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유리한 씨!”
서문기율이 애타는 심정으로 불렀지만 유리한은 방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서문기율 씨.”
그녀가 비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 새끼 팔을 날리든 다리를 날리든, 네쥬는 몸 성하게 데리고 올 테니까요.”
유리한은 그 말을 끝으로 쥐고 있던 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대신 꺼내는 든 것은 검이었다.
척, 랴오륭을 향해 검을 치켜든 유리한이 물었다.
“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더 제안해도 될까요?”
“어이쿠, 우리 영웅님께서는 제안할 것도 많으시지.”
그러나 들어는 보겠다면서 랴오륭이 히죽거렸다. 유리한도 싱긋 웃었다.
“서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맹약을 걸어요.”
“맹약이라…….”
랴오륭이 아래턱을 만지작거리더니 물었다.
“그와 관련된 스킬이라도 가지고 계신 겁니까?”
그렇게 묻는 랴오륭은 유리한이 어떤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눈치였다.
유리한은 고개를 저었다.
“맹약과 관련된 스킬은 없지만 그것을 시행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잖아요?”
바로, 마법사의 심판 아래에서 서로 약속을 내뱉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엔 마법사가 없습니다만? 뭐, 침입자들 사이에 있는 것 같지만 마법을 쓸 수 없도록 영웅님께서 손을 봐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기는 한데 마법사 못지않은 생명체가 있거든요.”
랴오륭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한 표정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니르로르.”
고요한의 머리 위에 앉아있던 니르로르가 날아와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았다.
날개 달린 작은 도마뱀이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자 랴오륭이 입을 뻐금거렸다.
“…니르로르?”
그건 분명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시대, 눈앞의 여자가 죽였다는 드래곤의 이름이지 않은가?
랴오륭은 당황한 얼굴로 쳐다봤지만 유리한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서 니르로르에게 물었다.
“맹약이 뭔지 알지?”
- 짐은 위대한 드래곤, 니르로르. 당연히 알고 있느니라.
“맹주님, 들었죠?”
유리한이 씨익 웃었다.
“나, 유리한은 혈맹의 맹주인 랴오륭과 위대한 드래곤인 니르로르 앞에서 약속한다. 수인족, 네쥬를 랴오륭의 손에서 지키지 못하면 침입자로서 이 시험에 계속 참가하겠다.”
랴오륭은 고민하다가 내뱉었다.
“…나, 랴오륭은 유리한과 위대한 드래곤인 니르로르 앞에서 약속한다. 유리한이 저 수인족을 내 손에서 지켜낸다면 49층의 지배자로서 그녀의 진영을 바꿔주겠다.”
랴오륭의 말이 끝나자 니르로르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 맹약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그 심장이 부서지리라.
우웅, 검붉은 마법진이 유리한과 랴오륭의 위에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위대한 드래곤, 니르로르의 앞에서 맹약이 이뤄졌다.
“자,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네에, 뭐. 바로 시작합시다.”
랴오륭이 비열하게 웃고는 네쥬를 하늘 높이 집어 던졌다. 예상치 못했는지 유리한의 두 눈에 경악이 서렸다.
“네쥬!”
랴오륭은 히죽거렸다.
“영웅님께서는 저 아이를 구하면 됩니다. 저는…….”
타앗!
랴오륭이 뛰어오르며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최선을 다해 죽이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저를 막으면 당신의 승리. 신분을 변경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덧붙여 들려온 말에 유리한은 입매를 비틀고는 그를 따라 땅을 박찼다.
혈맹의 맹주, 랴오륭.
그는 정말이지, 지금 당장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비열한 자였다.
“유리!”
“도와주지 않아도 돼!”
튜토리얼이 이뤄지던 시대, 유리한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공중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중력 저항(A)과 바람 저항(A).’
유리한이 씨익 웃었다.
정령석을 섭취하면서 얻은 스킬 덕분에 공중전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높이 뛰어오른 유리한은 네쥬를 향해 손을 뻗는 랴오륭의 아래턱을 가까스로 걷어찼다.
“큭……!”
쿠우!
땅에 처박힌 랴오륭이 핏물을 뱉어내고는 씨익 웃었다.
“이것, 참. 암만 영웅님이라고 해도 공중에서 저를 그렇게 걷어찰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유리한이 흙바닥에 가볍게 착지하고는 웃었다.
“저도 그렇게 쉽게 걷어차일 줄은 몰랐네요. 그야 저보다 레벨이 한참 높은 플레이어시잖아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랴우륭이 픽 웃음을 흘렸다.
“이런, 영웅님을 실망시켜 드린 것 같아 죄송하군요. 하지만.”
척, 자세를 잡은 그의 위로 붉은 기가 솟구쳐 올랐다.
“다음은 쉽지 않을 겁니다.”
“글쎄요.”
랴오륭에 의해 집어 던져졌던 네쥬가 유리한의 품에 안겼다.
유리한은 벌벌 떨고 있는 네쥬를 토닥거리며 미소를 그렸다.
“이번에도 똑같을 것 같은데.”
그녀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자 랴오륭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네쥬!”
“기, 기율……! 서문기율……!”
유리한은 급히 달려온 서문기율에게 아이를 넘겨준 후 랴오륭을 향해 검을 들었다.
“그보다 거래, 지키셔야죠?”
“아직입니다, 영웅님.”
랴오륭이 입가를 닦아내고는 비열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 제한 시간 같은 거 정해둔 적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랴오륭이 모습을 감췄다.
후욱!
그가 다시 나타난 건 유리한의 눈앞이었다.
코앞에 다가온 주먹에 그녀가 황급히 몸을 틀었다.
콰앙!
흙먼지가 일어나자마자 걷혔다. 랴오륭이 핏줄 선 주먹을 매섭게 휘두른 탓이다.
화악!
강렬한 공격에 유리한이 검을 휘둘렀다.
‘이건 못 피해.’
그러니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아니면.
‘벤다.’
유리한은 검에 마력을 실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끝이 매섭게 허공을 가르자 랴오륭이 몸을 틀었다.
“……!”
그가 가까스로 공격을 피해내고는 그녀에게서 한 발자국 멀리 떨어졌다.
유리한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경험에서는 유리한이 몇 배는 앞서지만 ‘수치’로 따지면 상대는 그녀보다 강한 플레이어였다.
그러니.
‘쓸 수 있는 패는 모두 쓴다.’
유리한은 랴오륭의 모든 감각을 빼앗았다. 순식간에 세상과 단절된 랴오륭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영웅님.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제 감각을 모두 뺏어버리시다니요.”
“스킬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전 맹주보다 스탯 능력치가 한참 낮잖아요?”
그러니 이 정도는 애교로 봐달라면서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시각이 사라진 랴오륭에게는 보이지 않을 얼굴.
더욱이 청각 역시 빼앗겨 그는 유리한의 너스레를 단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어쨌거나 유리한은 검을 고쳐 쥐고 자세를 잡았다.
‘조금 전보다 더욱 빠르게 움직이자.’
그래야 랴오륭에게 공격이 닿는 건 물론, 재수 없게 히죽거리던 입도, 네쥬를 하늘 높이 집어 던졌던 저 팔도 찢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타아앗!
유리한이 조금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랴오륭에게 달려들었다. 후웅, 허공을 가르는 공격에 그가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유리한에게 빼앗기지 않은 감각.
오직, 기감(氣感)에 의지한 몸놀림이었다.
‘괜히 오광 중 한 곳인 맹주를 이끄는 건 아닌 모양이지.’
유리한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고 해도 충분히 랴오륭을 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휘두른 검을 거두고는 창을 꺼내 쥐었다.
후웅!
랴오륭의 목을 향해 날아간 창이 그의 주먹에 나가떨어졌다. 무식한 타개책이었으나 랴오륭의 손은 흠집 하나 나지 않고 멀쩡했다.
그야말로 금강불괴와도 같은 몸.
다만, 유리한은 그와 같은 플레이어를 한 명 알고 있었다.
‘구천하, 그 아저씨가 생각나네.’
그 덕분에 유리한은 단단한 저 몸을 부술 방법을 알고 있었다. 금강과도 같이 암만 튼튼한 신체라도 사람으로서 가지고 있는 유일한 약점.
‘눈.’
유리한은 랴오륭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가 휘두른 주먹을 가까스로 피하며 창을 휘둘렀다.
시력을 빼앗겨 초점이 잡히지 않던 그의 두 눈에 길게 생채기가 났다. 유리한은 그 즉시 랴오륭에게서 빼앗았던 감각을 모두 돌려줬다.
“……?”
랴오륭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곳곳에서 피어오른 혈향이 코를 찔렀다. 조금 전까지 맡아지지 않던 냄새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제 모든 감각이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크… 윽, 으아아악!”
두 눈이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시력을 빼앗긴 상태라고 하기에는 눈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상당했다.
랴오륭은 커다란 손을 들어 눈가를 덮었다. 손바닥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핏물이 느껴졌다.
“유리한……!”
“오, 드디어 제 이름을 불러주시네요. 계속 ‘영웅님’이라고 듣기 싫은 소리를 하더니.”
“유리한!!”
랴오륭이 한 마리의 짐승처럼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유리한은 비웃음을 흘리고는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전투 중, 흥분하여 이성을 잃은 상대처럼 상대하기 쉬운 녀석은 없었다.
그렇지만 유리한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기율 씨!”
랴오륭은 이성을 되찾는 것이 빨랐다. 그는 유리한 대신 서문기율을 노리기로 했다.
정확히는 그의 품에 안겨있는 수인족, 네쥬를.
어차피 저와 유리한은 거래라는 명목으로 내기 중이지 않나?
‘죽이자, 저것만 죽이면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유리한은 49층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절대 태초의 마을을 부서뜨리지 못할 테니.
순식간에 서문기율의 앞에 당도한 랴오륭이 그의 품에 안겨있는 네쥬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
“리스트레인.”
나지막하게 울린 목소리와 함께 사슬이 그를 옭아맸다.
‘마법사……!’
랴오륭은 뒤늦게 서문기율의 동료 중에 마법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마법을 시전한 건 그의 동료인 라펠이 아니었다.
“나이스, 요한!”
마법을 시전한 사람은 유리한의 동료인 고요한이었다.
저도 모르게 시전한 마법.
고요한이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됐다, 됐어!’
유리한 씨에게 도움이 되었다.
고요한은 유리한이 랴오륭을 향해 창을 휘두르는 것을 보며 벅찬 감정을 느꼈다. 랴오륭은 제 몸을 휘감은 사슬을 거칠게 부수어 버렸다.
공략되지 못한 70층, 그 아래까지 탑을 오른 저였다. 그렇기에 이깟 마법 따위 손쉽게 파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고요한의 마법에 의해, 몸에 둘렀던 붉은 기운이 사라진 것을.
촤아악―!
그리고 그 빈틈을, 유리한이 순식간에 파고들 줄을 말이다. 휘둘러진 창에 오른쪽 어깨 아래가 휑하니 비었다. 랴오륭은 입을 뻐금거리다가 왼손을 들었다.
“으…으아아악!!”
그가 무릎을 꺾더니 상체를 숙이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런 그를 유리한은 차디찬 시선으로 내려봤다. 먹잇감을 앞에 둔 짐승과도 같은 눈.
북해빙궁에서 휘몰아치던 눈보라처럼 서늘하기 그지없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어때요, 맹주?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에게 먹힌 기분은.”