고 하는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서문기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은, 아니, 두 번도 괜찮습니다. 세 번도 상관없고요. 유리한 씨께 제 힘이 필요할 때마다 달려가겠습니다.”

유리한이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옆에 있던 사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디에스, 내가 이렇게 인기가 많아.”

“그거야 잘 알고 있었지.”

디에스 라고가 유리한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니르로르와 그 옆에 서 있는 고요한을 흘긋거리고는 말했다.

“하지만 저런 녀석한테까지 인기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유리.”

불만 어린 목소리였다. 유리한은 키득거리며 웃고는 다시 서문기율을 바라보았다.

“마음만 받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을게요.”

그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의 힘을 필요로 할 때는, 그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때일 거예요. 그래도.”

그래도 당신은.

“…제 힘이 되어주실 수 있나요?”

잠깐의 정적, 그 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유리한 씨.”

한없이 올곧은 목소리였다.

유리한은 살짝 입술을 벌렸다가 이내 미소를 그렸다.

“좋아요, 그날까지 열심히 힘을 갈고닦길 바랄게요.”

그러면서 유리한이 말했다.

“제 힘이 되어주면서 그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49층의 지배자가 되었어도 죽기 살기로 탑을 올라야 하는 거 알죠?”

“당연히 압니다.”

서문기율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네쥬가 화가 났던 겁니다.”

“네쥬한테 지배자의 자리를 넘긴 후 49층을 떠나겠다는 말이라도 한 모양이네요.”

“네.”

서문기율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약합니다. 혈맹의 맹주가 제 뒤를 봐주게 됐다고 해도 제가 약한 건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유리한 씨?”

유리한은 그 말에 섣불리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저에 비해 서문기율이 약한 건 맞았다.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와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강하지.’

왜 ‘슈퍼루키’라고 불리는지 알 정도로 말이다. 그 때문에 유리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약한 건 모르겠고,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은 건 알죠.”

서문기율의 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 유리한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열심히 해보세요.”

“…네, 유리한 씨.”

서문기율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유리한 씨께서는 이대로 동료분들과 함께 탑을 올라가실 생각입니까?”

“일단은요.”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짓궂게 물었다.

“마을 재건을 좀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서문기율이 고개를 젓고는 입을 열었다.

“마을의 재건은 감옥에 갇혀있는 침입자 녀석들에게 맡길 겁니다.”

그러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면서 서문기율은 옅게 미소를 그렸다.

“그렇다면야.”

유리한도 방긋 웃었다.

“먼 훗날, 다시 만나기를 바랄게요. 바로 제 옆에서요.”

“네, 유리한 씨의 힘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녀는 픽 웃었다.

서문기율이 자신의 힘이 될 날, 그날은 분명 그가 제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날이 되고 말 테다.

‘도망가지 않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유리한은 알았다.

서문기율이 한 입으로 두말 하지 않는 남자란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서문기율, 그는 절대로 도망치지 않을 거다.

유리한이 심지 곧은 사내를 두 눈에 담고선 디에스 라고에게 속닥거렸다.

“디에스, 서문기율 씨 너랑 조금 닮은 것 같아.”

“헛소리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유리.”

저렇게 비실거리는 놈이랑 자신이 어떻게 같냐면서 디에스 라고가 구시렁거렸다.

유리한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서문기율에게 인사했다.

“그럼, 잘 지내요. 서문기율 씨의 동료분들도요.”

서문기율을 비롯한 그의 동료가 유리한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유리한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후 그들의 방을 나섰다.

“이대로 탑을 올라가실 건가요?”

“일단은 그럴 생각이기는 한데 말이죠.”

유리한이 웃는 낯으로 대답하며 고요한을 쳐다봤다.

“요한은 어떻게 생각해요?”

“저는…….”

고요한이 복도의 창밖을 한 번 흘긋거리고는 말했다.

“유리한 씨의 뜻에 따를게요.”

“요한, 그건 대답이 될 수 없는 거 알죠?”

고요한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곧, 그는 복도의 창밖을 다시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노예로 잡혔던 수인족분들의 상처만 조금 봐주고 50층에 올라가면 안 될까요……?”

내뱉은 목소리는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유리한은 고요한의 대답에 티 없이 맑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되죠. 자, 그럼 디에스.”

디에스 라고가 왜 부르냐는 듯 쳐다봤다. 그 시선에 유리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요한을 도와줘.”

디에스 라고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유리한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재잘거렸다.

“설마 싫다거나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 튜토리얼을 끝낸 위대한 영웅께서!”

“놀리지 마라.”

“히힛, 그럼 부탁 좀 할게.”

디에스 라고가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 너는 ‘볼일’을 보러 가는 거겠지? 시간이 날 때마다 너는 그 볼일을 보러 갔으니.”

디에스 라고는 유리한이 말하는 ‘볼일’이 무엇인지 몰랐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는 구태여 말을 꺼내지 않았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알려줄 테니.’

그렇기에 디에스 라고는 유리한이 탑을 오를 때마다 빌어먹을 용과 함께 처리하러 가던 ‘볼일’에 대해 묻지 않은 거였다.

디에스 라고의 질문에 유리한이 방긋 웃었다.

“응,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 말에 고요한이 말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유리한 씨.”

“네, 요한. 부탁할게요. 아 참, 침입자 녀석들한테 노예로 붙잡혔던 수인족분들은 인간을 경계할 가능성이 커요.”

“네, 충분히 이해하고 그분들께 다가가도록 할게요.”

“좋아요. 그럼, 디에스! 요한 잘 도와줘야 해!”

“생각해 보고.”

디에스 라고가 뚱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유리한은 알았다. 디에스 라고, 그라면 고요한을 도와줄 것을.

‘툴툴거리기는 할 테지만.’

유리한은 그에 대한 걱정은 그만두기로 하고 마을 근처의 숲으로 향했다.

- 유리한아, 오늘 그 신비로운 문을 열 생각인 게냐?

신비로운 문이란 ‘성장의 문’을 말했다. 그녀가 니르로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랜만에 열어보려고. 그간 시간이 너무 안 났잖아?”

이번에 오픈할 문은 다섯 번째 문. 네 번째 문(31Lv~40Lv)은 49층에 도달하기 전 격파했던 유리한이었다.

- 네 번째 문에서 나타난 보스 몬스터는 피닉스였지.

“그래, 불사조. 죽여도 죽여도 계속 살아나서 골치 좀 아팠었지.”

그뿐이랴? 날카로운 발톱에는 독이 묻어있었다.

‘독성 정화(A)와 독성 해독(A) 능력 덕분에 크게 문제는 없었지만.’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는 건 변함이 없는지라 처리하는 게 꽤 골치 아팠었다.

“뭐, 어쨌든!”

유리한이 짝, 가볍게 손뼉을 치고는 말했다.

“수인족들의 치료가 끝나기 전에 다섯 번째 문을 가볍게 격파하고 돌아가자고.”

그리고 올라가는 거다. 탑의 50층,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곳으로.

유리한은 씨익 웃으며 열쇠를 들었다. 곧이어 풍경이 바뀌었다. 나타난 건 총 열 개의 문.

유리한은 그중 굳게 닫혀있는 다섯 번째 문 앞에 섰다.

- 유리한아.

“걱정할 것 없어. 내가 말했잖아?”

끼이익―!

경첩이 녹슨 듯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에 유리한이 비딱하게 웃었다.

“다섯 번째 문, 가볍게 격파해 버리고 돌아가자.”

하지만 유리한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그녀를 향해 물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으푸푸풉!”

- 유, 유리한아!!

꼬르륵!

플레이어 하나와 한 마리의 용은 그대로 물에 잠겼다.

곧이어 나타난 시스템 창이 하나 있었으니.

[Welcome!]

[당신의 성장을 고대하며 다섯 번째 문이 열립니다!]

유리한이 봤더라면 욕설을 내뱉었을 경쾌한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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